진주성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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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18호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진주성 晋州城 | Jinjuseong Fortress | |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본성동)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면적 | 171,805.1㎡ |
건축시기 | 조선 세종 19년(1437년)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소유 | 진주시 등 |
관리 | 진주시 |
진주성 항공 사진[1] |
누각인 촉석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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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의 진주성
국립진주박물관의 진주성 모형
진주성의 변천과정
100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촉석루》 모습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서 본성동에 걸쳐 있는 둘레 1.7km의 석성(石城)으로,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말 우왕 때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진주 대첩의 현장이기도 하다. 진주시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들르는 진주의 대표 명소이다. 지방에 위치해있으며 중세의 성채, 요새를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수학여행지라는 점에서 러시아 지방의 크렘린[2], 프랑스의 카르카손과 비슷하다.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인 진주 대첩의 현장이자 임진왜란의 최대 격전지로 현대의 진주성은 내성뿐이다. 위의 이미지에서 조선시대 진주성 규모에서 볼 수 있듯 외성까지 포함하면 훨씬 큰 성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도시개발 명목으로 외성들을 파괴해버려서 현재의 내성만 남았다. 외성은 몇차례 증/개축이 있었는데 특히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크게 증축되어 당시 조선도 나름대로 일본의 침공을 예상하고 전쟁대비를 했음을 알수 있게 해준다.
시내의 중심부에 위치해있어 관광객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진주논개제를 비롯해 개천예술제, 제야 타종행사, 각종 사생대회 등등 진주시에서 개최되는 다양한 야외 행사가 진주성에서 열린다. 성공적인 지역 축제의 사례로 꼽히는 진주남강유등축제의 행사장으로도 매년 사용되고 있다.[3]
원래 남쪽의 남강, 그리고 북쪽은 연못이 해자(垓子) 역할을 하는 천혜의 요새였으나, 일제강점기 때부터 도시 개발이 진행되며 연못들은 전부 매립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조선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서장대 아래 나불천을 북쪽으로 이어 지금의 진주경찰서, 진주교육지원청, 중앙로터리, 동방호텔 일대를 해자로 하는 둘레 4km의 외성(外城)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외성 복원의 의미로 촉석문부터 진주교 사이 구간에 진주대첩 광장을 조성하고 있으며,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조선시대 외성, 고려시대 토성(土城)과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수로도 발굴되었다. 또한 후삼국 시대로 보이는 유골과 유물이 발굴돼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부지 전체에 지하주차장을 건설하는 계획도 논쟁 끝에 대폭 축소하고 발굴된 유적 대부분은 보존되기로 했다.
읍성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사실 엄연히 병영성에 속한다, 진주 목사의 치소인 동헌과 객사는 진주성에서 북쪽으로 해자 역할을 한 대사지 너머에 있었다.
2. 내부 시설
진주성에는 촉석루(矗石樓), 의기사(義妓祠)[4], 임진대첩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5], 공북문(拱北門),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진주성 비석군(碑石群), 청계서원(淸溪書院), 경절사(擎節祠), 북장대(北將臺), 국립진주박물관(國立晋州博物館)[이전예정], 창렬사(彰烈司), 호국사(護國寺), 서장대(西將臺), 의암 등 진주시의 많은 문화유적들이 경내에 흩어져 있다.특히, 촉석루는 2012년 CNN go에서 선정한 한국의 명소 50곳 안에 선정될 만큼 건축미와 풍경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추고 있다. 촉석루에서 남강과 함께 내려다 보이는 경치도 아름답지만, 강 건너편 망경동 강변에서 바라보는 야경 또한 몹시 아름다워서 진주성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상술한 대로 실제로 읍성이 아닌 병영성으로 목사의 치소인 동헌과 객사는 진수정 밖 북쪽의 해자 역할을 한 대사지 너머에 있었다.
3. 교통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어 진주를 경유하는 관광객들, 특히 내일러들이 많이 방문하고 있다. 진주시 시내버스의 경우 120, 130번 등 주요 노선을 비롯해 사실상 시내로 향하는 아무 버스나 잡아 타도 진주성 근처('인사광장/진주성' 정류장)에 접근할 수 있다.[7]자가용으로 방문할 경우, 진주성 정문인 공북문에 있는 유료주차장이나 서문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공용무료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으며 혼잡할경우 촉서문옆의 진주대첩역사공원 지하주차장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4. 기타
이 성에서 명칭이 유래한 진주성로가 있다.촉석루(矗石樓)라는 이름이 다소 생소한지 많은 사람들이 '촉성루'라는 명칭으로 잘못 알고 있다. 진주성을 다녀온 관광객들의 블로그 포스팅은 물론이고 EBS 한국기행 프로그램에서조차 잘못된 자막을 송출할 정도.
2018년 진주대첩기념광장 조성사업 도중, 진주성의 외벽과 고려시대 토성 그리고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수로 등도 추가로 발견되었다.
진주시가 워낙 눈이 잘 오지 않는 지역이라[8], 밤새 눈이 내려 적설량을 기록한 날이면 아침부터 진주성 건너편 둔치에서 사진 동호인들이 설경을 담기 위해 모이곤 한다.
2017년 포켓몬 GO로 인해 의외의 관광특수를 누렸다. 진짜로 가 보면 포켓스탑과 포켓몬이 많다. 그리고 포켓스탑이 문화재와 어우러져 배치되어 있어 진주 지역 문화재를 외지인들에게 소개시키는 것에도 기여하는 셈.
아직 공원 내에 일본 나무들이 많다고 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진주성 내에 진주 신사와 진주공원을 설치한 영향이다. 진주성이 벚꽃도 많은 이유도 이 때문.
유튜브 자이언트펭TV 에서 펭수와 뚝딱이? 번개맨 등 진주여행을 하는 컨텐츠에서 펭수가 매표직원에게 개인기를 한 장소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의 신하이자 제2차 침입 때 거란으로 끌려간 진주 하씨의 한 파의 시조였던 하공진에 관련된 경절사가 이곳에 있다.
5. 현대
디지털진주문화대전: 진주지구 전승비 이 문서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밀고내려올 때 진주 동쪽에 북한군 제6사단과 제9사단이 진주 시내에 쳐들어왔는데, 이때 미 제25사단의 킨 기동부대 가 북한군 제6, 9사단과 전투를 벌인 끝에 1950년 7월 29일 북한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이때 당시 미 제25사단의 방어 전투로, 북한군의 부산 진출을 저지하고 진주 동쪽 지역에서부터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낙동강 방어에 성공한 유엔군은 전력을 회복하여 인천 상륙 작전을 위시로 한 총반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전승을 기리기 위해 육군 1206건설공병단이 1958년 7월 10일 건립하였다.
6. 외부 링크
7. 사적 제118호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1] 임진왜란 당시에는 현재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서 내용을 참고[2] 모스크바의 크렘린 말고도 유럽 러시아의 지방 도시들에도 크렘린이 있다.[3] 본래 축제 기간 동안은 무료입장이었으나 2015~2017년은 유료화가 진행되어 성인 1만 원의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진주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2018년 다시 무료화로 전환되었다.[4] 논개를 기리는 사당.[5] 일제강점기엔 진주 신사가 설치된 곳이었다. 해방 후 조선 사람에 의해 즉각 철거되었으며 1962년 그 터에 진주방송중계소(진주 KBS의 전신)가 설치되었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설치된 것은 1987년의 일이다.[이전예정] [7] 단, 150번, 160번 계통의 노선들은 시내로 가지 않으며, 250번은 진주성 서쪽의 서장대 주변을 지나가기 때문에 이용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8] 때문에 눈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1cm라도 쌓이면 교통이 마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