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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17:00:15

문오장

파일:KBS 로고 화이트.svg 공채 탤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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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서울중앙방송(現 한국방송공사) 탤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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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제10회
(1974년)
제11회
(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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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
(한백년)
문오장
(조총련)
김무생
(집념)
신구
(타향)
<colbgcolor=#aaaa22><colcolor=#fff> 문오장
文五長
파일:배우 문오장.jpg
이름 문오장(文五長)
출생 1938년[1] 3월 13일
경기도 경성부 원정1정목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1가)
사망 1999년 9월 9일 (향년 61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병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동상업고등학교 (졸업)
신흥대학교 (상학 / 학사)
가족 부인, 슬하 1남 1녀
데뷔 1966년 KBS 6기 공채 탤런트

1. 개요2. 생애3. 활동 내역
3.1. TV 드라마3.2. 영화3.3. 연극3.4. 라디오 드라마3.5. MC3.6. 저서
4. 참고/관련 자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배우이자 개신교(기하성) 목사, 온누리선교교회 설립자[2].

2. 생애

1938년 경기도 경성부 원정1정목(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1가)에서 사금 채취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효로1가 토박이였고 아버지는 작은 체구에 다부진 몸을 지녔으나, 성격은 권위적이면서 난폭했다. 반면 어머니는 자애로웠으며 외가 친척 중 한 명이 불교 승려였다. 3살 즈음에 아버지가 만주에 사금이 많이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 인부와 함께 만주 쑹화강변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1945년 8.15 광복 후 소련군의 진주로 귀국해야 했다.

대동상업고등학교(現 대동세무고등학교) 시절 여성국극단이 공연한 <무영탑>을 감명깊게 본 걸 계기로 연극부에 들어갔고,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사육신>으로 입상했으며 김재형, 김순철, 최불암, 신성일, 김영옥 등 연극/영화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의 강권에 못 이겨 신흥대학교(現 경희대학교) 상학과에 재학했고, 그 뒤에도 몰래 연극 활동을 하다 졸업한 뒤 은행원으로 잠깐 일했으나, 이마저도 그만두고 실험극장, 국립극단, 자유극장 등지 극단을 전전하며 <리어왕>, <이순신>, <신의 대리인> 등지에서 연극 배우로 활약했다.

그러나 연극을 하면서 동료 배우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자, 1966년 KBS 6기 공채 탤런트로 선발되어 초기에는 건달 같은 조연급 악역만 주로 맡아왔다. 1968년 장일호 감독 영화 <황혼의 부르스>에 출연하며 은막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1970년 김효천 감독의 <한많은 남아일생>을 찍던 도중 다리 부상으로 영화 및 드라마 출연에 지장이 생겼고, 병원비조차 감당할 수 없어 전셋집 대신 달셋방으로 가기도 했으며 아버지까지 떠나보내야 했다. 결국은 돈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드라마/영화 촬영 뒤엔 밤무대까지 가기도 했다.

1971년 안수길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일연속극 <북간도>에서 창윤 역으로 출연한 뒤부터 인기를 점차 얻었고, 1974년 실화극장 <조총련>에서 만경봉호 선장 역[3]을 맡아 악역 연기가 리얼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걸 본 김정일이 격노하여 "그 쌔끼 평안도 사투리는 언제 배웠어?"라고 욕을 퍼부었고, 누가 문오장이 평안도 사람이라고 하자 "기래? 그렇담 더군다나 가만둘 수 없다!"라고 으르렁거려서 최은희가 혁명을 모르는 배우들이 먹고살려고 하는 거지 자진해서 맡은게 아니지 않느냐고 달랬다고 한다. 같은 해엔 <노동당>에선 김정일 역도 맡았다. 다른 한편 1975년 일일연속극 <아버지와 딸들>에선 아버지인 김 대령 역으로 이미지 전환을 하기도 했다. 특히 <북간도>, <조총련>, <노동당> 등지에선 이북 사투리 연기는 더 두드러졌는데, <북간도>에선 함경도 사투리를 배우려고 자신의 집에 함경도 출신 가정부를 초빙시켰고, <조총련>에서 평안도 사투리 대사를 잘 구사하기 위해 평양 출신인 친구 아버지를 찾거나 자신이 많이 찾는 평안도 아줌마 집에서 3~4시간씩 묵기도 했다.[4]

연기생활 내내 몸을 사리지 않고 불철주야 일한 탓에 칵테일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그 탓인지 1970년대 후반부터 위염으로 고생하다 교회 구역장이던 이웃이 자신의 사업자 대출보증을 서 주면서 개신교를 처음 접했고, 독실한 개신교 신도인 부인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에 최자실 목사로부터 목회자가 될 것을 권유받고 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1980년에는 신군부의 사회정화운동 여파로 그동안 부업으로 운영했던 구두살롱과 사우나 사업을 정리한 뒤 1982년부터 고운봉, 전계현, 임동진, 송재호, 강효실, 나연숙 등 동료 크리스천 연예인들과 함께 '연예인선교회'를 창립했고, 군 선교에서도 적극 나섰다. 또한 1981년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등지의 개신교 영화에도 나왔다.

1983년 춘천 촬영 도중 쓰러져 서울의 한 병원으로 이송됐고, 진단 결과 심부전증, 당뇨, 혹 등으로 인해 입원했지만 혈압 문제로 수술을 못 하고 퇴원했다. 1986년 12월에 드라마 <남십자성>을 끝으로 브라운관에서 자취를 감춘 후 이듬해 5월부터 목사 안수를 받아 도봉구 방학동 미아리비손쇼핑센터에 '온누리순복음교회'를 개척해 담임목사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건물주가 개신교 신도인 터라 무상 임대를 받았으나 건물주가 예배당 문을 폐쇄하고 전기세를 교회 측에 떠넘기는 등의 갑질로 인해 쌍문동으로 옮겼다.

1991년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해 목회활동을 재개했다. 1996년, 레미제라블의 로컬라이징판 드라마 <도둑>에 주연으로서 연기자로서도 복귀하여 목회자와 연기자 활동을 겸임하며 활동하다가 1998년 11월 미국 성극순회 공연 도중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해 오다 1999년 9월 9일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병원에서 뇌졸중으로 별세했다. 향년 61세.

그의 유족으로는 부인 탁정신 여사[5] 및 문찬우(文燦寓) 목사 등 1남 1녀가 있다.

여담인데 1990년대 중순, 생전에 한 지상파 방송 토크쇼에 나와서 신상옥 감독을 만난 이야기를 했는데, 신 감독이 북한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김정일과 이야기를 하는데, 김정일이 신 감독에게 "그 남조선에 문오장이라는 작자를 아냐?"고 질문을 했다고 했다. 신 감독이 "안다"고 하자, 김정일은 "만일에 통일 된다면 내 고놈부터 죽여버리고 싶소!"라고 언짢아했다고 하는 거 아닌가? 이유인 즉 "<지금 평양에서>라는 드라마에서 그 문오장이 아버지(김일성)를 악귀처럼 만들어버리고 연기하는데, 보면서 쌍욕이 나오더구먼..."이라는 것이다.

신상옥 감독은 "그게 연기자로서 각본대로 최선을 다한 건데 잘못이 아니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자 김정일도 생각하더니 "쳇... 그러네. 명색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내가, 최선 다하여 연기한 연기자를 그렇게 연기 잘했다고 함부로 죽이는 것도 그렇군."이라고 말하고 다시는 언급하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문오장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하며 문오장은 "내 연기가 그만큼 악랄하게 좋았나 보다"라며 그냥 웃었다고...

아마 최은희가 했던 얘기의 와전 버전으로 보인다. 정작 <지금 평양에서>에서 문오장은 김일성 역이 아니라 김철만 역을 맡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3. 활동 내역

3.1. TV 드라마

3.2. 영화

3.3. 연극

3.4. 라디오 드라마

3.5. MC

3.6. 저서

4. 참고/관련 자료



[1] <TV가이드> 기사 기준. 호적상으론 1940년 3월 13일.[2] 대중이 흔히 들어본 온누리교회의 설립자는 하용조 목사이다. 문오장 목사가 설립한 교회는 '온누리선교교회'이다.[3] 1975년 <타향> 편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다.[4] 출처: <TV가이드> 1981년 12월 12일자(제22호) p51.[5] KBS 8기 탤런트 출신.[6] 홍성원 작가의 소설 <남과 북>이 원작이다.[7] 홍콩과의 합작 영화.[8] 문화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