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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3:26:13

박찬주(교육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7px-The_Imperial_Seal_of_Korea_03.png
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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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추계예술대학교 심볼.svg 추계학원 이사장
신설 초대
박찬주
2대
황신덕

<colbgcolor=#29176e> 朴贊珠
박찬주
파일:external/img.khan.co.kr/6i2022b.jpg
본관 반남(潘南)
작위 공비(公妃)[1][2] → (왕공족 폐지)
출생 1914년 12월 11일
경기도 경성부
사망 1995년 7월 13일 (향년 80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병원
생부 부친: 박일서(朴日緖)[3], 모친: 박원희(朴元熙)
배우자 이우(李鍝)
자녀 장남: 이청(李淸), 차남: 이종(李淙)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3.1. 친정3.2. 시가
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박찬주는 대한민국의 교육자이자 사회사업가로, 대한제국개화파 정치가[4]였던 박영효의 서손녀이다. 의친왕의 실질적인 맏며느리이다.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인 이준용의 양자 이우의 부인으로 운현궁종부(宗婦)였으며, 일제강점기 왕공족공비(公妃)였다. 또한 중앙여자중학교중앙여자고등학교의 설립자이자 사립학교추계학원의 초대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 생애

1914년 12월 11일, 아버지 박일서(朴日緖)와 어머니 박원희(朴元熙)의 5남 3녀 중 장녀로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박영효는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의 남편, 즉 철종의 부마였다. 조선의 법도상 부마는 사별해도 재혼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영혜옹주는 박영효와 결혼한 지 3달만에 요절했다. 원칙대로라면 박영효는 재혼도 못하고 평생을 혼자서 살아야 했고 당연히 후사도 볼 수 없었다. 이에 고종은 그를 배려하여 특명으로 영혜옹주가 하가할 당시 몸종으로 데려갔던 궁녀들을 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 중 한 명인 나인 범씨가 낳은 아들이 박찬주의 아버지 박일서이다.

박일서와 그의 자녀들도 원칙적으로는 서자, 서손이 되어야 했지만, 본처와 사별하고 재혼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박영효의 유일한 후사였기 때문에, 사실상 박일서는 적장자로 대우받았다.[5]

1932년 3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 황족과 화족(귀족)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6]에 진학하였다.

1934년 7월 11일, 궁내성 종질료(宗秩寮)에서 약혼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결혼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우 문서를 참고.

1935년 4월 17일, 혼인을 인정하는 쇼와 천황의 칙허가 발표되었다.
파일:이우와 박찬주 고화질 사진1.jpg
파일:이우와 박찬주 고화질 사진2.jpg
<colbgcolor=#29176e> 남편 이우와 찍은 사진

1935년 5월 3일, 박찬주와 이우도쿄 별저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같은 해 6월 28일경성부로 돌아와 종묘와 능원을 참배하고 조선호텔과 운현궁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결혼한 지 약 1년 후, 1936년 4월 23일에는 장남 이청(李淸)이, 1940년 11월 9일에는 차남 이종(李淙)[7]이 도쿄 별저[8]에서 태어났다.

1938년경,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황신덕에게 소유 건물을 희사하여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9]의 설립을 도왔다. 이 때의 인연으로 광복 이후 추계학원의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남편을 잃은 후[10] 두 아들과 함께 운현궁에 거처하였다. 해방 후 제정된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기존의 황실 재산이 모두 국유화되자 정부 및 국회 관계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운현궁이 흥친왕 집안의 사저임을 호소하여 결국 국회의 사유 재산 승인을 받아내었다.

1950년 4월, 지금의 추계예술대학교중앙여자고등학교중앙여자중학교추계초등학교의 재단인 추계학원의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92년, 운현궁을 서울특별시에 매각하고,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다 1995년 7월 13일 오전 5시 15분[11],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흥선대원군 묘역에 남편 이우와 합장되었다.

3. 가족 관계

3.1. 친정

3.2. 시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황실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대중매체에서

파일:왕조의 세월 박찬주.png}}} ||
<colbgcolor=#29176e> 〈왕조의 세월〉의 박찬주

[1] 재위 1935년~1947년[2] 공작부인을 이르는 말인 공비(公妃)와 같은 한자를 쓰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비(公妃)는 일제강점기 왕공족의 지위 중 하나인 공(公)의 부인을 이르는 말이다. 참고로 일본 정부조선귀족들에게 수여한 오등작 제도의 공작이 아니라 별도의 계급이다. 자세한 내용은 왕공족 문서를 참고.[3] 박영효의 차남, 서자이다.[4] 그리고 친일파. 이우는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싫어해 박찬주와 결혼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박영효가 친일반민족행위자여서 겨우 일제를 달래 혼인할 수 있었다.[5] 비단 이런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을 경우에 서자를 법적으로 본처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은 민간 양반가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었다. 이 경우 후사를 이은 서자는 당연히 그 집안의 적장자로 취급받았다. 이는 민간뿐 아니라 왕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 경종 등이 대표적인 사례.[6]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가쿠슈인 여자대학의 전신[7] 안타깝게도 이종은 브라운 대학교 유학 중 1966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8]궁내청 보관 기록에 의하면 도쿄 공저의 자세한 위치도 나오는 데 당시 공가 도쿄 별저 주소는 도쿄도 시부야구 도키와마츠쵸 101번지. 현재 이곳은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시부야 캠퍼스 중등부 인근이라고 한다.[9]중앙여자중학교중앙여자고등학교의 전신.[10] 이우히로시마로 발령이 났을 때, 조선에 머물게 해달라는 청원을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가 거절하였다. 만일 친일파였던 조부 박영효1945년까지 살아있었더라면 이우가 조선에 머물 수 있도록 백방으로 애써주었을 것이다.[11] 남편 이우가 죽은 지 약 50년 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