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준의 수상 및 영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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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에서의 최전성기였던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 |
원주 동부 프로미 시절 | |
서울 SK 나이츠에서의 말년 | |
CLA 챔피언스 No.14 | |
이승준 (李勝俊 / Eric Lee Sandrin) | |
생년월일 | 1978년 3월 18일 ([age(1978-03-18)]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
학력 | 포틀랜드 대학교 (1997~1999) 시애틀퍼시픽 대학교(Div.II) (2000~2002) |
포지션 | 파워 포워드, 센터 |
신체 | 205cm, 105kg |
프로 입단 | 2009년 혼혈 드래프트 2번 (삼성) |
소속팀 | 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7)[1] 서울 삼성 썬더스 (2009~2012) 원주 동부 프로미 (2012~2015) 서울 SK 나이츠 (2015~2016) |
국가대표 |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 은메달 2012 런던 올림픽 최종예선[2] 2013 마닐라 ABC - 3위 |
가족관계 | 동생 이동준, 배우자 김소니아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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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별명은 큰머시[3]. 미국 태생의 미국인이었으나 한국으로 귀화하여 현재는 한국 단일 국적자이다.주한미군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다. 미국 이름은 에릭 산드린(Eric Lee Sandrin). 동생인 이동준과 함께 형제 농구 선수로 유명하다.
2. 활동
2.1. 에릭 산드린 Ch.1 : 대학 시절 ~ 졸업 후
NCAA 시절(포틀랜드대 1~2학년) 기록NCAA 미드메이저 컨퍼런스인 West Coast Conference 소속 포틀랜드 대학교에 입학한 에릭 산드린(이승준)은, 신입생때부터 팀내 최장신 선수 중 하나로 시즌 전 경기에 출전했지만, 컨퍼런스 중하위권 팀이던 포틀랜드대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렸고, 결국 2학년을 마치고 고향 워싱턴주에 있는 NCAA 디비전 II 소속 시애틀퍼시픽 대학교로의 전학을 선택한다.[4] 이승준은 시애틀퍼시픽 대에서 주전 센터로 뛰며 전학 첫 시즌인 00-01 시즌 Pacific West Conference 우승을 따냈고, 소속팀을 NCAA 디비전 II Top 20에 올려놓는다. 이승준이 포틀랜드대를 떠난 직후인 1999년, 동생 대니얼 산드린(이동준)이 포틀랜드대에 입학한 바람에 둘이 함께 뛰지 못했지만, 1년 후 대니얼마저 시애틀퍼시픽 대학교로 전학 오면서 비록 Division II이긴 해도 이들 형제는 한 시즌(2001-02)간 같은 팀에 뛰게 되었다.
시애틀퍼시픽 대학교 졸업 후 미국 하부리그인 CBA를 비롯, 브라질, 카타르, 폴란드 리그 등에서 뛰었고, 이 와중에 여러 차례 NBA 무대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2005년 NBA 프리시즌에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새크라멘토 킹스에서 뛰면서 NBA 진출을 모색했지만 불발되었고, 이후 미국 하부리그인 IBL에서 2005-06시즌을 뛰던 중 묘기 농구단인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에 입단하는 등 진정한 프로로 거듭나지는 못했다. 2006-07 시즌에는 포르투갈 리그에서 뛰며 올스타전 덩크 콘테스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5]
※2007-08 KBL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 당시
KBL 입단도 꾸준히 노크해보았지만 2004-05시즌부터 자유계약 외국인 선수들이 장악하고 있던 KBL 무대에 고작 디비전 II 대학 출신인 이승준이 설 자리는 없었고, 2007-08 시즌 부활한 KBL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도 응시했지만 어느 팀에도 지명받지 못한다. 하지만 2007-08 시즌 새로 뽑은 외국인 센터 케빈 오웬스
2.2. 에릭 산드린 Ch.2 : 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7-08)
만 32세의 나이에 대체 외국인 선수로 2007-2008 시즌 2라운드 도중에 울산 모비스에 합류한 이승준은 안양 KT&G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갑작스런 발 통증을 호소하며 출전하지 못했고, 병원 검진 결과 발목 골절 후유증으로 발에 철심을 박은 것을 입단 시에 밝히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며 리그에 출전하기도 전에 퇴출될 위기에 처한다. 유재학 감독을 비롯한 울산 모비스 관계자들은 그간 부상을 숨기고 KBL에 왔던 많은 외국인 선수들과 같이 이승준이 사기쳤다고 비난했고, 이승준 또한 구단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다며 법정 분쟁까지 불사할 태세였다. 이후 정밀 검진 결과, 이승준의 발목 철심이 경기력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최종적으로 모비스 측의 과잉대응임이 드러난데다, 이승준을 퇴출할 목적으로 데려온 왕년의 빅맨 얼 아이크가 예전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만큼 얼타는 모습만 보이다 6경기만에 퇴출된 탓에, 결국 모비스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승준을 새 외국인 선수로 최종 선택하지만, 이승준 마음에는 이미 상처가 한가득 난 상태였다.
온라인으로 소문만 무성했던 이승준은 데뷔 시즌 당시에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는데, 2007년 트라이아웃 이후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탓에 몸상태가 최악이었고, 트라이아웃에서 보여준 화려한 덩크와 외곽 슈팅은 온데간데 없는데다 낮은 전술 이해도 탓에 접전 상황에는 루키 함지훈과 노장 이창수에도 밀려 벤치를 지키는 신세였다. 평균 기록도 한팀의 외국인 선수로 보기 힘든 11.8점-6.6리바운드에 출장시간도 20분에 못미치며 "대체 오웬수보다 나은게 뭐냐?"는 혹평과 함께 언제 퇴출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란 분위기가 팽배하다가, 5라운드 초반 함지훈이 부상으로 시즌아웃 된 시점부터 평균 20점 10.5리바운드의 괜찮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하지만, 실력을 보여주기 시작한 지 단 4경기만에 무릎 부상으로 시즌아웃 판정을 받으며 팀을 완전 떠나게 되었다. 에릭 산드린 시절 KBL에서 보여준 이승준의 모습은 평범한 외인은 커녕 토종 빅맨 수준에도 못미치는 실망스런 수준이었다. 이 때 유일한 화제거리는 동생인 이동준과의 골밑 맞대결 정도.
KBL을 떠난 이승준은 2008-09 시즌 호주 프로리그 NBL의 싱가포르 슬링거스[6]에서 한 시즌을 뛴다.
2009년 귀화 혼혈 선수를 받아들이기로 한 KBL의 결정에 따라 귀화를 전제로 드래프트에 응시, 2009년 귀화 혼혈 선수 중 전체 2번으로 서울 삼성 썬더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KBL 비시즌 기간 동안 2009 시즌 프랑스 1부리그 샬롱 팀에 대체 외국인 선수로 잠깐 뛴 후, 전태풍과 함께 귀화 시험에 합격하면서 이름을 이승준으로 개명했다.
2.3.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2009~2012)
당시 서울 삼성은 최강의 외국인 선수이던 테런스 레더와 이승준의 트윈타워를 내심 기대했으나 두 사람의 호흡은 전혀 맞지 않았고 결국 레더는 여러가지 잡음속에서 2009-10시즌 도중 트레이드되고 만다. 이승준은 센터 마이카 브랜드를 제치고 팀내 득점-리바운드 1위(15.3점-7.1리바)를 기록하며 활약했지만, 2년연속 준우승팀 서울 삼성은 평범한 팀 수준으로 떨어져 리그 6위로 간신히 플레이오프 진출엔 성공했으나, 하승진도 없는 디펜딩 챔피언 전주 KCC에 1승 3패로 패하고 만다.
2010-11시즌엔 1라운드 외국인 선수 노엘 펠릭스가 개막 2경기만에 부상으로 교체되면서 서울 삼성은 애런 헤인즈를 선택했고, 이승준은 센터 포지션으로 뛰며 헤인즈에 이어 팀내 득점-리바운드 2위(16.3점-7.5리바운드)를 올리는 등 무난한 활약을 펼친다. 팀은 이번에도 리그 6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 2년 연속으로 전주 KCC를 상대하게 되지만, 시즌 막판 이승준이 안준호 감독에게 항명을 하며 자체 징계를 받은 탓에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졌고 기사, 1, 2차전 부진했던 이승준이 잠실에서 열린 3차전에서 33점-10리바운드를 올리며 맹활약했지만 결국 0:3으로 스윕당하며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다.
외국인 선수 보유가 1명으로 바뀐 2011-12시즌은 223cm의 피터 존 라모스와 괜찮은 호흡을 보였으나, 김상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 속에 외국인 선수가 아이라 클라크로 바뀌었고, 10개 구단 중 골밑 경쟁력이 가장 낮았던 서울 삼성은 리그 최하위로 추락했다.
2.4. 원주 동부 프로미 시절 (2012~2014)
혼혈 선수 규정에 따라 2012년에 다시 드래프트를 하게 되었고, 이승준의 영입을 두고 동부와 SK가 서로 입찰했다. 그리고 추첨 결과는 원주 동부의 승리. 동부는 이로서 노쇠 기미가 보이는 김주성[7]과 짝을 이룰 파트너 + 군에 입대한 윤호영의 공백을 메울 자원이라 표면적으로 평가받았지만 윤호영과 전혀 다른 스타일이란 우려가 현실화되었다. 12월 기준 동부는 예전에 동부산성으로 불리던 강력한 골밑수비가 급격히 약화되어 성적은 9위에 머물렀다.[8]
그러나 시즌 중반에 접어들며 대체 외국인 선수 줄리안 센슬리가 합류하고
하지만 올스타 휴식기에 김주성이 부상을 당하면서 동부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이승준은 김주성의 역할까지 맡으며 동부의 공수를 홀로 이끌다시피 했지만 동부의 추락을 막을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강동희 감독의 승부조작 파문까지 일어나 동부는 6강 플레이오프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2013-2014 시즌도 시즌 초반에는 허버트 힐과 김주성과 공존 문제로 포지션에서 혼란을 겪었고, 잦은 턴오버와 수비에서 다시 약점을 드러내는 등, 작년 초반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 아니냐 비판받았지만, 결국 김주성의 부상으로 인한 이탈과 허버트 힐이 태업 의혹 이후 부상으로 퇴출된 이후, 거의 혼자서 동부의 골밑을 책임지고 있다. 게다가 나이도 김주성보다 1살 더 많고 작년과 같이 긴 시간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승준까지도 탈이 날까 걱정 중이다. 결국 1월 17일 안양 KGC인삼공사와의 경기에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결국 시즌아웃 위기까지 처했을 뿐만 아니라, 나이를 감안했을 때 선수 생활에도 큰 타격을 받은 셈이다. 덩달아 본인이 간절히 원하던 농구 월드컵 및 아시안 게임 참가도 물거품...
부상 다음 주에 수술을 받았으며 동부 구단이 밝힌 바에 따르면 굉장히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8월쯤 되면 훈련에 합류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14년 6월 12일에 전격 웨이버 공시되었다. 김주성에 한정원까지 영입하면서 빅맨만 3명이라 포지션 문제로 트레이드 카드로 내놓으려 했지만 5억이라는 고액 연봉 탓에 수지가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웨이버 공시로 풀었다고 한다. 영입 가능 대상 구단은 울산 모비스 피버스, 서울 SK 나이츠, 부산 kt 소닉붐을 제외한 6개 구단이라고 한다.[9]
그리고 이 기사에서 나온바에 따르면 이승준은 계약한 2년 동안 동부 구단의 속을 꽤나 썩인 걸로 드러났다. 고연봉 보장임에도 불구하고 팀 훈련 참가하라는 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도미니카 리그를 뛰었던 걸로 드러났다. 이건 계약 첫해 때 네이버 라디오 바스켓카운트에서도 나온 사실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다른 리그에서 뛰는 걸 구단이 허락해서 도미니카 리그에서 뛰었는데, 도미니카 리그 도중에 갑자기 무리하게 팀 합류를 요청했다는 말도 있다. 아킬레스건 부상 이후 동부는 이승준을 트레이드 추진하다 별로 성과가 없자 김영만 감독이 구단에 직접 요청해서 조기 방출을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팀에 빅맨이 많다는 이유로 이승준을 웨이버 공시한 것. 그 이후 이승준을 영입하려는 팀이 없자 선수 등록 마감일인 30일에 웨이버 공시를 철회하고 보수총액 1억7천만원에 재계약했다. 그러나 2014-15시즌 개막 후 아킬레스건 부상 여파로 1경기도 출전하지 못하면서 전력에서 사실상 배제된 상황. 간간히 경기장에 농구를 관람하러 등장하는 게 전부이다.
2.5. 서울 SK 나이츠 시절 (2015-2016)
2015년 5월 20일 영입 의향서 접수 결과 1년 3억 6200만원을 제시한 SK로 이적이 확정되었다. 이로서 동생 이동준과 한 팀에서 뛰게 되었다. 모비스 등 여러팀이 입찰하긴 했지만 아킬레스건 부상이라는 심한 부상을 입고 1시즌 반이상 개점휴업 상태였던 이승준에게 3억 6천은 오버페이 아니냐는 소리가 이때부터 나왔다.
2015-16 미디어데이 때 문경은 감독과 참가했다.
영입 후 제대로 된 활약을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출장 시간도 굉장히 짧아 몇몇 SK 나이츠 팬들은 자전거 타러 왔냐고 깠다.
10월 10일 문경은 감독이 직접 이승준, 이동준 형제의 활용법에 대한 인터뷰를 하였는데 부상이 있는 이동준은 벤치에서 대기시키고, 이승준은 김선형이 복귀할 때까지 조커로 쓸 생각이라고 밝혔다. 기사
10월 11일 삼성전에서 김민수가 부상을 당하며 출전하였는데 역시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4쿼터 마지막에는 덩크까지 실패하면서 더 이상 예전의 폼이 아니다라는 사실만 재확인시켰다.[10] LG와의 경기에서 12득점 5리바운드, 부산 kt와의 경기에서 13득점 3리바운드를 기록하는 등 슛 감각은 꽤 올라왔으나 수비에서는 여전히 제 몫을 못하고 있다.
머리를 삭발했다. 팀의 위기에 심기일전하고 있는...것 같았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
삭발에도 불구하고 경기에도 나오지 못하면서 벤치와 자전거만 달궜다.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가는 팀마다 팀을 망쳐놓는 놈이 되어버렸다. 학생체육관 홈경기에 약혼녀가 가끔 직관하러 왔다.
에어컨 리그에서 재계약, 이적 등 협상이 이뤄졌으나 결국 은퇴를 결정지었다.
2.6. 은퇴 이후, 3X3으로의 프로농구 복귀
지도자를 희망하며 부족했던 한국어를 공부함과 동시에 3x3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소속팀인 WILL을 우승시키며 2017 FIBA 3x3 월드컵에 출전 자격을 얻어 다시 한 번 국가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역시 한국과 세계와의 격차는 상당했고 1승 4패로 부진했지만, 이승준은 어느 정도 자신의 역할을 해내며 죽지 않은 클래스를 보여줬다. 이후 팀 서울 소속으로 2017 FIBA 월드투어에 참가하며 농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는 중이다.
KOREA 3X3 프리미어리그 2라운드부터 CLA 챔피언스 소속으로 뛰었으며, 비록 부상으로 빠진 라운드가 많기는 했지만 나온 경기에서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모습으로 게임을 지배했다.
3. KBL 기록
항목참조[11]항목참조
4. 플레이 스타일
한국 국적 선수 중 역대 최고의 하이라이트 필름. 수 차례 슬램덩크 챔피언에 올랐고, 윈드밀 등 퍼포먼스 덩크뿐만 아니라 인게임에서도 인유어페이스를 수차례 꽂는 등 명실상부한 최고의 덩커라 할 수 있다.
장점이라면 공격력. 205cm의 장신에 한국이 아니라 NBA를 기준으로 잡아도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을 엄청난 운동능력을 지니고 있었다.[12] 파워도 제법 준수하고 슛 거리까지 길다. 때문에 간간이 쏘는 3점슛의 성공률도 비교적 좋았던 편. 포스트 무브가 약간 단조로운 감은 있지만 빅맨으로서 기본기도 좋다. 리바운드에서도 수차례 상위권을 기록.[13]
단점이라면 역시 BQ. 수비에서 헬프 타이밍을 잘 잡지 못한다거나, 블락을 의식하는 탓에 펌프 페이크에 자주 속아 쉬운 득점이나 파울을 내주고 만다. 꽤 턴오버도 잦은 편이고 슛 셀렉션 또한 좋지 못했다. 덕분에 농구 선수에게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부상 이후[14]에는 운동 능력을 잃어 경쟁력이 급속도로 떨어진 부분이 있다.
5. 국가대표
귀화 이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있던 시절에는 장신 스몰포워드를 꿈꾸는 팬들이 많았으나 귀화 이후에는 빅맨으로 여러차례 대표팀에 승선했다. 국가대표가 되면 눈빛부터 달라지며 경기력이 많이 향상됐으며 좋은 활약을 했다.
높이+웨이트+운동능력의 삼박자를 갖춘 유일한 빅맨으로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은메달, 2013년 FIBA 아시아 선수권 대회 3위에 공헌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농구 최종예선 C조 도미니카공화국과 2차전에서 NBA서 뛰던 알 호포드(애틀랜타 호크스)와의 매치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21점 6리바운드하며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KBL에서 은퇴하여 팬들을 많이 아쉽게 했는데 2017년에는 3x3 농구 국가대표로 다시 돌아왔다. 농구와 한국에 대한 애정을 보여줬고 호쾌한 덩크도 선보이며 몸상태도 어느 정도 호전되었음을 보여주었다.
6. 지도자
2023년 3월 6일 강양현 조선대 감독의 추천으로 조선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2024년 3x3 Asia Cup 대회에서 한국보다 랭킹이 한참 낮은 약체 인도네시아,스리랑카도 이기지 못하고 탈락 했다.
특히 3x3 농구 랭킹 1위 김정년을 뽑지 않고 본인이 속한 스킬 트레이닝 아카데미 코치로 활동하는 임원준을 뽑아서 특혜 논란이 있었다. 기사 결국 2024년 5월 9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글을 남기고 3x3 남자대표팀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7. 여담
-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팬으로 추정된다. 빅맨을 수행하게 되면서 팀 던컨의 영상을 많이 봤다든가, 2012-13시즌 마이애미 히트와 샌안토니오 스퍼스와의 경기에서 마이애미가 이기자 마누 지노빌리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 농구를 소재로 한 곡인 Dawgs - Ballin'에 피처링으로 참여하여 MV도 찍었다. 유투브
- 왼쪽 팔뚝에 새긴 문신은 산을 오르는 호랑이 2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자신의 동생인 이동준과 같이 농구계 정상에 오르겠다는 뜻이다. 호랑이 꼬리 옆에는 勝자와 東자가 있으며 본인과 동생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 2012 미스코리아 서북미 미 출신 최지윤과 2016년에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이후 비디오 스타에 출연해 여자 농구 선수 김소니아와 교제 중임을 밝혔다. 2020년 1월 기준으로 사귄지 1년 정도라고 하며 친구 소개로 만났다고 한다. 2020년 10월 법적 부부가 되었음을 밝혔다.
- 삼성 시절 당시 삼성화재 블루팡스 간판스타였던 가빈 슈미트와 절친이었다. 같은 숙소를 쓰는데다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고, 문화적으로 잘 통했던 모양. 하지만 데뷔초엔 이승준보다 가빈의 유명세가 압도적이었던 탓에, 가빈의 유니폼을 입고 마트에 갔더니 가빈인줄 알고 사인을 요청하더란 굴욕담이 있다 기사
- 2023년 1월 8일 WKBL 올스타 페스티벌 2쿼터 중에 블루스타팀 배혜윤의 유니폼을 입고 1분여간 출전했다. 상대팀인 핑크스타 아내 김소니아를 1:1 마크하다가 포스트업 상황에서 밀려 넘어지기도 했다. 이후 김한별의 어시스트를 받아 2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원핸덩크를 시도하려다가 점프가 짧아 마치 레이업이(...) 된 건 덤. 공식기록에는 배혜윤의 득점으로 기록되었다. #
- 현역시절부터 주말 밤 이태원에 자주 출몰했었다. 농구팬들 사이에서도 이태원에서 이승준-이동준 형제를 봤다는 목격담은 커뮤 내에서 자주 나오며, 실제로도 이태원 내에서 쇼핑을 자주 한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을 향해 사진을 같이 찍는 등의 팬서비스가 좋은 편이다.
[1] 이 당시에는 국내 선수가 아닌 외국인 선수 신분(귀화 전)이었기 때문에 등록명도 에릭 산드린이었다.[2] 단 두 경기(러시아, 도미니카)만 치르고 조별예선 탈락.[3] 이동준의 별명인 노머시에서 유래.[4] 이 바람에 이승준은 NCAA내 트랜스퍼 규정에 걸려 1년 유급해야만 했다.[5] 이때쯤부터 국내에는 "운동 능력이 엄청난 206cm짜리 하프코리안 스몰포워드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6] 이름 그대로 싱가포르에 있는 팀인데,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호주 프로리그에 참가했다. 현재는 동남아시아(ASEAN) 농구 리그 소속.[7] 김주성이 1979년생으로 이승준보다 1살 어리다.![8] 동부의 부진이 모두 이승준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 선수의 기량이 전 시즌에 뛰었던 로드 벤슨에 비해 크게 못 미치고 주전 가드진도 부상으로 제대로 가동하지 못한 탓도 있다.[9] 동생 이동준은 일반 대학 이후 드래프트로 입단한 선수로 일반 선수 취급이라 이승준이 속해 있는 서울 삼성 썬더스 역시 영입 가능 대상이다. 다만 전주 KCC 이지스는 트레이드로 귀화 혼혈 선수 및 비주류 대학 출신 선수를 비하한 인간이 넘어와서 힘들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10] 석주일은 아프리카TV의 방송에서 이승준이 슛을 쏠 때에 손목의 모양이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며 슛폼이 무너졌다고 지적했다.[11] 용병 에릭 산드린으로 왔던 시절 기록이다.[12] 절대 과장이 아니다. 하부리그 대학 출신으로 서커스농구단에서 뛰던 선수가 서머리그에서 NBA 정규리그 최종 로스터 문턱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NBA 레벨에서도 긁어볼 가치가 있는 수준의 운동능력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특히 새크라멘토 시절 페트로비치가 보는 앞에서 속공 중 윈드밀을 시원하게 꽂는 장면은 잘생긴 얼굴과 더불어 그시절 많은 팬들을 설레게 했다. 심지어 아킬레스 수술하고 은퇴 후 3x3에서도 공중에서 하이라이트 필름을 펑펑 찍어댈 정도. 그가 국제무대에서 곧잘 시원시원하게 잘할 수 있었던 이유도 어느 팀을 만나든 꿇릴 게 없는 이 신체능력 덕분이었다.[13] 29개로 국내 선수 리바운드 최다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14] 엘튼 브랜드, 천시 빌럽스, 코비 브라이언트 등 기라성 같은 NBA 선수들도 이쪽 부상을 입은 후에는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거나 스타일의 변화를 주는 식으로 활로를 모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