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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13:11:56

콘수엘로 밴더빌트

<colbgcolor=#DEDEEE><colcolor=#000000> 말버러 공작부인
콘수엘로 밴더빌트
Consuelo Spencer-Churchill, Duchess of Marlbo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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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nsuelo_Vanderbilt.jpg}}}
이름 콘수엘로 밴더빌트 발상
(Consuelo Vanderbilt Balsan)
출생 1877년 3월 2일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맨해튼
사망 1964년 12월 6일 (87세)
미국 뉴욕 주 사우샘프턴
배우자 제9대 말버러 공작 찰스 스펜서처칠
(1895년 결혼 / 1921년 이혼)
자크 발상 (1921년 결혼 / 1956년 사망)
자녀 존, 이보르
아버지 윌리엄 키삼 밴더빌트
어머니 알바 얼스킨 스미스
형제 윌리엄, 해롤드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첫번째 결혼2.3. 두번째 결혼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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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9대 말버러 공작 찰스 스펜서처칠의 아내이자 사교계 명사. 미국 도금 시대의 대표적인 대부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의 증손녀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Consuelo_Balsan_LCCN2002711745.jpg
어린 시절의 콘수엘로

1877년 3월 2일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이름인 콘수엘로는 어머니 알바의 친구이자 대모 맨체스터 공작부인 콘수엘로 몬터규(Consuelo Montagu)로부터 따온 것이다. 맨체스터 공작부인은 쿠바계 미국인 출신으로 영국의 귀족과 결혼한 것으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알바는 자신의 딸이 그러한 운명을 맞이하길 바라며 콘수엘로라는 이름을 지었다.

콘수엘로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알바는 딸이 유럽의 귀족 부인이 되기에 한치의 모자람도 없는 참한 아가씨가 되도록 신부수업을 받게 했다. 콘수엘로는 학교에 가지 않고 가정교사를 통해 공부를 했으며, 사회 전반의 문제와 정치를 공부했다. 그리고 아주 어릴 때부터 여러 외국어를 공부해야 했다. 알바는 딸의 자세를 교정하기 위해 철 막대로 어깨와 허리를 교정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말 채찍으로 때리는 등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딸을 엄하게 키웠다. 딸을 유럽 귀족에게 시집보내려는 알바의 집착은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을 하게 되면서 더욱 거세어졌다.

헛된 허세라고 할 수 없는 게,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가난한 영국 귀족들이 재정적인 이유로 미국의 상속녀와 결혼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게다가 밴더빌트 가문의 부는 어지간한 유럽 귀족들도 부러워할 정도였다. 맨해튼에 위치한 밴더빌트 가의 저택은 도시의 한 구획만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무엇보다도 외동딸 콘수엘로가 상속받기로 되어있는 재산은 2천만 달러를 웃돌았는데, 이는 오늘날 기준으로 약 40억 달러에 달하는 액수였다. 덤으로 콘수엘로는 당시 영국 귀족들이 선호하는 이상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다. 콘수엘로는 우아한 긴 목과 검은 눈을 가진 날씬한 미인으로 성장했다.

2.2. 첫번째 결혼

파일:Consuelo_Vanderbilt1.jpg
파일:Consuelo_Vanderbilt2.jpg
말버러 공작부인 콘수엘로

이렇듯 인기있는 신붓감인 콘수엘로는 수차례 구혼을 받았으나 전부 거절했다. 알바는 중매쟁이를 통해 딸과 혼담이 오갈 수 있는 제일 높은 수준의 귀족 청년을 찾았다. 콘수엘로는 중매를 통해 윈스턴 처칠의 사촌 제9대 말버러 공작 찰스 스펜서처칠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유서깊은 가문 출신에 영지가 있는 공작이었지만 동시에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알바는 이상적인 사윗감을 찾았다며 기뻐했지만 그때 콘수엘로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상대는 미국 사교계 명사인 윈스롭 러더퍼드(Winthrop Rutherfurd)였다. 그는 매우 부유했지만 알바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콘수엘로와 그를 못 만나게 하며 딸을 회유하러 했다. 콘수엘로는 집에서 도망치려다가 붙잡혀서 방에 감금되었다. 알바는 딸에게 애원도 해보고 사실 러더퍼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고 되도 않는 거짓말도 해보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결국 알바는 중병으로 앓아누웠다. 알바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고, 마지막 소원으로 딸이 말버러 공작과 결혼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콘수엘로는 마지못해 말버러 공작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결혼식 날이 다 될 무렵에 알바는 씻은 듯이 나았다(...). 말버러 공작의 결혼 소식은 사교계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밴더빌트 가문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결혼식에 초대받고 싶어했다. 식은 1895년 11월 6일 세인트 토마스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예상대로 식은 굉장히 호화로웠고, 모든 신문에서 식의 웅장함과 신부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가터벨트, 막대한 양의 혼수[1]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실상은 대단히 불행한 결혼이었는데, 신랑은 최대한 많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협상하다가 식에 늦었고 신부는 제단 앞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파일:Consuelo_Vanderbilt_and_Two_Sons.jpg
콘수엘로와 두 아들, 1899년
파일:Duke_Marlborough_Singer_Sargent.jpg
말버러 공작 일가, 1905년

결혼 후 콘수엘로는 말버러 공작저 블레넘 궁전에서 살게 되었다. 성공적인 영국 사교계 데뷔를 한 콘수엘로는 저명한 인사가 되었다. 자주 파티와 무도회에 참석했으며, 왕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도 했다. 1902년에는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서 알렉산드라 왕비의 양산을 들어주는 4명의 공작부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말버러 공작 가문에서는 찰스의 사촌동생이자 당시 작위 계승 순위 1위였던 윈스턴 처칠의 성품이 너무 막돼먹었다며 그런 윈스턴에게 작위가 이어지는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콘수엘로에게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을 주었다. 결혼한 지 2년 뒤인 1897년에 훗날 제10대 말버러 공작이 되는 존이 태어났다. 그 다음해에는 차남 이보르가 태어났는데, 이보르는 사실 찰스가 아니라 러더퍼드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한 게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찰스와 콘수엘로는 각자 애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찰스는 아내와 있기보다는 사냥을 하거나 자택을 증축하는 데에 더 관심이 있었다. 콘수엘로는 옛 애인 러더퍼드와 다시 만났고, 혼자 파리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서 또다른 염문설이 돌기도 했다. 부부는 1906년에 별거에 들어갔고, 1921년에 정식으로 이혼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같은 해인 1921년에 각자 재혼했다.

2.3. 두번째 결혼

파일:Jacques_&_Consuelo-St_Georges_Motel.jpg
자크와 콘수엘로, 세인트 조지 모텔에서

콘수엘로의 두번째 남편은 직물 제조업 가문 출신의 자산가이자 비행기 조종사인 프랑스인 자크 발상(Jacques Balsan)[2]이었다. 10대 때 잠깐 만난 적이 있는 두 사람은 유럽 사교계에서 재회한 뒤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결혼 생활은 매우 행복했다. 후에 콘수엘로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귀족 가문과의 결혼 생활은 '반짝이(Glitter)'였지만 자크 발상과 함께 한 시간은 '금'이었다고 말했다.

처음에 부부는 프랑스에서 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으로 갔다. 1956년에 자크가 사망한 뒤 콘수엘로는 뉴욕과 사우샘프턴을 오가며 살았다. 콘수엘로는 1964년에 8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3. 여담

파일:Consuelo_Vanderbilt_and_Winston_Churchill.jpg
콘수엘로와 윈스턴 처칠, 1902년

[1] 콘수엘로의 아버지가 서명한 결혼 합의서에는 말버러 공작에게 밴더빌트 철도회사의 주식 250만 달러를, 부부에게는 각자 연간 10만 달러를 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2] 그의 남동생이 코코 샤넬의 전 연인이자 첫 후원자였던 에티엔 발상(Étienne Balsan)이다.[3] 친사촌 레지날드 클레이풀 밴더빌트(Reginald Claypoole Vanderbilt)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