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 4일 예비역으로 편입이 된 이후에 치치지마 식인 사건으로 종신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중에 있었는데, 이 때 다치바나 요시오 등 사형을 선고받은 자들이 두들겨 맞는 동안 모리 구니조는 두들겨 맞기는 커녕[1] 그곳에서 미군의 요청으로 미군과 미군 군의관 그리고 감방 동료들에게 사람의 간에 대한 의학적 가치에 대해서 강의를 진행을 했는데, 이는 모리 쿠니조가 중국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보인다.
종신형 복역 중 조금 뒤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 동인도 제도에서 남방전선 당시에 자신의 학살죄를 부하 호리우치 도모야키 해군 대좌에게 뒤집어 씌웠던 일이 발각[2]되어 네덜란드 측에 의해 다시 기소가 되었고, 결국 민간인 신분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술라웨시섬마카사르에서 교수형으로 집행했으며, 호리우치 대좌의 유가족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내고 배상금도 지불했다.
[1] 당시 두들겨 맞은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만 두들겨 맞아서 종신형을 받은 구니조는 두들겨 맞는 대상에 해당되지가 않았다.[2] 호리우치 도모야키 대좌는 이로 인해 의례 소총 5발로 총살형 사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