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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해군 제1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南雲忠一 | Nagumo Chūichi | |||
출생 | 1887년 3월 25일 | ||
일본 제국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 |||
사망 | 1944년 7월 8일 (항년 57세) | ||
일본 제국 남양군도 사이판 섬 | |||
복무 | 일본제국 해군 | ||
복무 기간 | 1908년 11월 21일 ~ 1944년 7월 6일 | ||
최종 계급 | 중장→대장[1] | ||
복무 | 제1항공함대사령관 사세보진수부사령장관 중부태평양방면함대사령관 제14항공함대사령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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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내역 | 금치훈장 ([ruby(金鵄勲章, ruby=きんしくんしょう)])[공1급][3] 욱일장 ([ruby(旭日章, ruby=きょくじつしょう)])[훈1등][5] 서보장 ([ruby(瑞宝章, ruby=ずいほうしょう)])[훈1등][7] | ||
묘소 | 엔가쿠지[ruby(円覚寺, ruby=えんがくじ)][가마쿠라시] 나가노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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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일본 해군의 제독. 항공모함을 지휘하며 진주만 공습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경직된 판단으로 대패하였고 사이판 전투의 패배 후 자살하였다.2. 생애
2.1. 탄탄대로를 달리다
일본해군병학교 36기 출신으로 1908년에 졸업했다. 졸업성적은 총원 191명 중 8등. 최상위권이었기 때문에 해군병학교 성적으로 이후 승진이 결정되는 일본해군의 전통상 탄탄대로를 달린다.이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성적으로 승진이 결정되는 육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육·해군이 극한 대립을 벌인 이외에 육군 내부, 해군 내부에서 또한 파벌 싸움이 극심해서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될 수 있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진급을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육군은 황도파와 통제파로 나뉘어 극한 대립을 했고, 해군은 함대파와 조약파로 나뉘어 극한 대립을 했다. 이는 일본군의 근본적인 모순이자 문제가 된다. 사관학교(병학교) 성적이 좋으면 실전에서 아무리 무능한 인물이라도 무조건 승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즉 실무에 적응을 못하더라도 이론적으로 완벽하면 실력과는 상관없이 승진할 수 있다는 말과 똑같다.
나구모는 이후 여러 함상근무를 거쳐 일본해군 최초의 항모기동부대인 제1항공함대 사령관까지 오른다.
신중한 성격을 지닌 군인으로, 용의주도한 계획을 바탕으로 치밀한 작전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진주만 공습을 실행해 미 해군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처음에는 항모를 사용하는 것이 불확실하다고 반대했다가 야마모토 제독에게 "그렇다면 그만두시오!"라는 말을 듣고 마지못해서 작전을 실행했다는 일화가 있다.
진주만 공습 이후 6개월 간이 그의 전성기였다. 동쪽으로는 하와이, 서쪽으로는 이듬해 인도양까지 진출하여 실론 섬의 영국군 기지를 폭격하고 영국 동양함대를 박살냈다. 나구모가 지휘하는 항공함대의 진주만-인도양 전과는 항공모함 1척 (영국), 전함 5척, 구축함 7척을 격침하는 대단한 성과였다.
2.2. 허울뿐인 영광
하지만 큰 전공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 내에서 영향력은 제자리였다. 일본 군부를 장악한 가고시마 현, 야마구치 현, 즉 번벌 출신이 아니라 야마가타 출신인 그로서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게다가 이면에는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와의 불편한 관계가 있었다. 나구모는 전함을 중시하는 함대파의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조약파의 핵심 야마모토와 대립했다. 항모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연공 서열 때문에 앉게 된 것이어서 나구모 스스로도 이 자리를 불편하게 여겼고, 그를 그 자리에 임명한 야마모토 역시 이런 상황을 그리 내켜하지 않았지만 연공 서열이 지배하는 당시 일본 해군 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9]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진주만 공습을 전후로 더욱 심해졌다. 진주만 공습을 강하게 반대했던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나구모였으며, 따라서 진주만 공습의 성공이 그 지휘관인 나구모의 발언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게다가 진주만에서 선박수리 및 연료탱크 등을 공격을 맡는 가장 중요한 3차 공격을 이미 큰 피해를 줬고 미군이 인지해 피해가 클 것이라며 판단해 포기하고 돌아온 나구모에 대한 야마모토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져 버렸다. 야마모토는 나구모를 바로 해임해버리고 싶었지만 어쨌든 진주만 기습에서 승리한 장수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가는 커다란 후폭풍이 닥칠 게 뻔했고, 이후 남방작전의 공이 더해지자 나구모를 끌어내릴 명분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속사정 때문에 연합함대 내에서 나구모의 발언권은 사실상 없는 셈이었으며, 남방작전 이후의 전략적 행보에 대해 육군에서 주장하는 수세적인 전략을 지지했다가 연합함대 내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나구모가 항공전 분야에 무지했던 게 역으로 야마모토의 명령에 달리 반박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으로 이어지자 야마모토도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판단을 하였고, 덕분에 나구모는 항모기동부대의 지휘관 자리에 계속 있을 수 있었다.
2.3. 사망
나구모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우유부단한 결정 끝에 제1항공함대를 태평양의 고깃밥으로 만들어버렸다. 미드웨이 섬 공략과 미 함대 격멸 사이에서 명확한 목표를 갖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미군의 역습에 당해버린 것이다. 미군 폭격기의 공격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교범대로 전 항공기의 무장을 다 바꾼 후 출격하라는 경직된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한 공격 지연과 너저분하게 널린 폭탄이 일본 항공모함의 피해를 키웠다. 이로 인해 4척의 항공모함을 손실하고 나구모는 제1항공함대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수세에 몰렸던 미 해군은 이 승리로 한숨 돌리게 되었다.이후 새로 편성된 항모 기동부대인 제3항공함대 사령관으로 복귀하여 과달카날 전역에 참가했지만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미 함대의 피해 규모를 착각하여 섣불리 함대를 물리는 바람에 수송 함대가 미군 항공기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는 전술적으로는 이겼으나 일본 항모부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서 결국 함대를 물려야 했고, 이로 인해 과달카날 일대의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의 패배에 일조하게 된다.
결국 나구모는 또다시 항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본토 방위 임무로 돌려졌다가 제1함대 사령관이 된다.
1944년에 일본 해군이 제1항공함대를 재건하면서 기존의 전함 중심이었던 제1함대는 해대되었고 나구모 본인은 중부태평양방면 함대사령관이 되어 사이판에서 마리아나 제도의 방어에 전념했다. 그러나 6월에 사이판 전투가 개시되자마자 일본 연합함대의 핵심 전력인 제1항공함대가 필리핀 해 해전에서 박살나버렸고, 나구모는 사이판에 고립된 채 섬에 상륙한 미군에 쫓겨 도망다니던 중, 은신처인 동굴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평가
3.1. 본인의 취약점
수뢰전 전공이었던지라 어뢰를 이용한 전술에는 빠삭했으나 포격전이나 항공전에 관한 지식은 빈약했다. 수뢰전 전문가가 항공모함이 주력인 진주만 공습의 사령관을 맡게 된 게 이상해 보이겠지만, 나구모는 수뢰전의 전문가이면서도 동시에 해군에서 손꼽히는 조함 전문가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요는 작전은 실패하더라도 배는 어떻게든 살려 오라고 임명했기 때문이다.또한 신중한 면이 지나쳐서 과감한 모험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고, 융통성이 부족한 데다 상황이 작전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페이스를 잃어버려서 스스로 무너지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나구모뿐만이 아니라 대다수 일본군 장군, 제독들이 보여주던 태도다. 당시 일본군은 사관학교에서부터 파벌 싸움이 있었고 상관의 명령이 아무리 막장이더라도 하급자는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분위기였으며, 뒷배경이 빵빵하지 않으면 아무리 실력이 좋더라도 사소한 실수나 말실수 하나에 경질당하거나 옷을 벗게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런 분위기와 경직성 때문에 일본군 고위 장교 대다수는 상당히 보신주의적인 성향이 짙었으며, 누가 봐도 아군을 돕기 위해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도 상부의 명령이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고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작전이 실패하게 되면 우왕좌왕하다가 그대로 대패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런 면을 볼 때, 참모로서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일선 지휘관으로서는 다소 걸맞지 않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항공작전에 문외한인 수뢰전 전문가를 연공 서열 때문에 앉혀 놓았으니 별 수 없는 일이라 할 수도 있지만, 미 해군의 윌리엄 홀시 제독은 항모 지휘를 맡게 되자 중년에 비행사 자격을 딸 정도로 노력했으니 변명이 힘들다.
3.2. 일본에서의 평가
일반적으로 배우는 지식이 '미드웨이에서 나구모 함대가 대패했고 그 이후로 전세가 역전되어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했다'정도까지인지라 일반에서는 일본 패배의 원흉으로 취급받는다. 그래도 밀덕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의 평가를 받는 편.3.3. 그를 위한 변명
이 사람 혼자서 일본 해군을 말아먹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다. 일본 측에서 던진 핑곗거리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역설적으로 한 사람이 완전히 말아먹을 정도로 허술하다면 그건 원래부터 문제가 있는 조직이다. 서양의 전쟁사가 중에서도 나구모는 그저 패배의 원인을 뒤집어쓴 속죄양 정도로 보는 사람이 많다.나구모의 소극성과 보신주의는, 다른 지휘관이 맡은 일본 해군 작전에서도 매번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미카와 군이치는 과달카날 전투를 둘러싼 사보섬 해전에서 적의 순양함[10] 4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고도 적 항공모함의 반격으로 함정을 잃을까 봐 과달카날로 가는 수송선단은 그대로 둔 채 돌아왔다. 그러나 이는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미카와가 해전에서 얻은 승리로 그나마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이득은 과달카날 비행장을 영원히 못 쓰게 만드는 것인데[11] 중순양함으론 당연히 비행장을 결정적으로 망가트릴 수 없다. 미카와가 정말 보신을 위해 철수했는지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일본 해군 내에서도 미카와는 무능과 보신주의가 판을 치는 제독들 중에서도 전술에 해박하고 전투에서 용맹한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지휘관이었다.
나구모의 실책은 사실 일본 해군의 교범에 따른 것이 많았다. 나구모는 그저 결정적인 순간에 지휘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실수를 한 다른 지휘관들에 비해 더 두드러질 뿐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나구모의 패배가 하나같이 굉장히 뼈아픈 패배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나구모는 미드웨이에서 항모 네 척을 말아먹긴 했지만 나구모의 부대들과 맞붙었던 요크타운급 세 척은 과달카날에서 죄다 죽거나 저승 문턱까지 다녀왔고 인도양에서는 영국의 동양함대를 전멸시켜 태평양 전쟁에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진주만에서의 철수도 나구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납득 가는 판단들이었다. 나구모가 뱃머리를 돌렸을 때 이미 항공대는 두 차례에 걸쳐 진주만을 폭격한 뒤라서 기습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많이 깎인 데다 진주만으로 귀환 중이던 미국 항모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미군의 반격도 염두에 둬야 했다. 여기서 일본 장성 특유의 보신주의가 작용하여 괜히 전과 확대를 노리다가 적은 신나게 두들겨놓고 아군은 피해가 거의 없는 표면상 완전한 승리를 놓치는 것이 두려웠을 수 있다. 애초에 진주만 철수 건의 경우 이미 도상연습에서 해당 상황[12]이 발생할 경우 재출격 없이 철수하기로 참모 회의에서 결정된 상황이었다. 이소로쿠와 다몬이 '나구모는 출격하지 않을거다'라고 단정 짓는 발언을 한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는 것.[13]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는 나구모가 라인이 다른 자기 직속 상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보다 같은 라인인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의 말을 듣고서 진주만 기습 시에는 함대 보존 우선, 미드웨이 해전 시에는 미드웨이 점령 우선 명령을 따른 것으로 그리고 있다.
게다가 그의 삽질을 보면 굉장히 의외일지도 모르겠지만, 미드웨이에서 항모 세 척을 말아먹은 후 그는 야마구치에게 "히류는 살려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미 항모 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야마구치는 자신이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해 공격을 했고 그 결과는 잘 알다시피 마지막 항모 히류마저 가라앉게 된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 만일 일본이 당시 잃어버린 항모 중 단 한 척만 더 살아있었어도 미드웨이 수준의 대규모 공세를 다시 한번 벌일 수 있었을 거라는 계산도 있다. 우습지만 나구모의 판단이 맞았던 사례인 셈.[14]
엔터프라이즈가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엔터프라이즈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미 이때는 미국의 생산 체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시점으로서 에식스급 항공모함 1번함 에식스가 바로 진수를 앞두고 있었고, 요크타운이 격침된 것은 전체적인 국면에 있어서 미국에게 큰 타격은 아니었다. 새로운 요크타운이 불과 6개월 반 정도 뒤인 1943년 1월 21일에 진수했으니 사정은 알 수 있다. 그 사이에 진수된 에식스급 항공모함의 숫자도 꽤 된다. 새로운 요크타운에 앞서 진수된 에식스급 항모의 숫자만 3척이고 그 중 1척(네임쉽 에식스)은 취역했다.
결국 히류를 살려야 한다는 나구모의 판단이 확실히 옳았던 셈이다. 요크타운을 격침시키지 못하더라도 어차피 요크타운은 수개월간 도크 신세는 면할 수 없었으니 굳이 격침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장기간 전열 이탈은 불가피했다. 그에 비해 멀쩡한 상태로 언제든지 다른 작전에 투입 가능했던 히류를 반파된 요크타운과 바꾼 야마구치의 판단은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물론 야마구치가 요크타운이 반파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는 변명은 가능하지만, 그는 직속상관인 나구모의 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 공격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15]
사실 미드웨이에서의 대패는 나구모보다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더욱 큰 책임이 있다. 처음부터 압도적인 수상 전력을 이용해 미드웨이로 미 해군을 끌어내어 격멸한다는 작전으로 무려 4개로 분리시켰으며, 각각 200km나 되는 거리를 벌리게 만듦으로서 제1기동부대를 위험에 빠뜨리게 만든 장본인이다. 야마모토의 가장 큰 실수은 미드웨이의 방어력을 얕본 것도 얕본 거지만, 진주만 때처럼 상대가 무방비 상태로 맞아줄 거란 착각이 원인이었다. 니미츠가 쳐놓은 덫에 걸린 건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잘못이 더욱 컸다. 애초에 미드웨이 침공에 회의적이고 호주와 미국 사이의 연락선을 차단하는 FS작전에 더 관심을 보이던 대본영과 해군 군령부에게 사임 의사를 내비치면서까지 MI작전을 밀어붙인 장본인이 야마모토다. 미드웨이를 점령하는 작전을 꼭 하고 싶었던 나머지 협상한 결과 육군과 군령부가 원하는 작전에 함대를 떼어주었고, 앞선 작전에서 항모전력의 일부를 손실해 미드웨이를 공략할 전력이 부족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오판했다.
나구모에게는 정찰 능력도 부족했는데, 결국 그 부족한 정찰 능력이 기습을 당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정찰 능력이 부족했던 근본 원인이, 북방 함대와 미드웨이 상륙 함대, 그리고 주력 본대 등으로 토막을 내놓은 야마모토 제독의 함대 편성때문이었다. 그리고 항공작전에 있어서 참모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밑에 있었던 인간이, 그 겐다 미노루였던 것도 불행이었다. 겐다는 미드웨이작전을 앞둔 워게임에서 미함대의 매복에 관해서는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고 "어떤 상황도 우린 물리칠 것"이라며 우기기만 한 전력이 있었고, 전투 당일의 정찰계획을 부실하게 짠 책임자기도 했다.
게다가 미드웨이에서 나구모 부대를 앞세운 것도 결과적으로는 야마모토의 악수였다. 포격이 되고 방어력이 우세한 전함으로 구성된 주력 본대를 앞세워 미 항모의 공격력을 흡수해야 했을 판국에 포격도 안 되며 방어력이 부족한데다 함재기 말고는 딱히 무장이랄 것이 없는 항공모함을 앞세운 건 방어 무장을 의도해서 넣지 않고는 자체 방어력이 없다시피 하게 되는 항공모함 입장에서는 그냥 내다버렸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후 신형 고속전함을 항모의 호위함으로 쓰는 체제를 확립했고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는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혼자 26기를 대공포로 격추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나구모의 항공모함에도 그나마 속도가 빠른 공고급 순양전함 2척이 호위로 붙어있기는 했지만 이들의 부실한 방어력과 방공능력으로는 미국처럼 항모 직위 방공함으로 운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후일 전세가 이미 기운 후에야 오자와 지사부로는 야마토급 전함까지 항모의 호위함으로 돌렸지만 역시 일본 함선의 방공 능력은 부실했다.
덤으로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나구모 함대가 일선에서 계속 뛰었으므로 적절한 휴식과 전력 보충이 절실했지만, 일본군 수뇌부가 그런 요구를 들어줄 턱이 없었다. 아카기가 낡아빠진 키를 교체하지도 못하고, 함재기가 부족한 상태로 출전한 게 그 때문이다.
미드웨이에서 기습을 당하는 시점에선, 나구모가 무당이 아닌 이상에야 그걸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데, 애당초 일본 해군 제1기동함대 항공모함 아카기와 카가의 틈새에 끼어든 미 해군의 잠수함 한 척이 문제여서, 그걸 본 구축함이 잠수함을 잡겠다고 쫓아가다가 본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버린 게 치명적인 악수가 된 것이다. 정찰 능력은 부족하지, 좁은 아일랜드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분야로 참모들이 목소리만 높이지, 미국 항공기들이 축차 공격을 감행해서 기함을 조타하느라 정신 없지... 엔터프라이즈에서 공격대가 출발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 시점에서, 그 자리에는 나구모가 아니라 그 누가 와도 일본군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도 그랬는데 나구모의 항공전대가 격퇴시킨 그 항공모함은 당시 문제가 생겨 말 그대로 떠내려가고 있어서 일본군의 예상 위치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정규항모 한 척이 다른 항공모함에게 격침당한 상황이었다. 섣불리 공격을 나갔다가 또 미드웨이 2편을 찍으면 연공이고 줄이고 상관없이 목이 달아날지 모를 상황이였다.
물론 나구모의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다. 크기로는 경항모였지만 일본에서는 정규 항모로 취급되던 류조를 미끼로 내던지는 작전을 세운 것부터가 문제다. 수송 선단만 놔두고 도망간 것도 문제인 게, 류조는 원래 수송 선단 호위를 맡아야 할 입장이었다. 핸더슨 비행장이 쌩쌩하게 살아있는데, 항모도 없는 수송 선단을 내버려두고 나구모 함대가 도망갈 수는 없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결국 쇼카쿠가 죽어나가고 즈이호가 불타오름에도 끝끝내 한 척의 항공모함도 잃지 않고 돌아왔다. 물론 운과 설계가 작용하긴 했겠지만 당시 쇼카쿠는 전치 9개월이라는 말이 안되는 상태였다. 일반적으로 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항모라도 보통 3개월 정도면 도로 작전 가능한 수준까지 회복이 가능했다. 이를 감안하면 전치 9개월은 침몰 안 한 게 기적인 수준이다. 그럼에도 살려온 걸 보면 어쨌든 8등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는 그의 선택에 대해 당시 일본군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 정도로도 할 만큼 했다며 무능한 제독까지는 아니고 평범한 제독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미드웨이에서의 실패가 워낙 커서 문제지 사실 나구모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육·해군 지휘관을 통틀어 가장 많은 공적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며 다른 수많은 졸장들과 달리 그는 자기가 능력이 부족하단 걸 자기 자신도 잘 알고 있었고[16] 이걸 숨기지도 않아서 작전에서 항상 참모들과 파일럿들의 의견을 중요시했다.
3.4. 단평들
나구모 중장은 용맹하고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또한 그야말로 오랜 세월에 걸친 바닷바람에 단련된 제독이라는 느낌이었다. 반면 더없이 애정이 세심해서 부하에 대한 배려가 깊었다.
南雲中将は精悍で激しい性格の持主であり、またいかにも長年月にわたる潮風に鍛え上げられた提督という感じであった。反面極めて情愛がこまかく部下に対する思いやりが深かった。
겐다 미노루 대좌
南雲中将は精悍で激しい性格の持主であり、またいかにも長年月にわたる潮風に鍛え上げられた提督という感じであった。反面極めて情愛がこまかく部下に対する思いやりが深かった。
겐다 미노루 대좌
진주만 공격 성공의 공적을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돌리고, 미드웨이 해전의 책임을 나구모에게 돌리는 것은 모순이다.
真珠湾攻撃成功の功績を山本五十六等に帰し、ミッドウェー海戦敗戦の責任を南雲に帰すのは矛盾である。
오쿠미야 마사타케 중좌
真珠湾攻撃成功の功績を山本五十六等に帰し、ミッドウェー海戦敗戦の責任を南雲に帰すのは矛盾である。
오쿠미야 마사타케 중좌
대좌 시절부터 제1수뢰전대사령관 시절까지는, 말하자면 만점을 줄 만한 인물이었지만, 개전 후는 발랄한 모습 등 옛날의 투지를 잃어, 뭐라 해도 시원찮은 장관이었다. 이미 노쇠한 게 아닌가 느낄 정도였다. 작전을 지휘하는 태도도 퇴영적[17]이었다.
大佐時代から第1水雷戦隊司令官時代までは、いわば満点を与えられるほどの人物であったが、開戦後は溌剌颯爽たりし昔日の闘志が失われ、何としても冴えない長官であった。早くも耄碌したのではなかろうかと感ずる程であった。作戦を指揮する態度も退嬰的であった。
후치다 미쓰오 대좌
大佐時代から第1水雷戦隊司令官時代までは、いわば満点を与えられるほどの人物であったが、開戦後は溌剌颯爽たりし昔日の闘志が失われ、何としても冴えない長官であった。早くも耄碌したのではなかろうかと感ずる程であった。作戦を指揮する態度も退嬰的であった。
후치다 미쓰오 대좌
그가 출세할 수 있었던 건 황실에 충성하고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합니다. 그는 독창적이지 않고, 융통성이 없으며,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볼 줄 모르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무너지는 타입입니다.
앤드류 램버트 해군 역사학 교수,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쟁의 대가들 - 미드웨이, 플래처 VS 나구모> 중에서
앤드류 램버트 해군 역사학 교수,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쟁의 대가들 - 미드웨이, 플래처 VS 나구모> 중에서
4. 가계
1887년 3월 25일 야마가타현 미나미오키타마현 요네자와 노부오마을(현재의 요네자와시)에서 군역소서기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6명의 남매가 있으며, 아버지는 옛 요네자와 번의 가신이며, 번에서는 온후치카타[ruby(御扶持方, ruby=おんふちかた)]([ruby(中士, ruby=ちゅうし)] 계급)이기도 했다.- 부 - 나구모 슈조[ruby(南雲 周蔵, ruby=なぐも しゅうぞう)]
- 모 - 나구모 신[ruby(南雲 志ん, ruby=なぐも しん)]
- 본인을 제외한 5명의 남매
- 부인 리키(りき)
- 장남 - 나구모 스스무[ruby(南雲進, ruby=なぐも すすむ)] : 해군소좌로 1944년 12월 4일 유구모급 구축함 15번함 키시나미에서 전사했고, 사후에 해군 중좌로 승진됨
나구모의 손자 중에 항공자위대 현역 공장(空将)[18]이 있다. 이름은 나구모 켄이치로(南雲憲一郎). F-15 파일럿 출신으로, 2023년 3월 30일부로 서부항공방면대 사령관에서 통합막료부장[19]으로 영전하였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가공전기에서 푸대접받는 대표적인 일본 군인으로, 높은 확률로 닥치고 초반에 사망한다.5.1. 애니메이션 & 소설
- 전투요정 유키카제 - UN의 요청으로 남극에 파견된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CVN-56의 함장으로 실존 인물 나구모 주이치에서 모티브를 따온 '나구모'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CVN-56의 별칭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함께 유키카제가 극우 작품으로 종종 까이는 원인 중 하나. 작중 등장하는 일본군이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는 (원작, OVA 모두 다) 표현으로 볼 때 이는 제국주의 미화의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비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외계 전투기가 쳐들어와 전투 조종사들이 숱하게 격추 당하고 호위함 한척은 대파당한 마당인데 겨우 위기에서 구해준 부커 소령 앞에 세워두고 손톱이나 깎으며 달갑지 않은 소리나 해댔다.
- 일본의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도 소극적이고 무능한 모습으로 등장. 미드웨이 해전에서 먼저 적기를 발견하고 요크타운을 공격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카기, 카가, 히류를 잃고 패주한다. 그나마 실제 역사와 달리 야마구치 다몬이 자살하지 앓기로 결심해서 소류만 건진다. 역사대로 사이판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5.2. 영화
- 1970년작 도라!도라!도라!에서는 토노 에이지로가 역을 맡았다.
- 1976년에 만들어진 영화 미드웨이에서는 일본계 미국인이었던 제임스 시케타가 맡았다. 대사를 영어로 말한다. 여담으로 목소리가 제라드 듀갈을 연상시킨다.
- 1988년의 미국 미니시리즈인 전쟁과 추억에서는 대니 가메코나가 맡았다.
- 2019년 미국 영화 미드웨이에서 쿠니무라 준이 맡았는데, 싱크로율이 상당하다.
[1] 마지막 전투 후 특진[공1급] [3] 사진 속에서 나구모 중장의 목에 걸려있는 훈장이다.[훈1등] [5] 금치훈장과 마찬가지로 나구모 중장의 목에 걸려있는 훈장이다.[훈1등] [7] 나구모 중장의 왼쪽 가슴 부분에 리본 없이 달려있는 훈장이다.[가마쿠라시] [9] 일설에는 항모기동부대 지휘관 인사를 주도한 건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30년대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해군대신을 지냈던 요시다 젠고 제독이었으며, 야마모토는 나구모와는 또 다르게 오자와 지사부로가 자신이 컨트롤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하는 수 없이 불편해도 자신이 컨트롤 하기 쉬운 나구모를 선임했단 이야기도 있다. 사실 오자와 지사부로는 이미 제1항공전대 사령관으로 항모과 지상기지 출격 전투기의 연합작전 훈련을 성공적으로 지휘했으며, 중일전쟁 당시 항공실전 경험이 있는 항공전문가 겐다 미노루의 도움을 받아 항모기동부대 창설과 각종 항공전투 교리를 담은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항공 경험이 전무했던 나구모보단 훨씬 적합한 인사였지만 배제되었단 것이다. 즉, 야마모토로선 연공서열이든 다루기 쉬운 측면에서든 나구모가 오자와보단 낫단 결론이었단 것. 다만 나구모가 항공경험이 전무해 이 약점은 겐다 미노루를 참모로 붙여서 해결하고자 했다.[10] 그냥 순양함도 아니고 당시 미국이 보유한 가장 성공적인 최신 중순양함 뉴올리언스급이다. 전함이 전멸하여 중순양함 한척이 아까운 상황에서 그야말로 대승인 것. 괜히 미국이 사보섬 해전을 역사상 가장 뼈 아픈 패배 중 하나로 꼽는 것이 아니다.[11] 물론 수송 선단을 공격하는 것도 가능은 했겠지만 시간대가 밤이라 공격하려면 야간돌격을 감행해야 했고 수송 선단의 정확한 위치는 물론 미국 항모의 위치까지 모르는 상태에서 적지 한복판을 활보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12] 정확히는 미국 항모가 진주만에 없으며 소재파악도 불가한 상황.[13] 즉, '안 하기로 했으니까 걔는 안 할 거야'라는 맥락인 셈이다.[14] 왜냐하면, 만약 그날 오후에 히류를 살린 채로 철수했다면 항공관계 승조원 손실을 확 줄일 수 있었을 것이며, 함대 재건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류까지 잃어버린 다음 나구모는 빈 손으로 돌아가기보다 최후의 전과를 노리고 야간수뢰전을 노리게 된다.[15] 미드웨이 해전 문서에는 히류의 상실 이후 나구모가 철수를 건의해서 철수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쪽이 사실이라면 야마구치가 명령을 위반하면서까지 히류를 날려먹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16] 정확히는 항공이나 포격전 한정. 나구모는 자기 전공분야였던 수뢰전에는 빠삭했다.[17] '진취적'의 반의어. 나서지 않고 뒤로 물러나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뜻.[18] 중장에 해당함.[19] 한국으로 치면 합동참모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