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캐 토모자키 군'의 캐릭터에 대한 내용은 나카무라 슈지(약캐 토모자키 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 <rowcolor=#cd9f51> 1901 | 1902 | 1903 | |
빌헬름 뢴트겐 | 헨드릭 로런츠 | 피터르 제이만 | 앙투안 베크렐 | |
<rowcolor=#cd9f51> 1903 | 1904 | 1905 | ||
피에르 퀴리 | 마리 퀴리 | 존 라일리 | 필리프 레나르트 | |
<rowcolor=#cd9f51> 1906 | 1907 | 1908 | 1909 | |
조지프 톰슨 | 앨버트 마이컬슨 | 가브리엘 리프만 | 굴리엘모 마르코니 | |
<rowcolor=#cd9f51> 1909 | 1910 | 1911 | 1912 | |
카를 브라운 | 요하너스 판데르발스 | 빌헬름 빈 | 닐스 달렌 | |
<rowcolor=#cd9f51> 1913 | 1914 | 1915 | ||
헤이커 오너스 | 막스 폰 라우에 | 헨리 브래그 | 윌리엄 브래그 | |
<rowcolor=#cd9f51> 1917 | 1918 | 1919 | 1920 | |
찰스 바클라 | 막스 플랑크 | 요하네스 슈타르크 | 샤를 기욤 | |
<rowcolor=#cd9f51> 1921 | 1922 | 1923 | 1924 |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닐스 보어 | 로버트 밀리컨 | 만네 시그반 | |
<rowcolor=#cd9f51> 1925 | 1926 | 1927 | ||
제임스 프랑크 | 구스타프 헤르츠 | 장 페랭 | 아서 콤프턴 | |
<rowcolor=#cd9f51> 1927 | 1928 | 1929 | 1930 | |
찰스 윌슨 | 오언 리처드슨 | 루이 드 브로이 | 찬드라세카라 라만 | |
<rowcolor=#cd9f51> 1932 | 1933 | 1935 |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폴 디랙 | 에르빈 슈뢰딩거 | 제임스 채드윅 | |
<rowcolor=#cd9f51> 1936 | 1937 | |||
빅터 헤스 | 칼 앤더슨 | 클린턴 데이비슨 | 조지 톰슨 | |
<rowcolor=#cd9f51> 1938 | 1939 | 1943 | 1944 | |
엔리코 페르미 | 어니스트 로런스 | 오토 슈테른 | 이지도어 라비 | |
<rowcolor=#cd9f51> 1945 | 1946 | 1947 | 1948 | |
볼프강 파울리 | 퍼시 브리지먼 | 에드워드 애플턴 | 패트릭 블래킷 | |
<rowcolor=#cd9f51> 1949 | 1950 | 1951 | ||
유카와 히데키 | 세실 파월 | 존 콕크로프트 | 어니스트 월턴 | |
<rowcolor=#cd9f51> 1952 | 1953 | 1954 | ||
펠릭스 블로흐 | 에드워드 퍼셀 | 프리츠 제르니케 | 막스 보른 | |
<rowcolor=#cd9f51> 1954 | 1955 | 1956 | ||
발터 보테 | 윌리스 램 | 폴리카프 쿠시 | 윌리엄 쇼클리 | |
<rowcolor=#cd9f51> 1956 | 1957 | |||
존 바딘 | 월터 브래튼 | 리정다오 | 양전닝 | |
<rowcolor=#cd9f51> 1958 | 1959 | |||
파벨 체렌코프 | 일리야 프란크 | 이고르 탐 | 오언 체임벌린 | |
<rowcolor=#cd9f51> 1959 | 1960 | 1961 | ||
에밀리오 지노 세그레 | 도널드 글레이저 | 로버트 호프스태터 | 루돌프 뫼스바우어 | |
<rowcolor=#cd9f51> 1962 | 1963 | |||
레프 란다우 | 유진 위그너 | 마리아 메이어 | 한스 옌젠 | |
<rowcolor=#cd9f51> 1964 | 1965 | |||
찰스 타운스 | 니콜라이 바소프 |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 | 리처드 파인만 | |
<rowcolor=#cd9f51> 1965 | 1966 | 1967 | ||
줄리언 슈윙거 | 도모나가 신이치로 | 알프레드 카스틀레르 | 한스 베테 | |
<rowcolor=#cd9f51> 1968 | 1969 | 1970 | ||
루이스 앨버레즈 | 머리 겔만 | 한네스 알벤 | 루이 네엘 | |
<rowcolor=#cd9f51> 1971 | 1972 | |||
데니스 가보르 | 존 바딘 | 리언 쿠퍼 | 존 슈리퍼 | |
<rowcolor=#cd9f51> 1973 | 1974 | |||
에사키 레오나 | 이바르 예베르 | 브라이언 조지프슨 | 마틴 라일 | |
<rowcolor=#cd9f51> 1974 | 1975 | |||
앤서니 휴이시 | 오게 보어 | 벤 모텔손 | 제임스 레인워터 | |
<rowcolor=#cd9f51> 1976 | 1977 | |||
버턴 릭터 | 새뮤얼 팅 | 필립 앤더슨 | 존 밴블랙 | |
<rowcolor=#cd9f51> 1977 | 1978 | |||
네빌 모트 | 표트르 카피차 | 아노 펜지어스 | 로버트 윌슨 | |
<rowcolor=#cd9f51> 1979 | 1980 | |||
스티븐 와인버그 | 무함마드 살람 | 셸든 글래쇼 | 제임스 크로닌 | |
<rowcolor=#cd9f51> 1980 | 1981 | |||
벨 피치 | 니콜라스 블룸베르헌 | 아서 숄로 | 카이 시그반 | |
<rowcolor=#cd9f51> 1982 | 1983 | 1984 | ||
케네스 윌슨 |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 | 윌리엄 A. 파울러 | 카를로 루비아 | |
<rowcolor=#cd9f51> 1984 | 1985 | 1986 | ||
시몬 판 데르 메이르 | 클라우스 폰 클리칭 | 에른스트 루스카 | 게르트 비니히 | |
<rowcolor=#cd9f51> 1986 | 1987 | 1988 | ||
하인리히 로러 | 요하네스 베드노르츠 | 카를 뮐러 | 리언 레더먼 | |
<rowcolor=#cd9f51> 1988 | 1989 | |||
멜빈 슈워츠 | 잭 스타인버거 | 한스 데멜트 | 볼프강 파울 | |
<rowcolor=#cd9f51> 1990 | 1991 | |||
제롬 프리드먼 | 헨리 켄들 | 리처드 테일러 | 피에르질 드 젠 | |
<rowcolor=#cd9f51> 1992 | 1993 | 1994 | ||
조르주 샤르파크 | 러셀 헐스 | 조지프 테일러 | 버트럼 브록하우스 | |
<rowcolor=#cd9f51> 1994 | 1995 | 1996 | ||
클리퍼드 슐 | 프레더릭 라이네스 | 마틴 펄 | 데이비드 리 | |
<rowcolor=#cd9f51> 1996 | 1997 | |||
더글러스 오셔로프 | 로버트 리처드슨 | 윌리엄 필립스 | 스티븐 추 | |
<rowcolor=#cd9f51> 1997 | 1998 | |||
클로드 코엔타누지 | 대니얼 추이 | 로버트 러플린 | 호르스트 슈퇴르머 | |
<rowcolor=#cd9f51> 1999 | 2000 | |||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 마르티뉘스 펠트만 | 조레스 알표로프 | 허버트 크뢰머 | |
<rowcolor=#cd9f51> 2000 | ||||
잭 킬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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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word-break:keep-all; font-size:.96em; letter-spacing:-.2px" | <rowcolor=#fff> 순서 | 이름 | 연도·부문 | 사유 | 비고 |
1 | 유카와 히데키 (湯川 秀樹) | 1949 물리 | 중간자의 존재 예측 | 노벨상/물리학상 최초 수상 | |
2 | 도모나가 신이치로 (朝永 振一郎) | 1965 물리 | 양자 전기역학의 기초 연구 | ||
3 | 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 康成) | 1968 문학 | 소설 《설국》 | 문학상 최초 수상 | |
4 | 에사키 레오나 (江崎 玲於奈) | 1973 물리 | 반도체와 초전도체의 터널효과 발견 | ||
5 | 사토 에이사쿠 (佐藤 榮作) | 1974 평화 | 비핵 3원칙 제창 | 평화상 최초 수상 | |
6 | 후쿠이 겐이치 (福井 謙一) | 1981 화학 | 화학 반응의 궤도함수 대칭 해석 | 화학상 최초 수상 | |
7 | 도네가와 스스무 (利根川 進) | 1987 생리의학 | 항체 다양성의 유전학적 원리 해명 | 생리의학상 최초 수상 | |
8 | 오에 겐자부로 (大江 健三郎) | 1994 문학 | 소설 《개인적인 체험》 | ||
9 | 시라카와 히데키 (白川 英樹) | 2000 화학 | 전도성 고분자 물질 개발 | ||
10 | 노요리 료지 (野依 良治) | 2001 화학 | 키랄 촉매에 의한 비대칭 반응 연구 | ||
11 | 고시바 마사토시 (小柴 昌俊) | 2002 물리 | 우주 중성미자 검출과 관련한 선구자적 연구 | ||
12 | 다나카 고이치 (田中 耕一) | 2002 화학 | 생체고분자의 질량 분석을 위한 연성 탈착 이온화 방법의 개발 | 과학분야 학사 출신 최초 수상 | |
13 | 고바야시 마코토 (小林 誠) | 2008 물리 | CP 대칭깨짐 원리 발견 | ||
14 | 마스카와 도시히데 (益川 敏英) | ||||
15 | 난부 요이치로 (南部 陽一郎) | 일본 출생 미국 국적 | |||
16 | 시모무라 오사무 (下村 脩) | 2008 화학 | 녹색 형광 단백질 GFP 발견 및 개발 | ||
17 | 스즈키 아키라 (鈴木 章) | 2010 화학 | 팔라듐 촉매교차결합법(스즈키 커플링 / 네기시 커플링) 개발 | ||
18 | 네기시 에이이치 (根岸 英一) | 히키아게샤 일본 국적 | |||
19 | 야마나카 신야 (山中 伸弥) | 2012 생리의학 | 유도만능줄기세포(iPS) 개발 | ||
20 | 아카사키 이사무 (赤﨑 勇) | 2014 물리 | 청색 LED 발명 | ||
21 | 아마노 히로시 (天野 浩) | ||||
22 | 나카무라 슈지 (中村 修二) | 일본 출생 미국 국적 | |||
23 | 오무라 사토시 (大村 智) | 2015 생리의학 | 회충 감염의 새로운 치료법 발견 | ||
24 | 가지타 다카아키 (梶田 隆章) | 2015 물리 | 중성미자 진동 관측 | ||
25 | 오스미 요시노리 (大隅 良典) | 2016 생리의학 | 자가포식(오토파지) 매커니즘 연구 | ||
26 | 이시구로 가즈오 (石黒 一雄) | 2017 문학 | 소설 《남아 있는 나날》 | 일본 출생 영국 국적 | |
27 | 혼조 다스쿠 (本庶 佑) | 2018 생리의학 | 음성적 면역 조절 억제를 통한 암 치료법 발견 | ||
28 | 요시노 아키라 (吉野 彰) | 2019 화학 | 리튬 이온 배터리 개발 | ||
29 | 마나베 슈쿠로 (真鍋 淑郎) | 2021 물리 | 기후 변화에 대한 신뢰성 있는 예측 모델 제시 | 일본 출생 미국 국적 | |
30 |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 (日本原水爆被害者団体協議会) | 2024 평화 |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 | 일본 첫 단체 수상 | |
일본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는 일본계 외국인 수상자는 포함하지 않은 집계. 다만, 1986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리위안저(대만일치시기 일본 국적) 및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일제강점기 일본 국적)은 제외. |
나카무라 슈지 中村 修二 | |
<colbgcolor=#000><colcolor=#fff> 성명 | <colbgcolor=#fff,#191919>영: Shuji Nakamura 일: 中村 修二 (なかむらしゅうじ) 한: 나카무라 슈지 |
출생 | 1954년 5월 22일 ([age(1954-05-22)]세) |
일본 에히메현 니시우와 군 요츠하마 촌[1]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1954~2005 → [[미국| ]][[틀:국기| ]][[틀:국기| ]]2005~ |
직업 | 전자공학자 |
분야 | 발광다이오드 |
학력 | 오즈시립 기타 소학교 (1967년 졸업) 오즈시립 시타 중학교 (졸업) 오즈시립 키타 고등학교 (졸업) 오즈시립 오즈키타 중학교 (졸업) 에히메현립 오즈 고등학교 (졸업) 도쿠시마대학 공학부 (전자공학 / 1977년 학사) 도쿠시마대학 대학원 (공학연구과 / 1979년 석사) 도쿠시마대학 대학원 (공학연구과 / 1994년 박사)[2] |
현직 | UC 산타바바라 (재료물성학과 / 석좌교수) |
업적 | 청색 발광다이오드의 발명 |
링크 |
[clearfix]
1. 개요
일본계 미국인 전자공학자.에히메현 니시우와군 이카타정[3] 출신, 일본 도쿠시마대학 공학부 전자공학과 출신(공학 박사). 2014년에 아카사키 이사무, 아마노 히로시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공적은 청색 발광 다이오드의 발명.
2. 생애
원래는 이론물리학 혹은 수학 계열의 학부로 진학하고자 했으나[4], 취직을 생각하라는 교사의 조언으로 인해 도쿠시마대학[5] 공학부의 전자공학과로 진학하였다. 졸업 당시의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고 한다. 학부 졸업후에 도쿠시마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공학연구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6]
석사학위 취득 후 바로 중소기업이던 도쿠시마의 마츠시타 전기산업에 지원했으나, 학부 및 석사시절 항상 성적이 최상위권이었고 도쿠시마대학 대학원의 추천서도 받았음에도 떨어졌다고 한다. 이유는 졸업논문 주제가 너무 이론적인 내용이라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대학원 시절의 지도교수로부터 지적받았다고 한다. 그 후로 교세라에 합격했지만, 이 시점에 이미 아내와 자식이 있었기에 출신 지방에 취직하기를 원해 니치아 화학공업으로 입사하게 된다.
2.1. 청색 LED 개발
청색 LED의 개발이 중요한 이유는 적색, 녹색, 청색 세 가지 색상이 모두 있어야 빛의 삼원색을 완성하여 원하는 모든 색상을 표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중 적색 LED와 녹색 LED는 비교적 생산이 쉬워 일찍부터 개발되어 상업적으로 활용되었지만, 청색 LED는 대량 생산 과정에서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곧 개발될 것처럼 보였던 청색 LED는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기술적 난관에 부딪혔고, 몇 년이 지나도 프로토타입 수준에 머무르는 상황이었다. 결국 당시 LED는 반쪽짜리였던 셈이다.나카무라 슈지는 이 청색 LED의 가능성을 깨닫고 개발에 매달리게 된다. 나카무라 슈지는 재직 중 오가와 노부오 사장을 설득하여 5억엔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한편, 아는 사람이 있었던 플로리다 대학교에 교환 연구원으로 연구를 떠나게 된다. 목적은 MOCVD(Metal Organic Chemical Vapor Deposition, 유기금속화학증착장비[7])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서였는데, 그 곳에서 나카무라 슈지는 동료들에게 박사 학위도 없다며 갖은 수모를 겪게 된다. 당시 일본에는 논문 5편을 내면 대학원에 가지 않아도 박사 학위를 주는 논문박사 제도가 있었는데, 단순히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말라는 사내 정책 때문에 아직도 박사 학위가 없었던 것 뿐이었지만[8], 같은 랩실 동료들에게 공돌이 취급이나 당하며 거의 1년간 수모를 당해야 했다. 게다가 MOCVD 사용법도 고장난 MOCVD나 하나 쥐어주고 그거 뜯어보라는 식이었다.
노벨상 수상 직후 연구의 원동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분노다. 그것이 내게 모든 동기부여를 했다."[9] 라고 답했다. 참고로 그의 박사 논문은 "무려" 청색 LED의 세기적인 발명 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2024년 현재는 9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여 박사 학위는 옛날에 취득한 상태이다.
당시 청색 LED 후보 물질로 Zinc Selenide(ZnSe)와 Gallium Nitiride(GaN) 2개가 유력한 후보였는데, 지금이야 당연히 정답이 GaN임을 알지만 당시의 대세는 전자였다. 당시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몇 십년간 놀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ZnSe를 이용한 청색 LED의 프로토타입 자체는 개발된 상태였다. 다만 만드는 과정이 어렵고, 가격도 비쌌고, 빛이 미약하여 상업적으로 적합하지 않았을 뿐. 후자는 더더욱 답이 없었는데 이유는 GaN은 ZnSe'보다도' 결정 증착이 매우 어려웠던 데다가, P-type 소자는 물론,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 개발품이 실생활에서 사용할 만큼 밝아야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P-Type 소자의 제조 방법은 ZnSe도 가지고 있는 문제였다.
당시 GaN의 결정 증착법의 난제가 일부 풀린 상황이었기에 나카무라 슈지는 청색 LED 개발을 GaN으로 시도해보기로 마음 먹고 6개월간 매진하였지만 회사에 있는 MOCVD가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나카무라 슈지는 그 수모의 1년간 플로리다에서 MOCVD를 가지고 놀며 이 기계를 마스터한 상태였는데, 이 모욕적인 시기의 경험이 청색 LED 개발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기존 장비는 증착에 한계가 있어 기계를 스스로 개조하고 테스트한 뒤 이를 반복하는 방법을 통해서 실험을 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연구 도중 연구비를 지원해주었던 오가와 노부오가 은퇴하고 그의 사위였던 오가와 에이지가 사장 자리에 앉았다. 오가와 에이지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방법"이었던 GaN 연구를 지원할 마음이 없었다. 다른 유수의 대기업이 ZnSe 증착법을 주류로 미는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보였을 리가 없었을 것. 오가와 에이지는 나카무라 슈지에게 연구를 그만두라 계속해서 통보하고 명령하지만, 나카무라 슈지는 이를 무시하고 꾸준히 자신만의 연구를 이어가며 사장 오가와 에이지와 대립하게 된다.
나카무라 슈지는 몇 가지의 난관을 타파하여 드디어 청색 LED 개발에 성공, 1992년 세인트 루이스의 한 워크샵에서 "기존 불가능해 보였던 방법", 즉 GaN을 통해서 제조한 청색 LED를 세계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LED는 지금 보면 밝지도 않은데다가 순수 파란색이 아닌 푸르스름한 보라색 비슷한 색깔의 LED지만 당시 세계가 받았던 충격은 엄청났다. 얼마 뒤 나카무라 슈지는 몇 차례의 공정 개선을 통하여 순수 청색 LED를 드디어 제조해내기에 이른다.
이에 니치아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청색 LED" 개발에 성공하였음을 전세계에 공표하게 된다. 이후 1996년, 청색 LED에 형광 물질을 도포, 청색 파장을 흡수하여 순백색을 표현하는 방식의 순백색 LED도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참고로 백색 LED는 일상 생활의 조명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상업성은 더욱 뛰어나다. 개발 직후인 1993년 매출 160억엔에서 1996년 280억엔, 그 후 3년 뒤인 1999년은 630억엔(!)으로 뛰게 된다. 현재 니치아의 업계 전방위적 위치는 순수히 이 양반 덕분이다. 나카무라 슈지의 청색 LED 발명으로 니치아 화학공업은 세계 제일의 LED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2.2. 니치아 화학공업과의 대립
청색 LED 개발 후 니치아의 매출은 수직상승하였지만 회사에서 나카무라 슈지에게 준 것은 각 특허당 보너스 2만엔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회사 급성장 이후 연봉을 약 $60,000까지 올려줬다고는 한다. 나카무라 슈지의 미국인 동료 연구자는 월급 이외의 발명에 대해 회사에서 얻은 보상이 너무 적다며 그에게 '슬레이브 나카무라' 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이는 상기하였듯이 아마 나카무라 슈지가 상부 명령에 불복종하고 성과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오가와 에이지와의 대립 때문으로 보인다.니치아 화학공업의 오가와 노부오 사장은 초창기에 나카무라 슈지가 하고 싶다는 청색 LED 연구를 위해서 당시 회사 규모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5억엔을 지원해 주는 등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 주었지만 그에 대한 보답은 너무 짰다. 결국 2000년, 나카무라 슈지는 니치아를 그만두고 미국 LED 회사 CREE에 취업하였는데, 니치아 화학공업은 영업 비밀 누설을 의심하여 노스캐롤라이나주 동부지구 연방지방법원을 통하여 나카무라 슈지에게 소송을 걸어, 집은 물론 대학 연구실도 조사를 받게 해 추진하던 연구도 중단되게 하는 등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고, 결국 이에 지친 나카무라 슈지는 2001년 일본 법원에 “해당 특허의 권리는 원시적으로는 자신에게 귀속되고 이것이 인정되지 않으면 그만큼의 양도 대가를 지급하라”는, 다시 말해 특허권을 나에게 주든가, 못 준다면 개발 대가를 주라는 취지의 2천만 달러를 청구하여 맞소송을 걸게 된다. 소의 쟁점은 '회사의 청색 LED 제조법은 나카무라 슈지가 100% 개발한 것'이라는 나카무라 슈지의 주장과, '그 기술은 양산 과정에서는 불필요한 기술'일 뿐이라는 니치아 화학공업의 주장. 이것이 그 유명한 404 특허 사건이다.
소송 결과 도쿄 지방재판소는 나카무라 슈지의 공헌도를 50% 인정하여 그에 해당하는 금액인 2억달러[10]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참고로 이는 나카무라 슈지가 청구한 금액의 10배이다. 그러나 200억엔이란 액수가 보도되자 여러 기업들이 너무 과하다며 비판을 했고, 재판소도 이를 의식했는지 이후 진행된 항소에서 도쿄 고등재판소는 화해권고를 하였다. 이후 쌍방은 이를 받아들였는데 화해금은 810만달러[11]로 결정되었다. 나카무라 측에서는 매우 분했지만 화해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항소심에서 404 특허로만 판결이 좁혀져 액수가 약 2억엔으로 크게 줄 가능성이 있어, 소송비 빼면 남는 게 없는 상황을 막고자 했다고.
니치아 화학공업은 소송이 끝난 2006년, 나카무라 슈지의 특허권을 '양산 과정에서는 불필요한 기술'이라는 이유로 특허를 폐기해버리는 보복성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나카무라 슈지는 항소심 후 '일본의 사법은 부패했고 신뢰할 수 없다'[12] 라고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노벨상 수상 후 2015년에 한 강연[13]에서 일본 사법제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와는 별도로 자신의 연구를 크게 지원해준 오가와 노부오 전 사장은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제 아무리 뛰어난 두뇌와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것을 실현시킬 돈과 인재를 보는 눈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오가와 사장의 지분이 결코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사연이 있어 법적 공방으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흐른 노벨상 시상식 소감에서도 오가와 노부오 사장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다. 참고로 오가와 노부오는 2002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일본을 사랑하지만 일본식 시스템에 실망을 느껴"[14] 미국으로 떠난 나카무라 슈지는 2005년경 "미국 대학에서 교수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연구비를 취득하는 일이다. 내 연구 분야의 경우 연구비의 절반 이상이 미국 정부, 미군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그것을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시민권이 필수적이다."라는 이유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 일본 국적을 포기했다. 일본은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15] 자연스럽게 일본 국적이 소실되어 미국인이 되었다.[16]
2.3. 노벨상 수상
법적 공방으로부터 수 년 후인 2014년, 청색 LED 발명의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기존 조명 장치인 백열등은 공급되는 에너지 중 95%가 열에너지로 버려지고 단 5%만이 빛의 형태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되는데, LED 조명이 기존 백열 조명을 대체함으로써 탄소 저감을 국가 단위로 실현할 수 있고, 이를 환산할 경우 전세계의 자동차가 내뿜는 탄소 50%를 저감한다는 것이 밝혀져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수상 후 나카무라 슈지는 노벨상 상금 중 절반을 모교인 도쿠시마대학에 기부하였다.링크참고로 도쿠시마 대학은 지방 국립대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국립대로 지위가 상승했으며, 도쿠시마 대학의 LED 관련 기술 연구는 2020년 현재까지도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관련된 학부는 이공학부 이공학과 정보광 시스템 학과의 광학계. 2016년경부터 이학부와 공학부가 합쳐졌기에 현재는 이공학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쿠시마 대학 이공학부 건물 내부에는 나카무라 슈지 박사에 대한 기사들이 수상후 6년이 지난 2020년까지도 여전히 붙어있다.
이후 "좋아하는 일만 해라" 라는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3. 수상 경력
- 니시나키 기념상(1996년)
- 오코지 기념상(1997년)
- 밀레니엄 기술상(2006년)
- 아스투리아스 공상 학술/기술연구부문(2008년)
- 하비상(2009년)
- 63회 에미상 기술개발부문(2011년)
- 노벨물리학상(2014년)
- 찰스 스타크 드레이퍼상(2015년)
[1] 지금의 이요정.[2] 박사학위논문 InGaN 고휘도 청색 LED에 관한 연구 (原題:InGaN高輝度青色LEDに関する研究 (1994)).[3] 출생 당시 요츠하마촌[4] 노벨물리학상 수상 관련 인터뷰에서, 수학은 중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해당 유튜브 링크(노벨재단, 영어))[5] 2016년 기준으로 일본 내 대학 순위 28위[6] 교토대학에도 지원했지만, 단 1점이 부족해서 불합격되었다고 한다.[7] 유기 화합물을 증기 형태로 쏴 기판 위에 금속 막을 증착시키는 장치[8] 논문박사 제도. 일본에서 논문박사는 박사학위번호에서 을(乙)호박사로 분류되고 과정박사(갑(甲)호)와 구분된다. 참고로 2019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요시노 아키라도 논문박사 제도로 오사카대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9] 해당 유튜브 링크(일본 ANNnewsCH, 일본어) . 해당 질문 및 답변 자체는 영어로 이루어졌다.[10] 200억엔[11] 8억엔[12] 해당 유튜브 링크(일본 ANNnewsCH, 일본어). 상당히 격앙된 어조로 발언했다.[13] 유튜브 링크,일본어[14] 2014년 10월 조선일보 인터뷰[15] 정확히는 1984년 12월 31일까지 출생한 선천적 이중국적자에게만 허용하는데, 나카무라 슈지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16] 2014년 10월 withnews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