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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2:38:29

죽창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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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전개3. 배경4. 결과

1. 개요

竹槍事件 (たけやりじけん)

1944년 2월 23일, 마이니치 신문에 실린 기사를 둘러싼 사건.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치닫는 와중에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빚어낸 사건이다.

2. 전개

1944년 2월 23일,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는 이른바 비상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일억총옥쇄를 부르짖으며 전 국민에게 단결 및 무장을 호소, 사실상 지시했다. 이에 따라 후방의 부녀자들도 죽창을 지급받고 본토결전의 준비를 위한 군사훈련을 수행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이 내용은 보도지침에 따라 일본의 모든 신문사 1면에 게재되었다.

문제는 마이니치 신문에서 발생했다. 마이니치 신문 1면 상단에는 마찬가지로 비상시국 선언이 게재되었지만 하단에는 바로 그 내용을 정면으로 강력하게 비판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승리 또는 멸망, 전황은 여기까지 왔다
일본은 건국 이래 최대의 고비를 맞이하여 야마토 민족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 대동아 전쟁의 승패는 태평양의 상공에서 결정되는 것이며, 적이 본토에 침공한 이후는 너무 늦다. 죽창으로 비행기를 떨어트릴 수는 없다! 비행기, 그것도 함재기(가 필요하)다! 대동아 전쟁의 승부는 해양 항공력의 증강에 달려 있으며, 적의 항공력에 죽창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다.

그리고 이 기사에는 필리핀마리아나 제도로 예상되는 미군의 예상침공로까지 떡 하니 올려놓았다.

분노한 도조와 대본영은 즉시 마이니치 신문을 휴간시키고, 배송된 신문들을 일일이 회수하였으며 편집장 및 글을 쓴 당사자인 신묘 타케오(新名丈夫)를 소환하였다.

3. 배경

이 글을 쓴 사람은 마이니치 신문의 해군성 담당 수석기자 신묘 타케오였다. 신묘 타케오는 1906년생으로 개전 이전부터 마이니치 신문의 해군 담당 기자였고, 과달카날 전투에 해군 측 기자로 종군하여 태평양 전쟁의 절망적인 전황을 매우 잘 이해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자가 불의에 맞서는 신념으로 이런 글을 쓴 건 아니다.

직관적으로 생각해서 죽창으로는 본토 방공이 불가능함을 부각하면서 굳이 함재기를 언급한 이유를 생각해보자. 본토 방공이라면 굳이 함재기를 부각할 필요 없이 '전투기'라는 용어로 포괄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물론 적이 본토에 접근하기 전에 사전 차단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미군의 공세선까지 추론할 정도라면 공세점의 비행장에 배치될 육군 항공기도 언급해야 하지 않는가.

실상은 오랜 기간 해군 측 기자였던 신묘 타케오에게, 친하게 지내던 해군성 보도부장 쿠리하라 에츠조(栗原悦蔵)소장이 슬쩍 '육군을 비판하고 태평양 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사를 써 달라.'고 청탁을 한 것이 배경이었다. 유력 신문의 해군담당 수석기자, 그리고 해군성의 보도부장이라는 두 사람의 관계로 일은 일사천리에 진행되었다. 당시 모든 기사는 검열통제를 받았으나, 수석기자급은 정부 및 군과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1][2]

해군이 신묘 타케오에게 이 기사를 부탁한 배경은 1943년경부터 본격화된 전황악화와 육해군의 무한 병림픽 때문이었다. 과달카날 전투, 라바울 항공전을 연이어 치르면서 일본 해군의 항공기 손실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고[3] 해군은 악착같이 항공기의 추가생산 및 확보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육군은 중국 전선에선 하등 필요도 없다며 항공기의 추가생산에 반대하고 그럴 자원이 있으면 육군용 중화기를 더 생산해야 한다며 물자 배분에 있어 해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43년 하반기에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대본영이 해군의 손을 들어주어서 항공기 생산에 더 많은 자원을 배정하기로 하였으나, 육군이 여기에 반발하여 군 병력과 야포를 투입, 해군 항공기 생산 공장에 쳐들어가 근로자들을 억류하고, 다시 해군이 병력을 투입해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런 육군의 횡포에 해군은 내각이 병맛같은 죽창 드립을 실현에 옮기자, 친분이 있는 신묘 타케오를 통해 육군을 폭풍처럼 까대는 기사를 내보내고 여론을 해군 편으로 옮기려 한 것이다.

4. 결과

해군의 역습에 한 방 맞은 육군이었지만, 해군이 배후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보니 똑같은 언론전으로 반격에 나섰다. 해당 기사가 실린 다음날인 2월 24일, 육군은 마이니치 신문의 경쟁사인 아사히 신문을 동원해 '지나 전선이 태평양 전선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반론 기사를 실었다. 뒤이어 도조는 마이니치 신문에 휴간을 넘어선 폐간을 시키려 했으나 유력 언론사를 폐간시키면 그 기사가 맞다는 걸 증명하는 꼴밖에 안된다는 주위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도조는 '죽창은 본토 방위에 있어 필수적'이라는 발언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뒤이어 육군은 자체적이면서 치졸한 보복조치에 나섰다. 신묘 타케오 기자에게 징집 영장을 날린 것이다. 이때 신묘 타케오의 나이는 38세로 징병연령을 한참 넘긴지 오래였다. 더군다나 그는 다이쇼 시절 징병검사에서 약시로 면제 판정을 받은 인물이었다. 어쨌든 신묘 타케오는 징집되었고 이에 해군성 기자 클럽이 대본영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씨알도 안먹혔다. 대신 해군이 나서서 '30대 중반 넘긴 애들을 현역으로 징집한 사례가 어디 있느냐'고 비판했는데, 이번에 육군이 '바로 그 30대 중반 넘긴 중년 아저씨들 200여 명을 징집해서 부대를 편성'하고 '여기에 전례가 있다.'고 함으로써 해군의 비판에 대해 반격하였다.

하지만 해군도 이에 당하기만 하지 않았다. 해군은 '신묘 타케오가 과거 잠시나마 육군 종군기자로 중국에 있었으니 쌤쌤 아니냐'며 반격을 펼쳤고, 이에 육군이 일단 물러나며 소집이 해제된다. 그 와중에도 육군은 신묘 타케오에게 한군두를 예고하고 실제로 두 번째 징집영장을 보냈으나, 해군은 두 번째 영장이 오기 전에 필리핀 주둔 해군부대의 공보반으로 신묘 기자를 차출시켜 신묘 기자는 화를 피할 수 있었다.[4] 신묘 타케오 기자는 필리핀 탈환전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천수를 누리다 1981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1]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신묘 타케오는 높으신 분들친목질을 하면서 출입처의 입맛대로 청부기사를 써주는 전형적인 기레기다.[2] 담당 수석기자의 기사만큼은 검열 없이 보도하겠다는 언론사와 해군 간의 신사협정에 따른 것으로, 오히려 어려운 환경에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한 행위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한다[3] 아직 카미카제는커녕 마리아나에서 칠면조 사냥을 당하기도 전이었다.[4] 한편 이 과정에서 신묘 타케오를 징집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육군에 징집된 200여 명의 중년 남성들은 대부분 이오지마 전투에 보내져 옥쇄했다. 다만 꼭 신묘 하나만 노리고 이 부대를 급조한 건 아니고, 중년 남성들까지 징집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징병 자원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이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