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솔로몬 제도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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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dalcanal
솔로몬 제도의 섬 중 하나로, 수도인 호니아라가 위치한 섬이다. 면적은 5,336km2로 솔로몬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현지 원주민 언어로는 이사타부(Isatabu)라고 한다. 과달카날이라는 이름은 이 섬을 처음 방문한 유럽인인 알바로 데 멘다냐(Álvaro de Mendaña)가 자신의 탐험대 대원이 태어난 곳인 스페인 세비야 과달카날(Guadalcanal)에서 따온 것이다.
19세기에는 영국이 통치했고 영국령 솔로몬 제도 보호령의 일부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이 이 섬을 점령했다. 미군과 영국군, 호주군, 뉴질랜드군은 1942년과 1943년에 걸쳐 이 섬을 탈환하기 위해 과달카날 전역을 벌였다. 대규모 전투 총 5번, 소규모 교전은 수백 번이 벌어졌다. 연합군은 우세한 해상 전력으로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어놓았고 이 때문에 수많은 일본군(2만 명)이 과달카날에서 굶어죽었는데, 그래서 일본군은 이 섬(ガダルカナル島: 가다루카나루토)의 줄임말인 가토(ガ島)와 소리가 같은 가토(餓島: 기아의 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론 미군도 고생했다. 이 당시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국 해병대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당시 실전에 투입되었던 제1해병사단의 엠블럼에는 'Guadalcanal' 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전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과달카날 전역 문서에 잘 설명되어 있다.
전쟁이 끝나고는 영국령 솔로몬 제도 보호령의 수도가 이 섬의 호니아라로 옮겨왔으며, 1978년에 솔로몬 제도가 독립한 후로는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져, 솔로몬 제도의 행정구역 과달카날 주와 호니아라 특별시로 구분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인접한 말라이타 섬 주민과 사이가 좋지 못하다. 말라이타 섬 주민들은 과달카날 섬 주민들과 여러 갈등을 빚었으며 말라이타 섬 주민들이 경제권을 쥐자 이사타부 자유운동(IFM) 같은 과달카날 민병대들이 말라이타 주민들의 부동산 등을 몰수했다. 바르톨로메오 울루파알루 총리가 미온적인 대처를 보이자 말라이타 주민들은 말라이타 독수리 부대(MEF)를 세우고 울루파알루 총리를 쫓아냈다. 이어 마나세 소가바레 총리가 새 총리가 되었다. 이 내전 상황에서 수천 명이 사망했다.
2. 미국 해군의 함선
유래는 모두 1의 지명이다.2.1.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CVE-60 과달카날
1943년에 취역했으며, 대서양에 배치된 몇 안 되는 카사블랑카급이었다.1944년 6월 4일 독일 유보트 U-505를 나포하는 데 성공, 1815년 이후 적 군함을 해상에서 나포한 최초의 미 해군 군함(아마도 유일한)이 되었다. 과달카날이 속한 22.3 기동부대는 대통령 표창을, 함대 지휘관과 함장도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때 나포당한 U-505는 조사를 거치고 몇 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시카고 과학산업박물관에 전시되었다.[1] 나포한 U-505를 예인할 때 과달카날은 동시에 항공기 이착함과 해상급유까지 해내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1955년 7월 15일에 CVU-60으로 함종이 변경되고, 1958년 5월 27일에 제적되어 1959년에 고철로 매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