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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5:11:29

근대 총검술

1. 역사2. 기술체계
2.1. 스텝(Step)2.2. 자세(Guard)2.3. 공격(Engaging)2.4. 방어(Parry)2.5. 상황별 대응법
3. 총검술 훈련의 개요
3.1. 다른 무기와의 전투-대처법3.2. 근대와 현대 총검술의 차이점3.3. 역사적인 총검술 교범들
4. 관련 문서

1. 역사

총검을 의미하는 Bayonet이라는 단어는 16세기 말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콩그레이브 사전 1611년판에서는 작은 포켓나이프를, 피에르 보렐(Pierre Borel)의 1655년 언급에서는 긴 나이프를 의미한다고 서술되었으며 이때까지는 총에 꽂아 쓰는 무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는 군인들이 많이 소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나이프를 총구에 꽂아 백병전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여러 사료에서 나타난다.

16세기부터 보병은 기병에 대항하여 총병을 보호하기 위한 파이크 창병이 총병과 함께 편제된 테르시오전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30년 전쟁에서 활약한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을 선두로 경포, 연대포 등 보병대열에서 직접 쏠 수 있는 경량 화포가 등장했고, 신뢰성이 좋은 플린트락 총기가 보급되면서 보병화력이 전체적으로 향상되어 17세기 후반에는 최대의 적이었던 기병의 위협 자체가 크게 사라진 시점이었다.

이렇게 되자 기병에 맞서 총병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해온 파이크의 필요성을 놓고 큰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쓸모 없는 창병을 유지하지 말고 모두 총을 줘서 화력을 크게 올리는 게 낫다는 논지.[1] 결국 루이 14세가 전장에서 창병이 창을 버리고 죽은 총병의 총을 주워다 쓴다는 보고를 받자 파이크를 폐지하고, 그 대신 총검을 제식화함으로써 유럽에서 군대의 주요 백병전 무기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총검은 착검하면 창과 유사한 무기가 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프파이크[2] 창술로 사용했고 집단운용이 기본이라서 무술로써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에페 검술을 기반으로 총검술을 재구성함에 따라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총검술 또한 에페, 플뢰레, 사브르와 함께 유럽 4대검술로 인정받았으며, 19세기 내내 중요한 과목으로써군대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훈련되었다.

2. 기술체계

이 항목에서 서술된 세부 내용은 19세기의 다양한 유럽 보병교범과 총검술 교범을 참고로 작성되었다.

2.1. 스텝(Step)

총검술의 스텝은 찌르기가 기본이고 에뻬 검술에서 나왔기 때문에 펜싱의 스텝과 매우 유사하다. 펜싱이나 세이버 검술, 창술과 마찬가지로 오른발과 왼발의 각도가 90도이며, 펜싱과는 달리 왼발이 앞으로 나온다. 왼발은 전방을 향하고 오른발은 90도 측면을 향하며, 적당히 벌려 안정감있게 서는 것이 기본 자세이다. 무게중심은 중앙 혹은 전방에 놓고 약간 낮추어 선다.

2.2. 자세(Guard)

총검술의 자세는 크게 나누어 4가지로 나뉘며, 에페 검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나 양손으로 잡는 긴 무기이기 때문에 창술과 공통점이 많다. 이것은 에뻬 검술과 창술이 똑같이 찌르는 검술이기 때문이다. 다만 근대 전쟁터의 환경에 따라 비슷한 자세라도 활용법이 조금씩 다르며, 자세한 자세는 아래와 같다.

2.3. 공격(Engaging)

하지만 개머리판 사용법이 적극적으로 연구된 것은 1880년 이후 탄창식 연발총의 개발이 이루어진 다음이었다. 이때는 과거처럼 완전한 대열을 이루지 않고 어느 정도 산개하여 전투했기 때문에 보다 다양하고 자유롭게 싸울 수 있었다. 또 이전에는 옆은 전우가 보호하므로 앞만 신경쓰면 되었지만 이제는 옆까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에는 무시되었던 개머리판 전투의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때부터 흔히 알려진 개머리판으로 쳐내고 후려치는 기술이 교범에 적극적으로 수록되기 시작한다.

2.4. 방어(Parry)

총검술의 방어는 크게 4가지로 나뉘며, 펜싱을 참고하여 개발되었으므로 펜싱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세인트 조지 방어는 원래 세이버 검술의 방어이나 일부 교범에 수록되어 있어 그대로 수록하였다.

2.5. 상황별 대응법

적과 나의 무기가 같을 때 막무가내로 찌르면 적과 나 모두가 죽음을 동시에 맞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총검술 교범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상대의 방어를 해지하는 법, 방어를 해지하려는 적에 대응하는 법, 공격을 방어하고 곧바로 반격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해당 예제는 다양한 교범에서 등장하는 내용을 통합-정리한 것이다.

상대의 미들가드를 제치는 방법
적이 나의 미들가드를 제치려 할 때의 대응법
적이 찔러들어왔을 때의 대응법
전술적으로 항상 적이 먼저 공격하는 것을 받아치는 것이 유리하며, 적의 빈틈을 잡기 위해 미들가드를 슬쩍 치운다던가 하는 여러 페인트(Feint)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

특정한 상황에서의 대응법

3. 총검술 훈련의 개요

총검술은 보병전술의 일부로써 명령에 의한 집단적인 전열 돌격, 이동, 전진 등의 요소가 가장 중요했다. 근대 총검술 교범에서 측면이동이나 방향전환과 같은 요소가 미약하게 다루어지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개인전술로써의 총검술 또한 상대의 정면에서 적의 총검을 제치고 찌르거나 적의 찌르기를 쳐내고 찌르는 등, 측면이동으로 상대의 옆을 잡아내지 않고 정면에서 대항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나, 현대 총검술과는 달리 개머리판을 크게 중시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러한 18~19세기의 전술 때문이었다.

따라서 집단 전열을 이루고 하는 제식훈련이 사격과 총검술 모두에서 가장 중요했다. 제식훈련을 제외한 총검술 훈련은 기본적으로 스텝 훈련, 자세와 기본동작, 그리고 표적을 만들어 제자리에서 혹은 돌진하면서 찌르는 훈련이 가장 많이 행해졌고, 2인1조로 수행하는 컴비네이션 훈련은 그 비중이 낮은 편이었다. 공격과 방어를 하나의 연속기로 재구성하는 훈련을 시키기는 했으나 그것도 혼자서 하는 카타방식의 훈련이었다.

즉 총검술 훈련은 에페 훈련을 토대로 개발되어 그 수준은 나쁘지 않았으나 실제 보병훈련에서는 저돌적인 정신무장과 돌격성을 기르는 데에 중점을 두었지 상대의 총검에 대응한 방어-반격법 훈련에는 그렇게 큰 비중을 두지 않았는데, 대규모의 병력을 빨리 훈련시켜 내보내는 데에 있어서는 이 점이 차라리 합리적이었다.

집단제식훈련이나 1인1조의 기본동작 훈련, 물체 찌르기 훈련에는 실총과 진짜 총검을 사용했고, 2인 1조의 형 수련 및 대련에서는 트레이닝 바요넷을 사용하였다. 상세는 해당 항목 참고.

3.1. 다른 무기와의 전투-대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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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slington Tournament - the Graphic (3rd July, 1880)
그러나 앨프리드 허턴의 경우 총검은 5kg에 달할 정도로 무겁고, 양손으로 잡으므로 중량모멘텀과 컨트롤, 리치에서 우위가 있으며, 장검으로 막고 치려고 해도 총검의 무게와 두손으로 잡는다는 점 때문에 쉽지 않으며, 장검이 막고 반격하더라도 총검이 힘으로 제쳐버릴 수 있다는 점, 이 점을 이용하여 검이라면 반격의 위험 때문에 할 수 없는 한번의 런지에 두번의 찌르기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유효하다는 점을 들어, 총검 사용자가 불리할 것이 없음을 역설하였다.
허턴은 이러한 점을 들어 장검이 총검을 이기려면 보통걷기(Passing step)으로 몸의 왼쪽을 앞으로 전진시켜 총검을 잡아채면서 공격하는 것을 추천하였고, 총검이 장검을 이기기 위해서는 휴턴이 주장한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검객이 자세를 바꿀 때마다 연속 찌르기를 가하고, 특히 왼손을 놓는 랜스 포인트는 연속공격이 어렵고 두손으로 잡는 장점을 잃어 검객의 반격에 당하기 쉬우니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7]
20세기 중일전쟁에서도 중국군이 근접전용으로 기관권총과 함께 항일대도를 애용하였으며 군벌 펑위샹이 지휘하는 서북 29사단을 중심으로 소림권의 김은충, 응조번자권의 유법맹 등의 여러 무술인들이 일본군의 총검술에 대항하는 대도술을 정립 발표하였다. 일본도로 장창에 대항하는 법을 수록한 명나라의 단도법선을 재구성한 파봉팔도라는 기법도 존재했다. 가장 잘 알려진 김은충의 실용대도술을 보면 짧은 검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총검이 먼저 찔러오게 유도하면서 이것을 쳐내거나 흘리면서 빈틈을 만들어 베고 찌르는 방식으로 끝내는 방식이다.

3.2. 근대와 현대 총검술의 차이점

근대 총검술은 머스킷 총기의 느린 장전속도와 낮은 명중률 때문에 발생한 전열보병 전술에 맞춰 형성되었다. 대열을 짓고 싸우면 측면이 동료 병사에 의해 보완되었기 때문에 전방에서의 싸움이 중요해서 최대 2m를 넘기는 총과 총검이 등장했으며, 자유로운 방향전환과 측면이동은 가르치지 않고 오직 전방으로 전진하는 보법과 상대의 겨눔세를 쳐내는 것이 중심이었다. 또한 찌르기가 우월하다는 당시의 인식에 따라 베기를 배제하고 찌르기에 치중한 총검과 총검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현대 총검술은 1870년 이후부터 태동하였다. 이때는 금속 탄피와 함께 고정식 탄창의 도입으로 연사력이 크게 늘어났으며, 그에 따라 나폴레옹 시대의 라인배틀에서 벗어나 산개하여 싸우는 산병전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었다. 과거에는 측면은 전우가 보호했으므로 개머리판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개머리판으로 치려다가 옆의 전우의 얼굴에 총검을 들이댈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산개 전투가 점점 본격화되면서 자신의 측면까지 스스로 지켜야 했으므로 과거에는 신경쓰지 않은 개머리판 전투 기법이 연구되었고 현대 총검술의 뼈대는 19세기 말에 이미 대부분 정립된다.

여기에 1차대전의 전훈으로 고색창연한 총검돌격보다는 휴대성에 집중하면서 보병의 소총은 19세기 말 1.3m에서 1~1.2m로 줄어들었다. 길이가 짧아지면서 총검술은 복싱의 스텝등을 도입하고 방향전환과 측면이동을 중요하게 가르치고, 찌르기 위주의 기존 방식에서 베기, 개머리판 사용의 비중이 높아졌는데, 전방뿐만 아니라 측면, 후방에도 적이 있을 것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총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쓰기 보다 자유로워졌으며 총검에만 집중하는 기술에서 벗어나 총 전체를 무기로 보는 관점이 새롭게 발생하였다.

새로운 전쟁터에 적응된 신예 총검이나 총검술을 가지지 못한 군대의 예가 일본군소련군이다. 일본군은 둘 다 가지지 못했는데, 일례로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유지되던 고리타분한 19세기식의 긴 총검과 총검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총검이 길다는 이유로 백병전에서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으며 개머리판을 배제하고 총검 끝으로만 찌르며 중단 싸움을 위주로 가르치는 옛날 방식 그대로였다.[8]

이런 방식은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면서 영미 식민지 주둔군, 영미 정규군과의 싸움에서 그 한계를 노출하게 된다. 간격을 넓게 잡는 2차대전의 전쟁터에서 대열을 짓고 싸우던 시절의 방식을 유지한 일본군 총검술은 측면 대응과 방향전환, 근접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현대전은 물론 19세기 후반에 비추어봐도 부족한 총검술 체계였으며 길게 찌르는 것만 알던 일본군은 영국/미국 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총검술 연구에서 피하고 달라붙어 두들겨패는 영연방군의 역량 앞에 참담하게 깨졌고, 이에 놀란 대본영이 육군부 전훈보고 제 6 호「영/미국병의 백병전투에 관한 관찰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과달카날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도 미군은 일본군과의 백병전에서 밀리지 않고 오히려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소련군 역시 마찬가지이긴 했는데, 소련군의 경우는 더럽게 춥기 짝이 없는 겨울철 기후로 인해 옷을 하도 두껍게 입다 보니, 짧은 서구식 나이프형 대검으로는 잘 뚫고 들어가지 못해 적을 사살하거나 중대한 상해를 입히는 것이 매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근대식 스파이크 총검을 사용했으나, 결국 SVT 등의 반자동 소총을 만드는 과정에서 독일군과 비슷하게 코트를 뚫고 깊게 찌르기 좋으면서도 여러군데 쓰기 좋도록 날을 길쭉하게 만든 형태의 일반 나이프형 대검을 뒤늦게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백병전보다 화력전을 더 추구하게 되면서 서구 총검과 비슷하거나 심지어는 더 짧은 놈도 나왔다.

이러한 전훈들을 통해, 결국 병사들 사이의 간격이 충분하고 개인 호신으로써의 요소가 더욱 중요하며, 어려운 것만 줄창 훈련시키다 시간 다 까먹고 전쟁 지기보단 차라리 일상 생활에도 군사적 요소를 녹여내거나 혹은 쉬운 것만 훈련시켜서 단시간에 대량의 병력과 거기에 맞춰 만들어진 단순하고 값싼 장비를 대량으로 만들어내 들이부어 적을 압도하는 것이 더 낫다는게 전쟁을 통해 증명된 데다가, 애초에 막강한 포병화력과 공습 스팸질로 상대방이 백병전을 걸어올 엄두도 못내게 만드는 것이 보편화된 현대의 전장에서는 화려한 구시대 총검술보단 쉽고 빠르게 많은 인원들에게 교육할수 있는 단조로운 형태의 현대 총검술과 더불어 근접 살상은 물론이고 투척 살상과 요리, 도구 제작, 포위나 침투 등 보급이 끊기는 고립상황에서의 식량 확보를 위한 사냥과 도축 및 가죽 가공, 개인위장은 물론 건축 분야인 참호 축성 및 은거지 설치(중 위장용 나뭇가지 확보와 가공)에까지도 쓸수있는 뛰어난 범용성을 가진 나이프형 대검이 더욱 적절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3.3. 역사적인 총검술 교범들

A treatise on the science of defence for the sword, bayonet, and pike, in close action (1826)
The rule of bayonet fighting training for infantry (1838)
Henry Charles Angelo - Angelo's Bayonet exercise (1853)
A Complete System of Bayonet Exercise(1853)
Esgrima de bayoneta - Galvez de zea (1855)
"Reglement sur l'exercice et les manœuvres des regiments d'infanterie de carabiniers et de chasseurs a pied" (1860)
Skirmishers' drill and bayonet exercise : (as now used in the French army) with suggestions for the soldier in actual conflict (1861)
George Brinton McClellan - Manual of bayonet exercise : prepared for the use of the Army of the United States (1862)
Company drill etc. with Bayonet Fencing - Monroe (1863)
Instruction pour l'enseignement de la gymnastique, de la natation et de l'Escrime a la baionnette (1873)
Sabre, Singlestick, Sabre and Bayonet - Waite (1880)
Bayonet fencing and sword practice - Captain Alfred Hutton (1882)
Fixed Bayonets - Captain Alfred Hutton (1890)
Manual of Bayonet Exercises, United States Army (provisional) 1907 (1907)
Notes on bayonet training : compiled from foreign reports (1917)
Notes on bayonet training, no. 2 : adapted from a Canadian publication (1917)
Elements of Trench Warfare: Bayonet Training NO.1(1917)
Elements of Trench Warfare: Bayonet Training NO.2(1917)
FM 23-25 Basic Field Manual Bayonet, M1905 (1940)
FM 23-25 Bayonet (1943)

4. 관련 문서



[1] 프랑스에서 파이크 옹호론자였던 자가 삼총사의 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인 총사대장 달타냥이었다.[2] 파이크의 절반 길이의 창, 2~3m정도 되며 파이크 창술과 똑같이 사용했다.[3] M16 소총으로 시전하는 교범이 존재한다.[4] 로우 가드 자세를 하는지는 불명이나, 적어도 총기를 좌하부로 기울인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얼추 비슷한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좌하부를 막고 나서 바깥으로 제쳐내고 틈을 만들면서 반동을 이용해 때려야 하는데, 때려 자세에선 로우가드처럼 총이 뒤집어져 있기 때문에 동작이 끊김 없이 자연스럽게 바로 이어지려면 좌하방을 방어하는 자세에서 로우가드 혹은 그 비슷한 자세가 나와야만 하기 때문이다.[5] 폐지되긴 했으나, 아래 것들도 다 그렇지만 아직 자대 도서관에 교범이 남아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6] 소드-바요넷 한정. 착검시 베는 날이 옆을 향하기 때문에 총을 눕혀서 베어야 한다.[7] 한마디로 무기가 강한 게 아니라 장점을 더 유용하게 쓰는 사람이 강한 것이다.[8] 일본군 1934년 교범을 보면 1차 상해사변(1932)에서 겪은 고난을 바탕으로 근접격투(개머리판 전투와 주먹질), 이종격검(군도나 단검같은 다른 무기와 대련) 등의 방법이 수록되었으나 여전히 훈련의 중심은 목총과 호구를 사용하는 찌르기 대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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