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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6 12:44:43

스몰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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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sword, Small sword. 18~19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 퍼져나간, 레이피어의 후계 도검.
1. 개요2. 기원3. 레이피어와의 차이4. 검술5. 근현대 펜싱 도검으로의 변화
5.1. 관련 문서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레이피어를 좀 더 짧고 가볍게 만든 검.

2. 기원

총기의 발달로 인해 검투의 비중이 줄어들고 검을 사용한 결투 문화가 소수의 전유물로 바뀌어 가는 데다 결투에 아예 총을 쓰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무겁고 긴 레이피어를 상시 휴대할 이유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즉 검을 실용적인 이유로 가지고 다닐 필요 자체가 사라졌다. 하지만 18세기까지만 해도 신사의 복식을 제대로 갖추려면 당연히 칼을 차야 했고, 18세기 내내 그런 의식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서 검은 차야 하지만 평상시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볍고 짧은 장식적인 물건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court sword나 dress sword, 불어로는 épée de cour 등, 장식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것이 바로 스몰소드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대의 넥타이가 원래 땀을 닦던 수건이 변화된 것과 비슷하게 실전을 위한 진검이 장식화된 것이라 칼자루와 칼집이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말 그대로 장식용 검이었기 때문에 칼날은 대체적으로 짧았다. 칼날 길이가 40cm 정도의 좀 큰 단검 수준에서부터, 31인치(약 81cm)의 비교적 큰 것들도 있었으나, 군인이 아니면 대부분 짧은 것을 차고 다녔다.

초창기 베르사유 궁전에는 일반 시민들도 사사로이 입장하여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대신 출입 이전에 의관을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궁전 앞에서 정장의 필수 요소인 스몰소드를 대여해 주는 가게들도 성업할 정도였다. 사실 이는 베르사유 궁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궁정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했다. 당시 궁정은 사교의 장이기도 해서 엄청난 사람들이 출입했는데, 일일이 신원을 확인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1]. 따라서 문지기들이 확인하는 것은 당시 신사숙녀의 복장을 제대로 갖추었는가 정도였고, 스몰소드가 바로 그 복식 기준 중 하나였다. 평민들도 복장만 제대로 갖춘다면 얼마든지 왕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단지 왕이 거주하는 내실에만 사사로이 출입할 수 없었을 뿐이다.[2] 보안이나 경호의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이게 뭔 미친짓인가 싶겠지만, 그 복식을 제대로 갖춘다는것 자체가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라 그것만으로도 사회 엘리트층에 속한다는 신분보장이 어느 정도는 된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의복 문화에서 칼을 정장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19세기에는 지팡이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이와 함께 스몰소드 패용 문화도 종말을 맞는다. 이 때부터 신사의 덕목인 결투가 전용 결투검인 에페를 사용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스몰소드에 대해 흔히 하는 오해는 이 에페 시대 이후의 경향을 과거에도 그랬다고 받아들이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스몰소드가 사회에서 사라진 후에도 군인 계급은 예식검으로써 항상 차고 다녔다. 현대 군대에서도 정복에 스몰소드를 패용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영국 해군으로 해군 장교 특성상 함내에서 근무하거나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덕분에 아직도 화려한 옷과 장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영국 해군장교들은 지금도 항상 장식검을 패용한다.[3] 장식검 특유의 근엄하고 화려한 이미지 탓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19세기 군대가 실전에 나설 경우에도 참모장교나 의무장교와 같은 비전투병과 장교들의 제식검이 스몰소드인 경우도 있었다.

3. 레이피어와의 차이

레이피어는 스몰소드에 비해 정말로 실전용이었다. 당대의 민간 검술계에서 좁은 도심 속에서 베기성능을 갖춘 기존의 롱소드가 너무 크고 거추장스러워 실전에서 쓰이지 않게 되고, 16세기에 군용도검인 사이드 소드가 민간에서도 유행했으나 어차피 도심지의 좁은 골목에서는 베기성능을 추구하기보다는 칼날을 가볍게, 길게 만들어 먼저 찌를 수 있게 하자는 생각에서 점차 찌르기에 특화된 아주 긴 변형 사이드소드가 등장했다. 이것이 바로 레이피어였다.
그렇기 때문에 힐트 포함 150cm나 되는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것도 있었으며, 이탈리아식은 칼날의 길이만 42인치(약 1m)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칼집이 너무 뒤로 튀어나와 이것끼리 부딪치는 걸로 시비가 걸려 사소한 일로도 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사이드소드와 버클러를 차고 이걸 요란하게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다니는 양아치, 스워시버클러(Swashbuckler)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치안이 너무 나쁘고 호신무기로 빠르게 쓸 수 있는 화기인 휠락 권총은 너무 비쌌고, 도시에 따라서는 아예 시내 소지 자체를 금지하는 곳도 있었기 때문에 호신무기로 레이피어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으로 넘어가면 유럽의 도시 치안도 안정되고, 부싯돌식 발화장치를 갖춘 화기들도 등장했다. 따라서 굳이 크고 거추장스러운 레이피어를 차고 다닐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신사라면 당연히 칼을 차야 한다는 의식 구조는 여전했으므로 가볍고 편한 것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스몰소드는 칼날이 매우 짧고, 베는 날이 아예 없거나 사실상 장식 수준으로 날을 갈지도 않은 것들이 많았다. 손잡이도 크고 풍성한 레이피어의 방어 기제와는 달리 매우 간소한 쉘가드만 갖춘 것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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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소드와 유사한 디자인을 갖춘 군사 도검으로 스패드룬(Spadroon)이 있다. 힐트 디자인은 스몰소드의 간소한 형태 그대로지만, 칼날은 실전을 위해서 31인치(약 81cm)정도로 길고 베기도 가능하게 만든 타입이었다. 베기가 가능한 군사 스몰소드로 볼 수 있다. 이 스패드룬은 프랑스에서 등장하고 특히 유행했으며, 영국과 미국에서도 군용으로 채용되었다. 무엇보다 당대의 무거운 세이버&브로드소드보다 가벼웠기 때문에 독특한 퍼포먼스를 가진 군용검으로 알려졌다. 영국의 검술 마스터 존 테일러(John taylor)는 자신의 브로드소드 검술서에서 특별히 스패드룬을 따로 다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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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 아직 스몰소드로 군용검을 상대할 가능성이 있던 시절에 등장한 디자인 중 하나로 콜리슈마르드(Colichemarde)가 있다. 스몰소드는 뻣뻣하고 폭이 좁은 칼날을 가져서 크고 넓은 군용검의 베기를 받아낼 경우 매우 쉽게 부러졌다. 이 때문에 칼날을 받아내는 Forte(손잡이에서 칼날 중간까지의 부분을 지칭) 부분을 넓게 만들어 군용검의 베기에도 버티게 만든 디자인이다. 하지만 민간용 도검이었던 스몰소드가 군용검과 교전할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실용적인 이유보다는 독특한 칼날 형상 디자인이 개성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잠깐 유행하였다.

4. 검술

스몰소드와 그 운용법과 비교한다면 레이피어와 레이피어 검술은 그에 비한다면 실전적이라는 인식이 있다. 비교를 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레이피어가 스몰소드 이전에 험난했던 르네상스 시절에 민간 호신 겸 결투의 용도로 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레이피어도 한창 현역 일 때는 찌르기에 올인한 도검으로는 르네상스 검술의 원리로 완벽하게 몸을 보호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이를 근거로 레이피어를 비난한 마스터 중에는 영국의 조지 실버가 있다. 르네상스 검술은 방어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가능하면 상대를 공격하며, 쳐내거나 막기보다는 바인딩을 하여 타고 들어가 밀어내면서 한순간에 이기는 것을 중시한다. 또 이를 위해 한타임 공격, 양발이 좌우로 자유롭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 등이 특징이었다.[4]

레이피어로 르네상스 검술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패 전승을 기록한 "살인자 검객" 카포페로 같은 예도 있으나, 대부분은 제대로 못하거나 적용하더라도 찌르기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동시에 찔러 둘다 죽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이것이 조지 실버가 레이피어를 증오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도 레이피어는 칼이 길어 바인딩 자체는 어렵지 않아 하려고 한다면 르네상스 검리대로 싸울 수 있었으나, 칼날이 훨씬 짧아지고 가벼워진 스몰소드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이탈리아 다르디 스쿨에서도 두박자 기법이 태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17~18세기 전반의 많은 마스터들에 의해 스몰소드에 맞는 정식 검리로 체계화된다. 바로 여기서 현대 펜싱의 검리, 근대 군사 예술의 검리의 근본이 형성된다.

짧은 스몰소드로는 바인딩을 유지하며 한 타임으로 찌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너무 빨랐기 때문에 상대의 칼을 먼저 쳐내거나 막은 다음 반격을 가하는 패리&리포스트 검리가 중심으로 확립되었다. 또 항상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오른발이 앞에 나와 있도록 하고, 위험을 대비하여 항상 원거리를 유지한다. 이 원거리에서 빠르게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간격으로 들어가고, 다시 빠져나와 거리를 벌리기 위한 독특한 보법인 런지&쉬프트(Lunge&shift)가 등장하였다. 오른팔은 런지할 때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뒤쪽으로 들어올리거나(프랑스식) 상대 칼을 잡아채기 위해 칼과 같이 앞으로 뻗는다.(이탈리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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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스몰소드 검술은 시대의 변화로 더 이상 르네상스 시절의 검을 사용하지 못하고 작고 가벼워진 검으로는 르네상스 검리를 통해 검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면서 태어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칼만 가지고 챙챙대지는 않았고 스몰소드를 연구했던 도미니코 안젤로, 무슈 라바 등의 마스터들의 서적을 보면 과거 르네상스 시절 처럼 왼손에 단검, 모자, 심지어는 랜턴 들기, 칼 잡아 채기, 가까이 붙어 칼을 빼앗기, 유술기, 심지어는 찌르기를 한 다음 드롭킥(...)을 하는 기술까지 수록되어 있어 스몰소드로 할 수 있는 실전은 뭐든지 다 하도록 되어 있다. 칼만 가지고 챙챙대는 게 완전히 굳어진 건 19세기, 검술 결투가 매우 의식화 되어버린 후에나 있던 현상.

실전만 놓고 보면 레이피어나 롱소드가 훨씬 우월한데도 스몰소드 검술이 크게 유행한 이유는 호신술의 딜레마 때문이었다. 롱소드나 레이피어는 17세기 후반~18세기의 유럽에서는 경찰이 따라오거나 사람들의 경계를 받았기 때문에 항상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호신 상황은 불시에 갑자기 일어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당장 몸에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냥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몰소드는 신사들이라면 하루 종일, 당연히 차고 다니는 물건이었으므로 바로 이 스몰소드를 이용한 호신술이 각광을 받은 것이다. 18세기 내내 스몰소드 도장이 성업하고 유행한 것은 스몰소드가 정장의 필수였던 당시의 복식 문화 탓이 컸다.

같은 이유로 복식 문화에서 칼이 제외된 19세기에는 스몰소드 도장들은 빠르게 폐업하고, 길거리 호신 검술이었던 스몰소드 검술은 결투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에뻬와, 몸싸움을 배제하고 피만 나면 되는 의식화된 규칙으로 운용되는 귀족간의 결투에 의지하여 간신히 명맥만 잇게 되고, 그나마도 퇴보한다. 더이상 아무도 차고 다니지 않는 무기는 호신술의 딜레마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대신 19세기에는 새롭게 신사의 복식 요소로 등장한 지팡이를 사용하는 지팡이 무술이 큰 유행을 타게 된다.

정리하자면 스몰소드란 장식용 도검이 호신을 겸하게 된 검이다.

5. 근현대 펜싱 도검으로의 변화

19세기에 이르러 스몰소드가 복식에서 폐지되고 지팡이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스몰소드 검술은 빠르게 쇠퇴한다. 하지만 여전히 귀족 젋은이들은 결투로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만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의식화된 결투 문화가 지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공교롭게도 이 결투 문화 덕분에 소멸해야만 했던 스몰소드 검술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서로 죽고 죽인다는 잔혹한 분위기가 남아 있었으나 점점 온건화되면서 먼저 피를 본 쪽이 패배하는,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룰이 정착된다. 이에 따라 스몰소드는 결투용 도검, 에뻬(Épée)로써의 변화를 겪게 된다.

먼저 손을 보호하는 컵가드가 대형화되었다. 스몰소드는 항상 차고 다녀야 하고 기본적으로 장신구였기 때문에 방어장치를 크게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뻬는 평소에 차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결투때 특별히 준비하는 것이었고, 퍼스트 블러드 룰에서 손은 중요 자격부위가 되었고 쉽게 맞았기 때문에 사소한 상처도 나지 않도록 커다란 컵가드를 준비한 것이었다. 또 원래 스몰소드가 매우 짧았던 반면 에뻬는 칼이 매우 길어졌다. 또 실전이 아니기 때문에 상황이 험하게 돌아갈 여지가 있는 유술기를 폐지했다. 칼날의 경우 정말 찌르기 외에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삼각형으로 만들어 사실상 날을 없앴다. 이렇게 하게 되면 날을 굉장히 얇고 길게 만들수 있는데다가 어느쪽으로든 쉽게 낭창낭창 휘어지는걸 방지하게 되므로 더욱더 빠르고 정확한 긴 찌르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대급부로 베기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완전한 결투특화 무기로의 진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으로 작고 간소하며 짧았던 스몰소드는 길고 거추장스러운 형태의 에뻬로 변화하게 된다.

여기서 현대 스포츠 펜싱의 종목의 기원이 이루어진다. 먼저 고전 스몰소드를 사용하는 검술 훈련을 스포츠화시킨 것이 플뢰레이다. 원래 스몰소드 훈련 도구였던 플뢰레를 이용, 검술 훈련방식에 따라 우선권(right-of-way)을 강제로 규정하고 동시공격은 무효, 반드시 막고 반격하는 형태를 갖춰야만 점수를 인정하며, 서로 달라붙는 Corps a corps를 반칙으로 규정했다.

에뻬는 실전 결투를 스포츠화시킨 것이다. 18세기의 완전한 실전 검술은 아니지만 19세기의 결투를 시뮬레이션하여 스포츠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우선권을 따르지 않고 동시에 찔렀어도 점수가 인정된다. 결투에서는 둘다 찌르면 피를 보긴 하기 때문이었다. 또 결투에서 가끔 몸끼리 부딪치는 것을 고려하여 Corps a Corps가 발생하더라도 고의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라면 반칙 선언을 하지 않고 떼어놓은 다음 그대로 속행한다.

고전 진검술은 플뢰레 종목으로, 결투 실전은 에뻬 종목으로 구분하여 스포츠화된 것이 바로 지금의 스포츠 펜싱의 기원이다.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Small_sword
http://en.wikipedia.org/wiki/Épée
http://en.wikipedia.org/wiki/European_dueling_sword
http://www.thearma.org/Youth/rapieroutline.htm

5.1. 관련 문서

6. 대중매체에서


[1] 물론 왕의 지척까지 접근하는 것은 신원이 분명하고 왕의 신뢰를 받는 극소수만 가능했다.[2] 다만 루이 14세는 특유의 엄청난 쇼맨십 본능으로 인해 여타 군주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사생활을 가감없이 공개하였다. 심지어 왕비가 출산할 때도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구경했을 정도다.[3] 사실 영국 육군 장교들도 중요한 행사일 경우에는 패용하는 경우가 있고, 고위 외교관들도 제복을 입는 중요한 공식 행사에서는 아직도 패용한다. 런던탑의 행정을 총괄하는 사령관도 공식행사때마다 칼을 차고 나온다.[4] 몇몇 서적에서 레이피어 검술이 오른발과 왼발의 각도가 90도이며 발꿈치가 같은 선상에 위치한다고 말하기도 하나,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생긴 문제이다. 레이피어 검술서 대부분은 양발 사이의 간격이 있으며 발끝을 축으로 움직이며 모든 삽화에서 45도 내지는 135도의 발 각도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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