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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21:57:51

아키야마 요시후루

제10대 교육총감
아키야마 요시후루
秋山好古 | Akiyama Yoshifuru
파일:attachment/아키야마 요시후루/Yoshifuru.jpg
<colbgcolor=#b0313f><colcolor=#fff> 출생 1859년 2월 9일
이요국 마츠야마성 조카마치
(현 에히메현 마츠야마시)
사망 1930년 11월 4일 (향년 71세)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육군군의학교
(현 도쿄도 신주쿠구)
재임기간 제10대 교육총감
1920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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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본명 요시후루(好古)
통칭 신자부로(信三郎)
형제 아키야마 사네유키 외 3남
배우자 다미
학력 오사카사범학교 (졸업)
육군대학교 (1기)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구3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879년 ~ 1923년
최종 계급 대장
주요 보직 육군기병실시학교장
육군수의학교장
청국주둔군사령관
기병제1여단장
제13사단장
근위사단장
조선주차군사령관
교육총감
주요 참전 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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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일화4. 교육자로서의 삶5. 조선과의 관계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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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육군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대장. 종2위, 훈일등 공2급 수훈자이다.

일본에서 '제병협동체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사실상 무시되고 있던 일본 육군 기병대에 기병포와 기관총을 도입한[1] 선진적인 지휘관이다. 러일전쟁봉천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육군 기병을 빈약한 일본군 기병대로 맞서 이겨낸 장군으로 유명하다. 그후 일본 육군 대장, 최고 3요직 중 하나인 교육총감과 군사참의관 겸직을 끝으로 전역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사립 중학교 교장이 되어 군인에서 교욱자로서 경력을 마친다.

전후 일본의 육군기병학교를 방문한 한 프랑스군의 육군 장교는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일생이란 만주벌판에서 세계 최강의 기병대인 코사크 기병대를 상대로 맞서싸워 승리한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고 말했을 정도다. 일명 일본 기병의 아버지.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조선 주둔군 사령관 이기도 했다.

친동생으로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 真之) 제독[2]이 있기에 군인가문 가족이 되었다. 동생인 사네유키도 같은 러일전쟁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의 작전 담당 선임참모[3]로 출전, 쓰시마 해전에서 이른바 7단 전법을 채용하여 함대 전체 전략을 세우고 도고에게 정자전법(丁字戦法)을 제안하여 러시아 제국발트 함대를 격멸하는 공로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시코쿠의 이요 마츠야마에서 출생, 원래는 3남이었으나 형들이 병들어 아키야마 가문의 호주를 승계했다.

대대로 마츠야마에 살았던 하급무사 출신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중 목욕탕의 청소부로 살았을 정도. 이후 16세 되던 해 오사카로 상경, 당초 교사를 지망하여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소학교에서 근무하였으나, 1년이 채 안되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 2년 후에 육군 기병 소위로 도쿄 진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일본 육사는 보병과 기병, 포병, 공병의 네 개 병과 중 1개를 택할 수 있었는데, 보병과 기병은 2년, 포병과 공병은 3년의 교육 기간을 마쳐야 했으므로, 가정 사정이 좋지 않아 빨리 임관해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병을 택했다고 한다.

1883년에 새로 창설된 육군대학에 단 10명밖에 뽑지않은 1기생으로 입학, 2년 뒤에 졸업하고 참모본부에 배속되었다. 1887년에는 이요 마츠야마의 옛 번주 가문의 당주인 히사미쓰 공을 수행하여 프랑스로 유학, 4년간 유학하며 근대적인 기병전술을 습득했다.
파일:attachment/아키야마 요시후루/Yoshifuru_France.jpg
프랑스 유학 시절
이후로 주로 후방에서 기병의 양성에 힘쓰다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 각각 종군, 특히 러일전쟁에서는 육군소장으로 소위 아키야마 지대로 알려지는 육군 제1기병여단을 중심으로 하는 전투부대를 이끌고 사하 회전과 흑구대 회전 등의 굵직한 전투에서 러시아의 우세한 기병대에 맞서 선전, 일본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1916년에는 조선주차군 사령관, 같은 해 육군대장으로 승진하고 1920년에 일본 육군 3대 요직 중 하나인 교육총감으로 영전, 원수직을 눈앞에 두었으나 1923년에 돌연 퇴역하고 이듬해 현재의 마츠야마 북고교에 해당되는 사립 북여 중학교에 교장으로 부임, 1930년까지 근무하다가 같은 해 11월 4일, 임종직전 “봉천으로...!”라는 말을 남긴 채 당뇨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71세. 가족들에게는 따로 남길 말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고향 에히메현 마츠야마시에 있는 도고온천 뒤쪽의 시립 사기타니(鷺谷) 묘지에 묻혔다. 윤봉길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사한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 대장도 여기에 묻혔다.

3. 일화

4. 교육자로서의 삶

전쟁영웅임에도 불구하고 군인이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꼈고, 군인이 정치에 손대는 것에도 반대했다고 한다. 중학교 교장 시절에도 "학생은 군인이 아니다"라며, 그 무렵 상례처럼 된 군사교련을 탐탁지 않아 했고, 학생들의 전인교육을 중시했다고 한다. 교장 취임 때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러일전쟁의 일을 얘기해 달라.", "일본제국육군 대장의 군복을 보여 달라."라고 부탁받아도 일체 사절하고 무훈을 과시하는 일은 없었다.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강당을 세우고, 당뇨에 거동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접 걸어다니며 학생이나 시민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는 등 먼저 본을 보이는 교장이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유리창 파손이나 등록금 체납 등이 크게 개선되었다.

교장 시절 학생들의 견문을 넓히려는 목적으로 조선으로 수학여행 보낸 적이 있다. 평양까지 다녀오게 했다고. 말년의 대공황 때 국제협력을 강조하고, 홋카이도를 예로 들며 덴마크의 농업을 본받아야 한다거나, 제플린 비행선과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등 상당히 국제지향적인 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받는다.# NHK 다큐멘터리를 인용한 해당 링크에서 그의 말이라고 언급되는 것이 유명한 칸트의 '북극성과 도덕률'인 것을 보아, 확실히 교양지식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군복 시절 사진을 판매하려는 학교 관계자에게 '난 중학교 교장이다. 위계나 훈장 같은 이야긴 필요 없다. 그런것 팔지 말라.'고 호통쳤다 한다.# 해당 일본 블로거의 링크에는 그의 전기 등에서 발췌한 교장시절과 말년에 대한 훈훈한 이야기가 많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 사람들이 도쿄를 불태우려고 했던 것은 생각할 수 없다."[7]라고 말하거나, 조선으로의 수학여행 자체가 이례적이며 학생들이 감상이 호의적인 것으로 보아 조선에 동정적이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 일본 기사 이건 학생 훈시 내용인데, "유언비어가 퍼지는 것은 정신 단련이 부족하다는 표현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고.

한국 인터넷에서 일부 떠도는 정보#에 의하면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하거나, 한중일이 서로 도와 서양 세력을 막아야한다는 일제의 명분을 신봉했다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많아 결과적으로 근거는 부족하다.

대표적으로 오늘의유머 등에 알려진 떡밥의 원 소스는 일본 유학중인 블로거 차수정#의 글인데, 현재로서는 신뢰하기 어렵다. 아래의 내용을 보아 NHK 등에 방영된 그의 교장시절의 언급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당시 일본군 내에서 상당히 깨어있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5. 조선과의 관계

사실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 인물이 알려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이 인물이 진격의 거인에 등장하는 도트 픽시스라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라는 점인데, 당시 이를 두고 굉장히 논란이 많았다. 해당 인물이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활약한 장군이기에 우리나라에 해를 가한 전범이 아니냐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8] 진격의 거인이 우익 논란이 처음 제기된 이유도 이 인물 때문이다.

하지만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 전범 장군의 모습이 아니다. 앞에 설명되어 있는 내용들과 함께 부연 설명하자면,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그 당시엔 굉장히 조선에 우호적이고 인물상이 괜찮은 장군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직접 능동적으로 조선에 어떠한 해를 끼친 인물이 아니나 그가 활약한 러일전쟁이 일제강점기의 단초인 것은 맞다.

일단 아키야마 요시후루가 직접 조선인을 괴롭히고 박해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키야마는 당시 일본군 장성 중 오히려 정상적이고 양심적인 장군[16][17]이었다. 당시 일본에서의 '군인'은 직임 내내 여러모로 조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는 조선을 박탈하거나 학대했다는 사건은커녕, 오히려 조선을 우호적인 발언과 행동으로 두둔하였던 장군이다. 물론 아키야마가 일본 제국군 당시 장군이라는 직책에 근무지가 조선으로 발령나서 근무한 이력때문에 한국인한테 좋은 시선은 받을수 없으나 그가 조선에 있어 호의적인 입장을 보인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충분히 재고할 만한 일이다. 이 인물을 존경한다고 해서 논란이 된 이시야마 하지메 작가도 그저 인물상 됨됨이를 존경한다고 했지, 전쟁 업적을 존경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즉, 아키야마는 조선에 능동적으로 해를 가한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조선을 두둔한 경황까지 있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복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인으로서는 그를 굳이 나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성향과 상관없이 아키야마는 인물상 자체가 뛰어나며 러일전쟁에서 세계최강의 기병대라고 소문난 '코사크 기병대'를 악조건 속에서 이들로부터 승리를 따낸 명장에 속하기 때문에 극우 혐한이 아닌 이상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일본 내에서 많다.

6. 대중매체에서


[1] 소설 언덕 위의 구름 등의 영향으로 아키야마 요시후루가 일본 육군에서 처음으로 기관총을 도입한 인물로 여겨지곤 하지만 실제 일본 육군은 러일전쟁 이전부터 기관총의 전술적 가치에 주목하여 프랑스의 호치키스 기관총을 면허생산하고 있었다.[2] 전후에는 해군 군무국장 등 최요직 역임 후 질병에 의해 최종 계급 중장으로 퇴역[3] 전쟁 당시 계급은 중좌[4] 적에게 기동력을 살려 타격을 가하는 것이 기병의 궁극적인 역할이고, 그러기 위해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병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5] 홍구 공원 천장절 당시 윤봉길의 물병 폭탄에 의해 죽은 바로 그 인물이다.[6]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배려로 유학 시절 프랑스 고급군인에 동행할 일이 있었는데도 역시 술에 취해 기차에서 마구 졸았다가 날치기를 당했다 한다(...).[7] "조선인이 방화했다든가 우물에 독을 던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그의 선견지명 등에 대해서도 거론한 기사)[8] 하지메가 아키야마를 직접 존경한다는 포스트를 쓴 정황이 발견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9] 그 대표적인 헌병대의 사령관이 '이토 히로부미'로, 우리가 이토를 비판하는 이유중 하나.[10] 헌병대 뿐 아니라 조선군 자체가 식민통치에 직접 관여한 시기가 있기는 한데 그건 3.1운동 무렵의 일이다.[11] 물론 조선 주둔군 자체도 한반도에서 숱한 만행을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남한대토벌작전(한국주차군 시절), 3.1운동 탄압, 간도참변 등이 있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본토결전을 준비하면서 잘 알려진대로 한반도에서 인력과 자원을 수탈한 주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키야마는 부임기간이 별로 길지도 않은데다가 이런 만행에 구체적으로 관여한 바가 딱히 없기도 하다. 조선 주차군의 사령관이었다는 점에서는 마냥 좋게만 느껴지기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12] 조선에 선전포고를 한 나라는 아무도 없다.[13] 당시 안중근 선생도 러일전쟁을 두고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라며 일본을 응원하기도 하였다. 물론 러일전쟁 이후엔 일제의 속셈을 간파하고 돌아섰다. 이는 안중근기념관에서도 밝힌 내용이다.[14] 이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루머가 아키야마에게 덧씌워진 결과물.[15] 이 주장 자체는 안중근도 했을 정도로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선 널리 퍼져 있긴 했다.[16] 요시후루 세대의 일본군 장성들은 메이지유신 이후 영국과 같은 강대국에서 외부강사를 비싼돈 주고 고용해 이들로부터 서양식 교리를 배운자들이라서 2차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을 반자이 돌격대전차 총검술, 카미카제등을 일삼은 일본군 장성과 비교하는게 모욕일 정도로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유능함을 소유한 인물 많았다. 실제로 요시후루의 동생 사네유키는 미국 파견무관 당시 미국의 전술훈련 워게임에 감명받아 이를 일본 해군에 도입할 정도였다. 그랬던 일본이 2차대전의 병맛 넘치는 교리가 된 이유는 일본이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군국주의가 대두하며 변질된 교리를 독자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일그러졌기 때문이 크다. 러시아 내부사정도 있었으나 요시후루 세대의 유능한 장군들이 있었기에 압도적인 국력을 가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17] 러일전쟁당시 일본 육군 장성들중 가장 무능한 축에 속하는 노기 마레스게조차 봉천회전에서 3배가 넘은 러시아군을 밀어내고 러시아군을 편익포위하는데 성공하는 전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