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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3:59:29

결7호 작전

1. 개요2. 배경3. 작전의 기획4. 작전 준비5. 일본군의 전투 서열6. 일본군과 주민의 관계
6.1. 제주도민 강제동원6.2. 제주도민과의 상호작용6.3. 요카렌과 위안소
7. 미군의 한반도 및 제주도 침공 가능성8. 결말9. 관련 문서

1. 개요

決7號作戰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일본 본토 침공이 임박하자 대본영이 수립한 방어계획인 결호작전의 일부. 일본 본토가 아닌 지역으로는 유일하게 제주도가 포함되었다.

2. 배경

1944년 7월 사이판 함락으로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본토가 미군기의 공습 가시권에 들어가면서 미군의 본토상륙에 대한 방어준비가 시작되었다. 이때 일본은 미군의 상륙방향을 두 경로로 예측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사이판을 기지로 하여 일본 동남부의 오가사와라 제도를 점령하고 간토 평야로 직접 상륙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필리핀에서 오키나와 열도를 거쳐 일본 서남부의 규슈 방면에 상륙하는 것이다. 규슈 방면에 상륙하는 경로가 채택될 경우 미군의 전략상 제주도를 점령한 후 여기에 비행장이나 해군기지를 설치해 일본 본토 공격의 전진거점으로 삼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즉 미군은 제주도를 거점으로 삼아 일본 큐슈에 대한 상륙작전과 관동군과 지나파견군을 비롯해 대륙에 배치된 일본군 전체의 일본 본토 합류를 차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일본의 남단 규슈지방과 중국 남부를 연결하는 직선상에 위치하면서 필리핀과 한반도 사이에 놓여 있어 지정학적으로 한중일 3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일본부터 이미 제주도의 지정학적 이점을 쏠쏠히 활용한 바 있고 그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다. 중일전쟁 시기부터 규슈에서 출격한 일본군 폭격기들은 중국 남부를 폭격하고 귀환할 때는 제주도 남서부의 알뜨르 비행장을 이용하곤 했다. 또한 제주도는 레이더 기지가 설치되어 중국에서 출격한 미군기의 공습을 포착하는 조기경보기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동중국해남중국해의 해역은 이미 미군 항공기나 잠수함이 수시로 출몰하여 일본군의 군함과 선단을 보이는 족족 사냥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은 한반도의 항구들에 더욱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제주도에는 4개의 비행장이 존재했는데 제주도를 상실한다면 대한해협은 물론 인근 해역 전체에서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당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연합군이 필리핀에 상륙한 1944년 10월부터 제주도의 방비는 초미의 과제로 떠올랐다.

1944년 11월이 되면서 일본은 대륙으로부터의 수송항로에 대한 해상공격과 함께, 제주도에 공격 거점을 만들기 위한 상륙도 있을 수 있다고 가상하기 시작했다. 본토결전 구상의 부상과 함께 제주도는 ‘결7호 작전’의 중요한 군사거점으로 인식되어 간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 가던 1945년 6월 8일, 도요다 소에무 군령부 총장은 천황이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미군이 취할 만한 전략 중에서 제주도 방면의 공격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즉 미군의 제주도 방면 공격은 일본과 조선 간 교통의 완전 분단을 목적으로 하고 또한 대일공격기지를 추진하기 위한 견지에서 이를 강행해올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해군으로서도 제주도에서의 결전 준비를 더욱 진행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섰다.

3. 작전의 기획

1945년 2월 9일, 일본의 방위총사령관은 각 방면군 사령관에게 6월경을 목표로 한 일본 본토결전 작전 준비의 완성을 명령하였다. 이를 암호명 '결호(決號)작전'이라 불렀는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미군이 필리핀에 이어 1945년 2월 이오지마를 공격하자 오키나와 본토와 규슈 등 서부 일본 상륙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45년 3월 12일 대본영은 각 군 작전주임참모회합을 가졌다. 회의 결과 미군이 본격적인 본토 침공에 앞서 상륙군을 공중 엄호하기 위해 혼슈 인근 지역에 비행기지를 확보하려 조공을 실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 결호작전 지역 중에서도 미군의 보조 상륙지점으로 제주도와 홋카이도가 유력하다고 판단하여 결1호 작전과 결7호 작전이 보다 강도 높게 다뤄졌다.

이에 따라 3월 20일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결7호작전' 준비요강이 한반도를 관할하던 제17방면군에게 하달된다. 그 내용은 2~5개 사단 규모의 미군이 1945년 8월 이후 제주도 또는 한반도 이남 지역으로 상륙할 것을 예상하고, 그 지점을 집중 방어하는 한편, 상륙부대를 향해 적극적인 공격도 감행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때 제17방면군에게 지시된 '국토결전작전 준비요강'의 요지를 보면, 결7호 작전으로 명명된 제주도에서의 결전작전을 위해 제58군사령부와 주력병력으로 2개 사단 및 1개 혼성여단, 기타 예하부대를 배치하도록 했다. 기동병단으로 한반도에 제121사단을 대기시키고 포병과 전차부대를 중국과 만주등지서 이동, 제58군에 직할시키고 있다. 이와 함께 실제 결7호 작전이 진행되면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관동군과 중국 방면군에거 2~3개 사단을 증강토록 했다.

이러한 지시대강에 의해 제17방면군이 마련한 결7호 작전의 구체적인 준비요강은 아래와 같다.
적의 상륙판단
1. 북 규슈 방면 상륙 또는 조선 해협 돌파를 위한 기지로 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공략함.
2. 위를 목적으로 한 남선(한반도 남부) 도서지대 공략.
3. 대륙 교통차단을 위하여 남선(한반도 남부)지구 일각에 상륙.
4. 위를 목적으로 하는 부산 상륙 강행.
5. 정략을 목적으로 한 조선본토 중심지대의 공략.
  • 적의 가용병력: 2~5개 사단
  • 상륙시기: 차기 작전의 준비기간으로 판단해서 8월 이후로 예상됨.

작전방침
1. 주력으로 적의 주요 상륙점을 확보하고, 적의 침공에 제(除)해서는 일체의 전력을 결승점에 집중하여 적을 격멸함.
2. 제주도는 당초부터 유력한 병력을 배치하고 독력으로 동 섬을 확보케 함.
3. 병력의 기초배치: 부도 제2의 1, 2와 같음.
4. 작전준비 완료의 시기: 작전준비는 8월 말 개성(槪成), 10월 말 완성을 목표로 함. 단, 제주도에서는 개성 시기를 7월 말로 예정함.

제17방면군은 미군이 북 규슈 방면 상륙 또는 대한해협 돌파를 목표로 할 경우 제주도를 공략할 것으로 보았다. 이를 위한 미군의 상륙 시기는 8월 이후로 예상했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서의 결전작전 준비에 있어서도 주력을 투입해 미군의 상륙지점을 확보하고 미군이 상륙작전을 전개할 경우는 전력을 기울여 이를 격멸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작전준비는 다른 지역의 경우 8월 말에 기본 골격을 완성하고, 10월 말에는 모든 준비를 마치는 것으로 했으나 제주도는 그보다 1개월 앞선 7월 말에 기본골격을 완성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정세 변화에 따른 작전 계획의 변경으로 1945년 6월부터 제3차 병비강화가 진행된다. 제17방면군의 전력강화 계획은 6월 25일 오키나와 함락, 마리아나와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군기에 의해 한반도 남부 해안 지역이 소규모 공격을 받음에 따라 다시 수정되었다. 제17방면군은 미군이 월등한 항공력을 바탕으로 제주도나 남부 지방에 상륙할 날이 멀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4. 작전 준비

제58군의 전투서열이 하달되던 1945년 4월 일본 본토에서는 전쟁 종결의 임무를 지고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들어섰다. 1945년 4월 7일 성립한 스즈키 내각의 임무는 본토 결전의 준비와 명예로운 강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미 패전을 예감하고 있는 일본 정부는 종전에서의 유리한 협상을 위해 강온 양면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것이 결전작전 지역에서는 미군에게 가급적 많은 타격을 가함으로써 유리한 종전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한 결전의 강요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서 결전부대와 이보다 더 많은 작전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전개되었다. 제주도에서 결7호작전 역시, 이러한 일본 정부의 종전 전략 속에서 제주도민의 대량 희생을 볼모로 한 초기 결전작전이었다.

결7호 작전을 위해 제주도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조선군개요사에 따르면 74,781명[2],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 9월 초에 미군 측에 제출한 병력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66,780명[3] 으로 추산된다. 1945년 4월 이전에 제주도에 배치된 병력은 3,0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본격적인 병력 증강이 이뤄지면서 5월 말에는 제주도에 배치된 병력은 36,000여 명, 패전 무렵까지 60,000에서 70,000여명까지 급증했다.

제주도 수비군의 주력인 제58군의 작전목적은 미군이 제주도 지역에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공군 또는 해군기지 설정 시도를 막는 것으로써, 작전 초기부터 미군을 격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해군기지나 공군기지가 위치한 해안지역을 미군에게 내어 주지 말아야 했지만, 제58군은 초동결전보다 내륙 지구전을 염두에 두고 결전부대의 주진지선을 해안에서 후퇴시켜 후방배치를 하고 있었다.

제주도의 제58군의 상급부대인 조선반도의 제17방면군은 해안결전 전략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현지부대인 제58군 측은 미군이 상륙했을 때 해안결전을 시도했다가는 제공권, 화력, 병력 등에서 열세하기 때문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58군은 상륙은 허용하되 내륙에 준비된 진지로 물러나 미군에게 지구전을 강요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제주도 내륙에서 주민들까지 동원해 필사적으로 진지와 갱도를 구축하고 있었다.

1945년 6월 무렵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 수비군이 내륙결전으로 미군에 맞섰으나 패배로 끝났고 그 영향으로 대본영 및 제17방면군은 58군에 해안결전 전략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 대신 제120사단이 제주도에 추가 파견될 것이 약속되었다.[4]

'제주도병력시초배치요도'(1945년 8월)는 제주도를 3개 권역으로 나눠 미군 등 연합군과의 일전에 대비한 방어의도를 엿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오름군이 밀집된 산악 지형이 많은 제주 동부 지역은 유격 진지대로 설정되었다. 동부 지역은 다시 북쪽과 남쪽으로 나눠 각각 96사단과 108여단이 주둔한다. 제주서부는 주 진지대로 설정돼 제주시를 중심으로 한 북쪽은 96사단이, 서귀포시를 중심으로 한 남쪽은 108여단이 각각 주둔한 것으로 표시됐다.

제58군배비개견도 제주도(1945년 8월)는 구체적인 진지 유형과 위치를 표시한 지도다. 이 지도에는 진지유형을 위장 진지, 전진 거점 진지', 주 저항 진지, 복곽 진지 등 4종류로 표시해 놓고 있다.

위장 진지는 적의 포 폭격의 흡수 등 적의 전개방향을 다르게 유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진지다. 전진 거점 진지는 주 저항 진지의 전방에 위치한 부대를 파견하여, 요점이 적에게 빼앗기는 것을 방해하거나 적에게 잘못된 전개 방향을 유도하여 주 저항 진지에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주 저항 진지는 말 그대로 주력을 다하여 방어하는 진지대로 보병의 항전지대와, 그 후방의 주력포병 및 그 설비로 이뤄진다. 후방배치형의 특징인 복곽 진지는 후방배치형의 개요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저항진지가 함락됐을 경우 최후의 저항거점으로 마련됐다. 제58군배비개견도 제주도 상에 보이는 각 진지의 수는 100곳이 넘는다.

여기에다 해안에는 수제 진지가 구축됐다. 수제 진지는 적의 상륙방면 해상 및 해안선 부근에 위치한 진지를 일컫는 것으로,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 최전선 진지, 즉 전진 거점의 성격으로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주로 미군의 상륙정과 상륙 장갑차, 전차를 공격하는데 주 목적을 둔다.

육상의 진지와 함께 해안가에는 상륙하는 함정을 공격하기 위한 일본 해군의 자살 특공 기지가 구축됐다. 현재 이러한 특공 기지는 제주시 지역의 경우 서우봉 해안과 수월봉 해안에, 서귀포 지역은 송악산 해안과 성산일출봉 해안, 삼매봉 해안 등 5곳에서 확인된다. 제주도의 해군 특공기지는 자살병기인 코류, 카이류, 카이텐, 신요 보트를 운용할 예정이었다. 종전 시점에서 실제 기지가 완성된 것은 카이텐과 신요뿐이었다. 신요 부대는 특공대원과 장비까지 배치되었으나 카이텐은 제주도에 실제로 배치되지는 않는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각 지역에는 군사비행장이 만들어졌다.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과 육군 동비행장(진드르비행장), 육군 서비행장(정뜨르비행장, 현재 제주국제공항의 활주로의 일부를 이룸), 교래 비밀비행장 등 4곳이다. 이 가운데 알뜨르비행장은 일본 해군이 만든 비행장이며, 동서비행장과 교래 비행장은 육군이 만든 비행장이다.

또한 한라산 중턱에는 '하치마키'라는 군사도로가 건설되었다. 하치마키도로는 한라산 중턱을 빙 둘러가면서 각각의 복곽진지를 서로 연결하는 모양으로, 그 형국이 마치 이마에 두른 머리띠와 유사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5]

5. 일본군의 전투 서열

괄호 안은 편성시기 및 편성지

제주도 방어임무를 맡은 제58군이 창설된 1945년 4월부터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제주도에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종전 무렵에는 제주도 현지에서 소집한 인원까지 더해 약 60,000~74,000명 가량의 병력이 배치된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8월 5일에는 대구에 배치된 제17방면군 예하 제120사단 10,000여 병력이 제주도로 파견 명령을 받아 8월 20일에 제주에 상륙할 예정이었다.[8]

다른 결호 작전의 대비테세와 비교하면 결7호 작전은 가장 최하위의 전력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편제상으로 제58군은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제32군보다 규모가 컸다. 하지만 7월 말까지 제주도의 진지구축 작업을 완료하기로 했으나 종전 시점에서 요새화 작업은 계획의 60% 정도만 진척되었다. 전력도 충실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예비역을 소집하여 편성된 제96사단은 병력의 2/3가 40세 이상었고 장교의 평균 연령은 무려 48세였다. 대본영은 제58군의 실질적인 전력이 훈련상태 및 병력의 전투역량, 축성시설 등을 종합하여 고려했을 때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일본군만 못하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대전 말기에 제주도를 포함한 조선 전체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이 총 20만~24만명 가량으로 추산되는데 거의 1/3에 해당하는 병력이 제주도에 주둔했으니 당시 일본제국이 제주도를 얼마나 중요시 했는 지 알 수 있다.

제58군은 미군의 상륙이 유력한 지역을 모슬포항-알뜨르 비행장(제주도 서남부), 비양도-한림항(제주도 서북부), 제주시 일대(제주도 중부)로 예상했고, 각각의 지역에 1개 사단씩이 배치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력한 곳이 제주 서남부 모슬포항 일대였다. 이곳에는 제58군 중 가장 전력이 충실한 관동군 출신인 111사단이 배치되었다. 서북부에는 역시 관동군 출신인 121사단이, 제주도의 중부에는 96사단이 배치되었다. 상륙 가능성이 가장 적은 제주도 동부에는 108여단이 배치되었다.

111, 121사단이 관동군으로부터 이관 된 병력인데 반해 96사단, 108여단은 예비역을 재소집하여 급하게 창설된 부대였다.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전력인 관동군 사단이 가장 위험한 서부지역에 배치되어 상륙한 미군을 어떻게든 해안에 붙들어두는 임무를 맡았다. 전력이 부실한 96사단과 108여단은 방어선 돌파를 대비한 예비 역할을 수행했다.

6. 일본군과 주민의 관계

6.1. 제주도민 강제동원

결7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군 군사시설 구축작업에 제주도민은 다양한 형태로 동원되고 있었다. 진지 구축작업, 비행장 건설 및 위장 작업, 해안특공기지 구축사업, 군수품 수송 등 대부분의 전쟁준비 공사에 동원되었다.

진지 구축작업의 경우 제주시 별도봉과 원당봉, 어승생악, 조천읍(구좌읍) 교래리 부근 오름 등에 동원됐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 중 일부는 노무동원, 일부는 징집 등의 형태로 동원되고 있었다. 작업은 대부분 일본군의 감독 아래 행해지고 있으나, 해군이 관할하는 공사에는 한국인 기술자들이 감독을 하기도 했다.

포진지 구축작업은 결7호작전 계획이 수립되면서 가장 시급하게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4월 8일 제408특설경비공병대가 경비소집되는데, 이를 위해 제주도내에서 207명, 육지에서 71명이 입대했다. 이 시기는 결7호작전을 위해 제96사단 제292연대 및 박격포대(독립속사포제32대대)가 모슬포에 도착하는 시점이었다.

징병자들은 대부분 1943년에 연성훈련을 받고 1년 정도 대기하다가 1944년 말~1945년 초 또는 봄에 소집되었다. 당시 제주도의 육군서비행장(정뜨르비행장)과 관덕정 부근 제주주재소로 소집된 징병자들은 제주공립농업학교로 이동해 부대편성을 한 후, 안덕면 군산과 당산 등지의 포진지 구축작업에 투입되었다. 시기와 부대배치 상 제96사단에 배속된 독립속사포제32대대가 이곳에 주둔하기 위한 진지구축작업에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군산과 단산의 포진지 구축에는 20~45일 정도 동원되었다.

이들은 이후 바로 어승생악으로 이동해 진지 구축작업에 임하거나, 제주시 오라동으로 이동해 1개월여 진지구축 작업에 투입시켰다.[9]

노무동원자와 징병자들은 작업영역이 달랐다. 군수품과 식량들을 수송하기 위해 주민들을 동원했는데, 15세 전후의 미성년자부터 60세 정도의 노인까지 참여했으며, 이들은 주로 마차 등으로 군수품을 목적지까지 수송했다. 모슬포해군비행장에는 쌀 등을 지하호에 운반하기도 했고, 제121사단 사령부가 있는 발이악(바리매)에서 유수암까지 군수품을 수송하기도 했다.

해안특공기지 구축에도 제주도 주민들을 동원했다. 이 경우 작업반장, 즉 작업책임자는 대부분 한국의 다른 지방 사람들이 맡았다. 1945년 3월부터는 모슬포 송악산 해안특공기지 공사에 도민들이 동원됐다. 공사기간은 4~5개월 정도였다. 서귀포 삼매봉 해안특공기지 공사에는 1945년 4월부터 주민들이 동원되어 2개월 동안 진행됐다. 조천면 함덕리 서우봉에서도 해군특공기지를 구축했는데 제주도민들이 동원됐다.

제주도민들의 노무동원은 1943년까지 집에서 드나드는 형태로 동원됐으나 1944년부터는 함바집에서 단체로 생활하면서 작업에 임했다.

이와 같은 병력 및 노무동원을 통해, 일본군 군사시설은 비행장과 엄체호(격납고)시설, 고각포(고사포)진지, 참호, 토치카, 해안특공기지, 동굴진지, 하치마키도로 등 다양하게 대규모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제주도 내 368개 오름 중 현재까지 약 120여개 오름 등지에서 일본군 동굴진지가 구축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본군 군사시설은 해안과 오름 및 한라산 고지대에 이르기까지 미군 등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 구축한 진지유형별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일본군의 제주도 방비를 위해 구축한 진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지도는 '제주도병력시초배치요도'와 '제58군배비개견도 제주도'(1945년 8월)등을 들 수 있다. 또 미군정보고서 자료인 ‘일본군 병력배치도’(1945년 9월)등이 있다.

부친이 강제노무동원에 참가하지 못할 때, 어린이들이 대신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사례로 모슬포 연병장 안에는 어린이 부대가 15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작업도구(곡괭이, 삽, 끌망치)의 장부를 정리하고 사무실 청소를 하거나 바다에서 낚시를 하며 일본군에게 물고기를 제공했다. 일본인 노무책임자들은 작업 과정에서 일반 노무자들에게 구타를 일삼고 연대 기합을 행했는데, 어린이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잘 대해 주었다.[10]

6.2. 제주도민과의 상호작용

일본군은 결7호 작전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제주도민을 전장에서 대피시키고자 했다. 이는 인도적 차원에서 제주도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계획이 아니라, 일본군의 작전 수행을 위한 하나의 전술로 봐야 한다.

제주도는 일본 본토와 한반도와 떨어져 있는 섬이었기 때문에 보급이 한정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고, 제주도민을 이동시킴으로써 군 식량을 보다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군은 제주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미군에게 투항하고 밀통하여 군사기밀이 새어 나갈 가능성이 있었고, 일본군에 다수 포함된 조선인 병사가 동포가 죽어가는 것을 보며 전의를 상실하고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주민들을 제주도에서 옮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일본군은 제주도 주민 중 노인, 유아, 부녀자 5만 명을 본토로 대피시켜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6월 이후 피난선을 통해 대피 계획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첫 피난선이 약 500명의 주민을 수송하다가 조난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민 피난 계획은 중단되었다.[11]

제주도에 주둔했던 일본군과 지역 주민 사이에는 갈등이 발생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고 비교적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의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군부대가 직접 징발을 자행할 필요가 없었고, 결7호 작전을 위한 물자 공출[12]과 주민 동원이 행정 기관을 통해 행해졌다. 일본군이 직접 지역 주민을 강제로 착취한 사례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행정 기관에 의해 행해진 주민 강제 착취는 궁극적으로 일본군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주민과의 밀거래(물물교환)를 공식적으로 용납하지 않았지만, 식량 부족으로 주민들과 암암리에 물물교환이 이뤄지기도 했다. 주민들이 보리떡이나 달걀을 제공하면 주둔군운 담배로 교환해주곤 했다.

오키나와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13] 제주도에서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 미군이 상륙하게 되었을 경우 수많은 제주도민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이다. 미군의 포격과 공격으로 인해 사망하는 숫자도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제주도에서의 전쟁과 결7호 작전의 전개가 이뤄졌다면, 제주도민은 4.3사건과 더불어 또 하나의 커다란 비극을 겪어내야 했을 것이다.

일본군과 주민이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 보자. 고바야시 시즈오는 제주도 중부를 관할했던 일본군 제96사단 예하 보병 제294연대 소속 병사다. 고바야시가 산에 주둔했을 때 마을 사람들의 잔치에 부대원들을 데리고 놀러간 적이 두세 번 있었다고 한다.
부대원인 젊은 놈이 “봉오도리(盆踊り)"가 있다고 하면, 그러면 가자고 해서 보러 가곤 했다. 갔더니 춤추라, 반장님도 춤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추기도 했다. 그런 즐거운 일도 있었다. (고바야시, 06.03.28)[14]

가미키 사토루는 제주도 서남부를 관할했던 일본군 제111사단 예하 보병 제244연대 소속 병사다. 그는 매일 밤 해안가에 배치된 제2소대에 연락을 하러 다니다가 길가에 있던 마을 주민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부대로 복귀하는 도중에 그 동네에 종종 방문했다. 농사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민들과 나누며 마을 사람들로부터 음식도 받아 부대에서 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도민과 관계가 생겼다. 그리고 주민이 고구마로 만든 떡을 주거나 삶은 계란을 만들어서 “군인 아저씨 드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밤늦게까지는 있지 못해, 다 두낭에 담아서 “고맙다. 전우들이 기다리니까 간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지휘반에서는 따로 일반병만 집을 짓고 살았다. 거기서 “돌아왔어”하면 맛이 있는 걸 가져온다고 다들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짐을 풀고 계란이든 뭐든 다 놓고 난 후에 “중대장님 돌아왔습니다”고 했다. “대장님, 계란 받았습니다”, “준 것은 아까우니까 대장님께 갖다 드리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건 안 돼, 그런 건 먹으면 안 된다” “아니 그래도 아까워”라고 했다. 놔두면 아까우니까. 그래서 “하지만 중대장님께 드려야지 생각해서 일부러 가져온 것인데요, 깨질까 봐 신경 많이 쓰면서 가져왔습니다” 그랬더니 “그래? 그러면 하나만 먹어볼까” 라고 그랬다. (생략) 그리고 나서 바로 부대원들 앞에 가서 “야, 중대장님 계란 드셨어 어서 다 먹어”라고 한 것이다. (가미키, 06.04.08)[15]

고바야시, 가미키 두 사람 모두 지역 주민과의 관계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일본군과 주민 사이에는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서는 일본군이 제주 여성들에게 나쁜 짓을 저질러 여성들이 함부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6.3. 요카렌과 위안소

미군과의 일본 본토 결전 구상에 따라 제주도가 중요한 일본군 군사거점으로서 급부상하게 되었고, 중요성이 부각된 서남부지역(서귀포시 대정 모슬포 일대) 이외에도 일본군은 제주도 전역을 서부, 중부, 동부로 나누어 병력을 배치하였다. 특히 결7호 작전의 전술전략 양상이 내륙결전에서 해안결전으로 바뀌면서, 일본군은 해안 바로 인접한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육탄공격[16]을 감행하여 미군 상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 동부 성산 지역에는 자폭용 병기인 신요와 제45신요대 소속의 요카렌 생도들이 배치되었다.[17]

요카렌은 성산 지역에서 큰 트러블 없이 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 나갔는데, 그들은 ‘옷을 잘 차려 입은, 친절하고 다정한 군인’의 이미지로 성산 주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친절했어요. 마을에 좀 배운 처녀들하고는 친절하게 말도 하고. 그쪽으로 일 하러 가도 잘 대해주고. 못 살게 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주민들과는 다정하게 살았지요. (오은자)[A]
1개 중대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민폐가 별로 없었어요. 우리가 절간고구마로 떡을 만들어 주면 잘 먹었던 기억도 있고. 그러면 그쪽에서는 보급 받은 건빵 같은 거를 우리한테 주고. 크게 행패 부렸거나 그런 기억은 없어요. 전쟁 끝나고 4.3때 군인이나 경찰, 서청들이 와서 잔학 행위 한 거에 비하면, 오히려 일본 군인들이 신사였지. (오기병)[A]

요카렌 생도들은 미군과 전투에 돌입하게 될 경우 몸을 던져 목숨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훈련을 받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그렇기에 요카렌은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군 내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는 존재였다. 제주 동부 지역에는 독립혼성 제108여단이 배치되었는데, 108여단 소속 육군 병사들과 비교했을 때 요카렌에게는 일체의 잡일이 주어지지 않았고 해안에서 굴을 파는 작업도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는 위안소에 가는 것이었다. 성산 지역에 주둔했던 육 · 해군 가운데서도 오직 요카렌만이 유일하게 위안소를 이용했다. 병사들이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제복을 갖추어 입고 나들이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게 되는데, 그들이 유일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던 곳이 바로 위안소였다.

성산 지역에서 운용되었던 위안소는 두 곳이었는데, 한 곳은 일반 민가를 개조하여 사용되었고, 다른 한 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여관이 사용되었다.[20] 요카렌이 훈련을 받을 때는 스즈키복을 입지만, 위안소에 다녀갈 때는 ‘나나츠 보탄’[21]이 달린 제복을 입었다. 당시 성산은 마을이 작고 여가 생활을 즐길 만한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나나츠 보탄’이 달린 제복을 입은 요카렌들이 보이면 그들이 위안소에 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산 지역 두 곳의 위안소에는 5명에서 7명 정도의 여성들이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위안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여성들이 밖으로 잘 돌아다니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성산에 거주했던 주민에 의하면, 종전 후 1970년대에 위안소에서 목격했던 여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위안소에 있었던 여자 분을 나중에 만난 적이 있어요. 전쟁 끝나고 군대 다녀와서 내가 버스 운전기사를 했는데, 학생들을 태우고 한림 협재굴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그 분을 다시 만났지. 맨 처음에는 나를 피하다가 나중에 차차 얘기를 듣게 됐는데, 참…. 한 사람 한 사람만 상대를 했던 것이 아니고, 하루에 2~3명 될 때도 있고, 5~6명 될 때도 있고…, (내가) 들으면서도 뭐하고…, 말투가 제주도 분인데, 어디서 징발을 당했는지 말하지도 않고…, 소라껍데기로 만든 기념품을 좌판에 널어 팔고 있었는데 용모나 행색이 그런 일을 할 분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오시종)[22]

전쟁 말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신요대는 성산의 제45신요대 이외에도, 고산에 주둔했던 제120신요대와 서귀포에 주둔했던 제119신요대가 있었다. 두 지역의 위안소 설치 여부와 두 부대의 요카렌 생도들이 성산에 있는 위안소를 이용하기 위해 성산을 다녀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하지만 고산 지역이 제45신요대와 제119신요대 기지 주변(성산, 서귀포) 민가의 상황과 비교할 때 부대원이 여가를 보내기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제120신요대 정대장 무라카미 츠기오의 기록을 살펴볼 때, 고산 지역에는 요카렌 생도들을 위한 위락시설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전시 상황이었고, 고산 - 성산, 서귀포 - 성산 간 거리[23]를 고려했을 때, 그들이 수시로 성산을 다녀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7. 미군의 한반도 및 제주도 침공 가능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실제로 한반도 진공을 여러 차례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한반도 상륙계획은 맨해튼 프로젝트 성공 이전에 이미 포기했다.

사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의 전쟁 시나리오인 주황색 전쟁 계획(War Plan Orange)을 준비하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눈여겨보아 한반도 침공을 검토했었다. 1928년 미 해군 최고자문위원회[24]는 오렌지 계획을 연구하며 한반도를 일본에서 작전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역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이후 산악지형과 상륙에 용이한 교두보의 부재 등을 이유로 한반도 상륙 계획은 구체화되지 않았다.[25]

미 합동참모본부는 1944년 말 맥아더의 필리핀 탈환전 당시 차후 작전으로 일본 본토 상륙을 검토했다. 그 기본적인 골자는 이오지마가 속한 보닌 제도오키나와 점령으로 일본 침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후 일본 혼슈에 상륙(코로넷 작전)하여 도쿄 평야와 시모노세키 사이의 산업중심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논의 과정에서 오키나와 점령과 혼슈 상륙 사이에 중간 단계의 보조 작전, 즉 올림픽 작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조공 작전의 목적은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혼슈 상륙을 원활하게 하고 혼슈에 가까운 항공 및 해군 기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상륙 예정지로 중국, 한반도, 홋카이도, 규슈가 검토되었다.

한반도와 중국의 경우는 둘 중 하나가 공격받으면 만주나 다른 지역에서 일본군이 병력을 증원하기 용이한데다가 전장환경도 조공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지나치게 광활하거나 지형상 적합하지 않았다. 즉 미군은 한반도 상륙이 애초에 일본 침공을 위한 보조작전으로 실시되었다가 오히려 대규모 장기 지상전이 벌어져서 일본 본토 침공에 차질이 생기는,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사태를 우려하여 한반도는 상륙 예정지에서 제외되었다. 결과적으로 혼슈 침공을 위한 조공작전은 규슈로 낙점되었고 올림픽 작전이라 명명되었다. 미군의 스케줄 상으로 오키나와는 1945년 3월 1일까지 점령, 규슈 상륙은 1945년 9월, 혼슈 상륙은 1946년 3월로 예정되었다.

한반도가 후보지에서 제외된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후엔 규슈 침공 작전인 올림픽 작전의 보조작전이 검토되어 오키나와 점령 이후 규슈 작전 전에 점령할 수 있는 지역으로 한반도가 후보지로 다시 고려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기한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한반도는 최종적으로 작전지역에서 제외되었다. 미군의 대일본 작전 계획서 중 정보 분야 부록에서 한반도는 언급되지 않는다. 대만이나 홋카이도의 경우에는 유사시 사전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지역으로 남게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로서 한반도에서 미군의 작전 가능성은 사라졌다.[28] 종전을 눈앞에 둔 1945년 7월 24일 포츠담 회담 당시 미영소 삼국참모총장회의에서도 미국참모총장 조지 C. 마셜은 미군은 한반도에 상륙 작전을 실행할 계획은 없으며, 규슈 상륙 이후 항공기로 한반도를 제압하려 한다고 밝혔다.

8. 결말

전쟁이 말기로 치닫으면서 제주도 또한 미군기의 공습에 직면하였지만, 일본 제국이 본토 결전 직전에 항복함으로써 이 방어작전 계획은 무산되었다. 미군은 한반도 및 제주도에 관심이 없었기에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도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도서지역 요새를 다 무시하고 진짜 핵심지역들만 점령하며 나아간 것이 태평양 전쟁 내내 지속된 미국의 전재전략 이른바 개구리 뜀뛰기 전략이었고, 오직 도쿄만을 목표로 한 몰락 작전에서 제주도는 미군의 관심 밖이었다.

몰락 작전의 1단계인 올림픽 작전을 수행하는 미군 함대가 제주도 기지의 항공기들 작전반경에 있었기에 대대적인 공습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그러기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 만약 미군이 본토 공략의 일환으로 제주도 및 한반도 남부에 상륙했다면 제주도는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과 같이 일본군 대 미군과의 참혹한 전장터로 초토화당했을 것이다.

제주도 확보는 분명 이점이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1개 군단 이상의 병력과 막대한 항공전력, 물자가 소요된다. 제주도 공략이 몰락 작전 수행에 지장을 줄 정도라면 연합군 측이 굳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고 일본본토 침공에 집중했으리라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제주도 주둔 58군의 항복은 9월 28일에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제주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항복을 접수할 미군이 도착하기 전에 제주도 주둔 일본군은 자체적으로 무장해제를 진행하였으며, 치하, 항공기, 중화기, 소화기, 탄약 등을 모두 모아 놓고 일부는 이미 바다에 버리거나 소각, 포탄을 바다에 쏘는 등으로 폐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미군이 도착한 후, 약 1주일에 걸쳐 잔여 무기가 모두 폐기된다.#

훗날 4.3 사건이 격화되자, 정부에서는 일본군이 항복하면서 무기를 제대로 폐기하지 않고 한라산에 대충 파묻어 놓은 것을 산으로 도망간 빨치산들이 획득하여 무장을 갖추었다고 선전하였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 일본군은 꽤나 체계적으로 무기를 폐기했고, 굳이 무기를 숨겨두어야 할 동기가 없었다는 점에서 개연성은 거의 없다. 물론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1달이 넘는 시간이 있었다는 점에서 총기류 등을 숨기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숨기거나 유출시킬 여유는 충분했고, 이 시기에 일부 흘러나간 총기가 빨치산들의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 4.3사건이 처음 발발했던 당시, 무장대는 겨우 일본제 99식 소총 27정과 권총 3정을 보유하고 있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죽창이나 몽둥이, 날붙이 등으로 무장했다. 이후 경찰지서 습격이나 토벌대와의 교전, 경비대 이탈자들의 무기 제공 등으로 무장을 더 보강한다.

다만 당대의 증언에 따르면 제주도민들이 폐기된 군수품을 회수하여 농기구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쓴 사례들도 있다고 한다.[29]

9. 관련 문서


[1] 올림픽 작전은 본격적인 일본 본토(혼슈)침공에 앞선 보조작전인데, 미군이 작전목표로 검토했던 곳은 규슈, 홋카이도, 한반도, 중국이었고 최종적으로 규슈가 낙점되었다.[2] 8월 15일 기준. 그런데 같은 자료에서 제시된 각 예하부대별 인원 현황을 실제로 합산했을 때는 60,780명이다. 약 1만4천여명이 누락되어 있는 셈. 아마 전쟁 말기의 혼란 때문인 듯하다.[3] 제58군 병력 49,619명 + 보고 당시 소집 해제된 일본인 및 조선인 17,161명[4] 120사단은 8월20일에 제주도에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전쟁이 종결되어 제주도에 배치되지 않았다.[5] 오늘날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5.16도로의 일부가 하치마키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말이 있다.[6]제주고등학교[7] 중부군에서 편입[8] 참고로 120사단은 제주도에 파견되기 전에 소련이 만주를 침공하여 한반도 북부까지 밀고 들어오자 평안도로 이동 중 경성에서 종전을 맞았다.[9] 1926년생인 양경서 씨(당시 대정읍 무릉리 거주)는 “1945년 1월부터 2개월 동안 주 2회 특별연성훈련을 받고 1945년 3월부터 45~60일 동안 제주읍 삼양봉(원당봉)에서 진지 굴착작업에 임했다. 1945년 5월에는 모슬포 송악산으로 이동해, 송악산 정상으로 통하는 허리를 절개하는 작업에 투입됐다. 이 작업은 미군 전차의 진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한다.[10] 황석규. (2006). 전쟁 말기 제주도 주둔 일본군의 이동, 배치, 편제, 전략 등에 관한 군사사회사적 의미 - 제111사단을 중심으로. 사회와역사,(72), p.31.[11] 황석규. (2006). 전쟁 말기 제주도 주둔 일본군의 이동, 배치, 편제, 전략 등에 관한 군사사회사적 의미 - 제111사단을 중심으로. 사회와역사,(72), p.29.[12] 주민들로 하여금 큰 어려움을 경험하도록 한 것은 공출이었다. 보리, 고구마, 면화, 놋쇠 등 군수물자가 필요한 경우, 주민들은 모두 이를 공출당해야 했다. 심지어는 항공기용 알코올 연료를 얻기 위해 말린 고구마(빼데기)까지도 공출되었다. 각 밭의 크기에 따라 정해진 양의 물자를 제공해야 했으며, 이를 충족하지 못한 경우 길을 닦는 노동에 동원되거나 심한 경우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종종 "경찰보다 면서기가 더 무섭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여성들에게는 행정적으로 이뤄지는 '물공출'이라 불리는 일본 주둔군에게 먹을 물을 길어주게 하는 일도 있었다.[13] 일본군 주둔 초기에는 오키나와 주민과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미군이 상륙한 후에는 일본어가 서투른 주민을 간첩 취급하여 사살하기도 하였다. 또한 집단 자결을 강요하는 등 참극이 벌어졌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민간인 피해자를 추정에 따라 10만 명 이상(현지 오키나와 주민 징집병 전사자 3만 명을 포함했을 때)으로 보기도 한다.[14] 다카무라 료헤이. (2006).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군인의 제주도 주둔 경험. 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72, p.116.[15] 다카무라 료헤이. (2006).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군인의 제주도 주둔 경험. 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72, pp.117-118.[16] 인명을 무기로 특수 공격을 진행하는 작전으로, 대표적으로 일본군의 가미카제가 있다.[17] 일본 해군은 카이텐이라 불리는 어뢰정과 신요라 불리는 베니어 보트에 폭탄을 장착한 채로 미군 함정을 향해 돌진하여 충돌하는 작전을 펼치려 했는데, 이 자폭 병기에 탑승하여 조종하는 것을 요카렌 생도들이 재훈련 받았다.[A] 조성윤, 고성만. (2019). 태평양 전쟁 말기 요카렌(予科練)의 제주도 주둔과 위안소 -성산 지역을 중심으로-. 탐라문화,(61), p.117.[A] 조성윤, 고성만. (2019). 태평양 전쟁 말기 요카렌(予科練)의 제주도 주둔과 위안소 -성산 지역을 중심으로-. 탐라문화,(61), p.117.[20] 당시 일본인들은 제주읍은 물론 서귀포, 대정 모슬포와 함께 성산포에도 진출하여 거주했다. 특히 성산 지역은 일출봉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일제 시기 제주도에서도 손꼽히는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다.[21] 나나츠 보탄(七つボタン)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7개의 단추’가 된다. 요카렌 생도의 제복에는 앞부분에 7개의 단추가 달려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상징과도 같았다.[22] 조성윤, 고성만. (2019). 태평양 전쟁 말기 요카렌(予科練)의 제주도 주둔과 위안소 -성산 지역을 중심으로-. 탐라문화,(61), p.116.[23] 고산과 성산은 각각 제주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섬 중심에 한라산이 있고 지형이 평탄하지 않은 제주도의 특성상,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을 수도 없다. 지금도 고산에서 성산까지 가는 데 차로 2시간이 넘게 소요되며, 서귀포에서 성산까지도 차로 1시간이 걸린다.[24] General board of the Navy[25] Edward S. Miller, War Plan Orange:The U.S. Strategy to Defeat Japan, 1897-1945(Annapolis: Naval Institute Press, 1991), pp20-21.[26] 게다가 아르덴 공세 직전 미군의 상태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요청 등으로 신병 소집 및 보충병 확보가 쉽지 않았던 상태였다.[27] 공교롭게도 이 고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몰락작전을 지휘할 예정이었던 맥아더가 다시 한번 똑같이 고심하게 되었다.[28] Joint Chief of Staff, Operations for the Defeat Japan, (J.C.S 924/5, 1944-10-27) pp128-129, RG 218, NARA II, College Park, MD[29] 허호준, 태평양전쟁과 제주도:미군의 제주도 주둔 일본군 무장해제 과정을 중심으로,(사회와 역사 vol72, 2006.), 27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