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시대 이전
자세한 내용은 탐라 문서 참고하십시오.제주는 18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제주로 이동하여 살았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동굴이나 바위그늘에 살면서 사냥과 채집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각종 뗀석기와 정교하게 만든 돌날, 좀돌날 등을 제작하여 생활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1만여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바다의 수면이 높아지면서 제주는 육지와 분리되어 ‘섬’이 되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식생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 한반도 남해안 지역의 새로운 신석기문화가 지속적으로 제주에 전해졌습니다. 제주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냥과 채집, 어로 활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국립제주박물관 공식 소개 문구
국립제주박물관 공식 소개 문구
독립국인 탐라국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주호 세력이 존재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원래 한반도와 만주에 있던 나라들과 매우 문화가 이질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탐라국은 원나라를 제외하면 한반도 왕조에 속해있었는데 백제 부용국 → 통일신라 속국 → 고려 속국 → 고려에 사실상 합병 → 삼별초 근거지 → 원나라에 합병, (정동행성) 탐라총관부 → 고려 환속 → 조선의 한 지역 → 대한제국을 거쳤다.
그리고 탐라국은 938년 평화적으로 왕조를 닫게되었지만, 나라의 지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105년 고려에 의하여 탐라군으로 격하되면서 나라의 지위가 없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자치권은 있었는데, 이것마저 폐지된 게 1402년 조선초이다.
2. 조선 시대
곧 종래의 17현을 제주 본읍과 대정·정의 양현으로 통합 및 정비를 하였는데, 1416년 5월 제주목에는 동도 도현에 신촌현·함덕현·김녕현·토산현·호아현·홍로현, 서도 도현에 귀일현·고내현·애월현·곽지현·귀덕현·명월현·예래현·산방현·차귀현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주현인 제주목에는 그 정무를 행사하는 곳인 대촌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속현이 15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의 예래현 문서에서 1416년 통폐합 직전 상황을 기술한 단락. |
조선 초 태종 때 탐라국 체제를 폐지하고 전라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세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완전하게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는 행정구역이 되었다.# 제주목은 현재의 제주시와 유사하며, 대정현과 정의현간 경계는 현재 서귀포 신시가지를 가르는 것으로 보이며 결국 옛 대정현의 강정동과 옛 정의현의 법환동-서호동을 가르는 경계로 추측된다.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은 법적으로는 수평적인 위치와 권한을 가졌으나 정의현과 대정현의 현감에 대한 관할권은 전라감사가 아니라 제주목의 수장인 제주목사가 행사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제주목사가 제주도 전체를 관할하였다.
3개 고을 중 제주목이 가장 인구가 많고 본토와의 연결도 하는 등 제주도 전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제주 목사가 제주도 전체의 방위를 책임지는 군사권도 가지고 있었다. 제주목 관아는 제주시 삼도2동 지역에, 정의현 관아는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 내 구역에, 대정현 관아는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초등학교 터에 있었다. 이중 제주목과 정의현의 관아는 현대에 복원, 보존하고 있으나 대정현 관아는 여전히 터만 남아 있다.
섬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유배지로 이름이 난 지역이 되었고 조선 시대에 제주도는 원악도(遠惡島)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사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원나라나 명나라가 황실 인사나 세력가들을 유배보내는데 이용했고 고려 조정의 경우에는 소수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잠시 머물다 오는 식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건국에 반대한 고려 신하들을 유배보내기 시작했는데, 문헌 상으로는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두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조선 최초의 제주 유배자였다고 한다.
이후 제주도는 왕족들이나 유력 정치인의 유배 단골 코스로 활용되었다.[1] 대표적으로 광해군, 소현세자의 아들들, 송시열, 김정희, 최익현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제주로 유배된 사람은 대략 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유배인들이 유람차 온 것으로 여겨 제주 성내에서 모임을 갖거나 주변 경승지를 찾아 유람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과거 유배인들은 현지인들과 일시적인 관계만 유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학맥을 찾아 계승하는 양상도 보였다.
또한 공물을 많이 바치는 것으로 악명이 높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말이 있었으며 해산물 또한 주요 공물품이 되었다. 귤 같은 작물의 경우 제주도에서 나는 최고의 산물로 평가되어 왕족들을 위한 진상품으로 엄청 보내려 했다고 한다. 귤나무에 맺힌 열매 하나하나마다 기록해서 그 물건들을 다 바치라 했다 하는데 태풍이라도 맞으면 내야될 공물은 그대로인데 수확물은 토막토막난 상태이니 정작 그래놓고 가는 길에 썩어서 왕에게 진상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 때문에 착취를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뜨거운 물을 부어 귤나무를 없애려는 시도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진상품 고난 문서 참고하십시오.
제주도의 방어시설은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봉수는 먼 거리를 감시하는 데에 연대는 가까이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봉화대 같은 통신시설이었다. 본래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에 모두 읍성이 하나씩 있었으며 정의읍성은 현재도 정의현의 중심지였던 표선면에 남아있고 대정읍에 있던 대정읍성은 현대에 복원되었으나, 제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되어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다.
당시 제주도 뱃길이 매우 험한데다 가다가 풍랑으로 죽는 경우도 있었으니 제주목사로 발령받은 관리는 사임을 할 정도로 가기를 꺼리는 오지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탐관오리들에게는 인기인 지방이었는데, 본토와 떨어져 있어[2] 중앙의 입김이 잘 미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백성들 쥐어짜서 부정축재하기에 좋고, 경치가 좋으니 놀러다니기도 좋고 또 소 목장이 있어서 쇠고기 먹기도 좋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농본국가라 소 금살령이 자주 내려져서 벼슬아치들도 쇠고기 먹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물론 제주도 소는 정부 소유라 함부로 잡으면 안 되지만 자연사한 소라고 허위보고하고 몰래 잡아먹었다고 한다. 거기에 덧붙여 귀한 한약재였던 우황 역시 짭짤한 부수입 거리였다. 더군다나 주로 기르던 소는 제주 토종 흑우로 진상품이었다.
그래도 제주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간 목사도 엄연히 있었다. 1470년 10월부터 1473년 8월까지 재임한 이약동(1416~1493) 제주목사는 공물의 수량과 세공을 감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단속하였다. 그리고 당시 한라산 정상에서 지내던 제사로 인해 물건을 지고 한라산을 올라야 하는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의 아라동 일대에 제단을 만들어 거기서 제를 지내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산천단이다.
상당히 전투적인 곳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중국이나 전라도로 가는 왜구들이 자주 들렀을 테니... 말도 많아서 기병의 비율이 한반도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여성도 예청(제주어다. 한자로 女丁이라고 쓴다)이라 하여 군역을 졌다.
제주 방언에 대한 기록이 15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주로 육지에서 부임해 오거나 유배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있는지라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는 식의 묘사가 주를 이룬다. 당시 중세 및 근대 한국어 중앙 방언 화자가 듣기에도 상당히 이국적으로 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서 언급되는 '곶', '오름', '굴레' 등의 특징적인 단어들은 현재까지도 큰 변화 없이 사용되고 있다. 한편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를 통해 조선 전기 제주도의 무속 신앙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1555년에는 왜구들이 제주도를 약탈 거점으로 삼고자 제주도를 대대적으로 침공한 을묘왜변이 일어났으나 다행히 제주목사를 비롯한 민관군이 합심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이후에는 을묘왜변의 사례를 참고하여 제주도에 상당한 육군과 수군 병력을 배치하였으나, 막상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제주도는 건드리지도 않아서 전쟁 기간 내내 평화로웠다.[3] 그도 그럴것이 전쟁 명분이 중국으로 가는 육상 통행권이라서 일본이 제주도를 점령할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나름 조선과 협상할 때 유리한 주장이라도 하려던 정치적인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주 목사인 이경록이 제주도 병력을 본토에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조정에 보냈으나, 조정에서는 뜻은 좋지만 제주도의 방어도 중요하다며 이를 반려시켰다. 또한 김만일이라는 사람은 조정에 제주마 500여 필을 헌납하여 헌마공신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출륙금지령도 큰 고통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가 소탕됨에 따라 제주도가 평화로워지면서 호적상 인구가 1만 명에서 6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하는 시기를 겪었고, 이에 따라 인구가 과밀해지자 조정에서 실업자는 삼남지방, 범죄자는 평안도와 함경도로 이주를 보낼 정도였지만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공납이 늘어나게 되면서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희귀한 특산품이 많은 제주도의 특성상 제주도가 그 피해를 직격으로 받았다.
늘어나는 공납부담에 제주도민들이 삼남지방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바람에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인구 감소 문제가 심각해지자 결국 인조 대인 1629년 제주도민은 아예 본토로 이주가 금지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출륙을 금지하는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본토로 이주가 이어지자 배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어선 대신 뗏목인 테우를 써야했고, 때문에 과부 숫자가 더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 중후기의 제주도는 사실상 감옥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1651년 7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은 2년 뒤 네덜란드에서 온 헨드릭 하멜 일행의 상선이 제주도에 표류해 오자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같은 해 제주 지역의 각종 사정을 기록한 《탐라지》를 편찬했는데, 김정의 《제주풍토록》, 김상헌의 《남사록》과 함께 조선 중기 제주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로 손꼽힌다. 하멜 표류 당시 제주판관으로서 일행을 제주성까지 호송했던 노정(盧錠)은 이후 1669년 제주목사로 부임했으며, 경신대기근이 발생한 이듬해에는 인구의 4할이 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어 조정에 긴급하게 구휼을 요청하기도 했다. #
1694년 7월부터 1696년 9월까지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李益泰, 1633~1704)는 재임 도중 제주의 역사와 지리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인문서 《지영록》을 집필했다. 흔히 '제주도 최초의 인문지리서'라고 불릴 만큼 이전의 문헌들보다도 방대한 양의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록하고 있으며, 특히 효종부터 숙종 대까지 제주도에 표류해온 사람들에 대한 기록도 실렸다. 그 가운데 〈서양인 표인기〉에서는 앞서 언급된 헨드릭 하멜 일행의 표류를 다루고 있는데, 네덜란드인들 중 헨드릭 얀서와 데니스 호버첸의 이름을 한글로 각각 'ᄒᆡᆫ듥얌ᄉᆡᆫ', '너넷고불ᄉᆡᆫ'이라 적은 부분이 흥미롭다.[4]
1702년 탐라순력도 中 제주전최에 그려진 제주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의 전경. |
조선 후기 제주도의 전경을 전하는 대표적인 기록물로는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1702년 화공 김남길(金南吉)을 시켜 제작한 화첩 《탐라순력도》가 있다. 41개의 그림을 통해 제주의 자연 및 인문환경을 소상하게 묘사한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보물 제652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주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손꼽힌다. 《남환박물》, 《탐라록》 등을 저술한 이형상은 제주도의 풍속을 개혁하여 유교화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삼성사 건립, 일부다처 및 동성동본혼 금지, 진상 부담 경감, 해녀의 잠수복 착용 법제화 등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권력 독점을 막고자 산마감목관의 세습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음사(淫祀) 철폐'의 명목으로 한라호국신사인 광정당(廣靜堂)을 비롯하여 제주도에 있던 신당 129곳을 불태우고 무당 285명을 강제로 귀농시키는 등, 민속 신앙 탄압에 앞장섰다는 점은 종종 비판받는다. 같은 시기 사찰 5곳을 헐기도 했는데, 이러한 이형상의 이교 배척 성향이 당시 주민들에게 여러모로 큰 인상을 남긴 것인지 현재까지도 그와 관련된 갖가지 민담이 전해져오고 있다고 한다. #
1735년 4월 66세의 나이로 제주목사로 임명된 김정(1670~1737)은 유생과 아이들을 교육을 위해 삼천서당을 지우면서 목장지의 토지 일부를 재정으로 지급하여 학생들의 교육 밑천을 마련하였고 화북포구를 넓히는 등의 조치도 취했다. 이후 제주목사의 임무를 마치고 육지로 돌아가기 위해 출항을 기다리던 중 1737년 9월 향년 68세로 눈을 감았다.
정조 대인 1796년, 김만덕이 흉년에 재산을 내어 제주도 사람들을 구휼한 공로로 국가에서 최초로 육지여행을 허락한 바 있다. 출륙금지령이 풀리게 된 것은 순조 시기인 1823년에 이르러서였다.
제주목, 정의군, 대정군 하 면리를 개편하면서 방위를 따라 각자 좌면·중면·우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후 제주목 좌면과 우면이 너무 넓어 신(新)과 구(舊) 자를 붙여 각각 구우면·신우면, 신좌면·구좌면으로 나눴고,[5] 역시 지나치게 넓은 정의군 중면도 동중면·서중면 두개 면으로 나뉘어졌다.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러시아 함대가 이에 대항하여 제주도를 점령하려고 시도한 제주성 위협사건이 일어났다.
1896년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제주부(府) 산하로 개편하였다가, 1년 만에 전라남도 관할하에 두었다.
1897년에 제주목 일부로 제주군을 분리하였다가 1906년에 제주목을 제주군에 통폐합하였다.
1901년 가톨릭 신자들의 횡포에 맞서 봉기한 신축민란이 일어났다.
3. 일제강점기\: 통합 제주군(濟州郡), 제주도(濟州島)
자세한 내용은 제주도(일제강점기) 문서 참고하십시오.4. 해방 이후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아... 아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잠들지 않는 남도(안치환)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아... 아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잠들지 않는 남도(안치환)
1945년 해방 이후 1946년 8월 1일 군정법령 제94호에 의해 제주도는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道)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제주도 설치와 함께 남북을 분할하여 북제주군, 남제주군 2개 군을 설치하면서 1도-2군-1읍-12면 체제가 되었다. 현재의 제주특별자치도와 비교하면 북제주군이 지금의 제주시이고 남제주군이 지금의 서귀포시인 셈이다.
개편 전 (전라남도 제주도) | → | 개편 후 (제주도) | ||
제주읍 | → | 북제주군 제주읍 | → | 제주도 - 북제주군(제주읍, 구좌면, 추자면, 한림면, 조천면, 애월면), 남제주군(성산면, 남원면, 중문면, 대정면, 표선면, 서귀면, 안덕면) |
1948년부터 1954년까지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유엔군사령부와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38선을 돌파한 중국 인민지원군이 남진을 계속하여 금강 부근까지 내려올 시, 대한민국 정부를 제주도로 후퇴시킬 극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6] 그러니까 제2의 국부천대. 그 이전에 미국은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위협할 때도, 한반도가 함락될 경우 남은 한국인들을 서사모아 등지로 보낼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7] 이 계획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물론 유엔군이 중공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지만, 제주도를 대만화하기에는 제주도의 면적이 너무 작았던 탓도 있다.[8]
1955년 9월 1일 북제주군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었고[9], 1956년엔 한림면이 한림읍으로 승격되면서 남부지방은 한경면으로 분리되었다. 또한 서귀면이 서귀읍으로, 대정면이 대정읍으로 승격되었다. 이때까지 기초자치단체가 시-군 체제가 아니라 시-읍-면 체제였다. 나중에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시-군 체제로 바뀌고 읍-면은 하위지역으로 격하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수립된 박정희 정부가 제주도를 관광지역으로 개발해보고자 여러가지 개발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1970년대 연동과 노형동 일대에 세워진 신제주 도심이다. 그리고 수도공급용으로 어승생악 수원지를 만들었고 어업활동도 장려하였다.
1980년 애월면이 애월읍으로, 구좌면이 구좌읍으로, 성산면이 성산읍으로, 남원면이 남원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7월 1일 남제주군 서귀읍과 중문면이 서귀포시로 승격되었다.[10]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각각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의 정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은 행정구역이 동서로 분리되는 모양을 취하게 되었다. 1985년 조천면이 조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전면 부활하면서 첫 민선 도지사로 신구범 후보가 당선되었고 이후 우근민과 김태환이 번갈아가면서 도지사를 맡아 제주판 3김으로 군림하였다. 이후 2014년 원희룡 후보의 당선으로 제주판 3김 체제는 깨지고 2018년 원희룡 도지사의 재선, 2022년 오영훈 후보의 당선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제주도는 현재 한국 최고의 관광지로 발전하였고 대규모 관광 개발을 해서 더욱 발전시켜보자는 당시 중앙정부(참여정부)의 주도로 2006년 7월 1일 높은 자치권을 보장받는 특별자치도로 출범함과 동시에 제주시와 북제주군이 제주시로,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이 서귀포시로 통합되고, 지방자치권을 갖는 한반도 본토의 일반적인 시(市)와는 달리 제주특별자치도 산하 단순 행정기구에 불과한 행정시가 되었다. 행정구(일반구)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시장 선거도 하지 않고 지방의회도 존재하지 않으며, 제주특별자치도지사가 시장들을 임명한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제주시와 서귀포시는 각각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에서 분리 승격된 시였기 때문에 일종의 역전인 셈이다. 그렇지만 4개 자치구역이 2개 행정구역으로 격하된 셈이고, 통합 10년 가량 지난 2020년에도 제주시내와 서귀포시내를 벗어나면 인가는커녕 창고나 목장조차 드문 땅이 펼쳐진다. 그래도 제주시내동에 인접한 하귀리나 신촌리, 함덕리 등은 사람들이 꽤 모여 살고 있다.
여담으로 본토에서는 부산의 영도구가 제주도 출신들이 모여살기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공교롭게도 이곳도 섬이다. 전국의 자치구 중 유일하게 오직 섬으로만 구성된 곳. 물론 제주도와 달리 영도는 부산 본토와 영도대교, 부산대교, 남항대교로 이어져 있다. 영도에는 제주은행의 셋밖에 없는 육지 내 지점까지 있다. 부산광역시 전체에 1057명의 해녀가 등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제주에서 이주해 간 60~70대의 할머니.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제주 말총으로 갓을 만들던 많은 제주인들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부산으로 옮겨온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부터 현재까지 타국군에 점령당한 적 없이 온전히 대한민국의 영토로서 기능해 온 지역 중 하나다. 이에 해당하는 다른 지역으로는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 동남쪽에 위치해있었던 영남지방 일부[11], 울릉도와 독도가 있다. 다른 지역의 전체 또는 일부는 최소 한 번 이상씩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적이 있다.
2021년 12월 14일 서귀포 해역에서 규모 4.9의 지진이 발생했다.
2022년 8월 31일 기준으로 제주도의 인구가 외국인 포함 70만 명을 돌파하였다.
[1] 당대에는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이 법적으로는 전라도에 속한 별개의 고을이었으므로, 제주목 유배, 대정현 유배, 정의현 유배를 법적으로 구분했다. 예를 들면 현대에는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를 편의상 그냥 제주도로만 소개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정현으로 유배를 간 것이다. 그래서 유배지 유적이 제주목 관할이었던 제주시 관내가 아니라, 과거 대정현의 읍치였던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것이다.[2] 행정구역상 전라관찰사의 관리를 받아야 하지만 섬이라는 특성으로 사실상 제주목사가 실세로 군림하였다.[3] 그밖에 평양 이북의 평안도 지역과 개마고원 일대, 황해도 서부, 내포지방도 전화를 피했다.[4] 이는 현전하는 19세기 이전 조선 문헌에서 서양의 인명을 한글로 전사한 최초의 사례이다.[5] 제주목은 면적에 비해 관할하는 면의 개수가 매우 적은 편이었다. 제주목 정도 면적을 가진 육지의 고을들은 대개 20~30개에 달하는 면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고, 5개의 면을 관할하는 고을은 양천현이나 경산현 같이 매우 작은 고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6]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북한군이 제주도에 진입하려면 남해를 건너야 하고 그러려면 보급선을 최대한 길게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북한군이 제주도를 우선시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는 6.25 전쟁 당시 전쟁터가 되지 않았던 안전지대가 될 수 있었으며, 이 때 제주도에 소재하고 있던 제1육군훈련소(일명 강병대)를 통하여 전쟁에 참전할 신병들이 다수 육성될 수 있었다.[7] 낙동강 전선 당시에는 이승만이 측근으로부터 제주도로 피신을 해야 한다는 보고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동의하지 않아 결국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결정적으로 대한민국 국군 및 유엔군이 전선 자체를 사수해냈기 때문에 서사모아 망명안 역시 단순한 제안으로만 끝났다.[8] 대만의 면적: 3만 6179㎢, 제주도의 면적: 1825㎢. 제주도는 현무암질의 토양을 가지고 있는 지질학적 특성상 농토가 척박하고 식수조차도 해안가에 나오는 용천수에 의존해야 하는 등 많은 수의 인구를 부양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일본 통치기 동안 산업화와 개발이 진행되어 일본이 남기고 간 공장이나 기반시설이 남아있던 타이완섬과 달리, 1950년 당시에 제주도는 이렇다할 인프라도 없는 깡촌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 당시 제주도로 천도했다면 대한민국은 광복 직후보다도 더 열악한 빈국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제주 4.3 사건의 영향으로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반감이 쌓인 상태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제주도민들이 제주 독립운동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거나 자그마한 섬 지형의 특성상 한반도 전역을 장악한 통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위협과 독립국가 불인정에 안보/외교적으로도 남한 본토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보다 더 취약성을 드러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9] 같은 날에 강원도 원주군, 강릉군, 충청북도 충주군, 경상북도 경주군,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과 통영군 충무읍도 각각 원주시, 강릉시, 충주시, 경주시, 진해시, 충무시로 승격되었다.[10] 같은 날에 경기도 인천시와 경상북도 대구시도 각각 인천직할시, 대구직할시로 승격되었다.[11] 대구광역시(군위군 지역 제외), 경산시, 청도군, 경주시, 밀양시, 양산시, 김해시, 거제시,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