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 2동의 한천 가에 있었던 거대한 규모의 신당인 내왓당에 있던 조선시대의 무신도. 국가민속문화재, 국가중요민속자료 제 24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신도이자 제주 무속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써, 제주도는 해당 유물을 국보로 승격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1]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있는 샤머니즘 박물관에 복제품이 전시되어있다.
2. 소개
1959년, 제주대학교 현용준 교수[2]는 우연히 냇가에서 어떤 안노인이 이상한 그림을 가지고 이리저리 짝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교수가 다가가 확인을 해 보았고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1882년 당시 제주도의 4대 국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가진 내왓당이 훼철되었는데, 이 당의 매인 심방이자 신방청의 도행수로 있던 고임생이 이곳에 있던 무신도들을 삼도동에 있는 자택에 가져다 모셨다가 그의 사후 그의 부인이 제주시 산지천 가까이에 있는 남수각 근처 굴로 이사를 하며 이들 무신도와 무구도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3]1963년 고임생의 부인이 사망하자 현 교수는 그녀가 살던 굴 속에서 무신도가 들어있던 궤짝을 꺼내서 용담동의 제주대학교의 창고로 옮겼다. 1967년 제주대학교 민속박물관 개관 후 1970년에 유물을 전시할 때 이 무신도들이 전시되었고, 1980년 제주대학교가 현 위치인 아라동으로 이전될 때 이 무신도 역시 현재의 제주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무신도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세조실록 1466년(세조 12) 7월 계사일과 병신일 기사에 강우문과 복승리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해 ‘화상을 소각하였다.’ 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내왓당의 신을 그린 화상은 그 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사 강우문이 안무사 복승리를 모함하기 위해서 노산군의 화상을 천외당에 모셔 제사를 지내 소각했다는 것이다. 심방들의 구전에 따르면 이 신당의 신위는 12신위이며, 우리말 신명도 전승되고 있다. 우리말 신명과 한자 신명이 일치하는데, 구전하는 「내외불도마누라」라는 남녀 2신위의 무신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소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10폭의 무신도는 세조 12년 이전부터 있었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무신도에 대해선 의견이 조금씩 갈리는데, 미술평론가 김유정은 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의 무교 탄압 때 불탄 것을 1703년에 다시 그린 것이 현재의 무신도, 그러니까 복제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제주대학교 현용준 교수는 1466년 이전에 그려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3. 형태 및 구성
모두 10폭으로 구성되었으며, 1폭당 신 하나가 그려져있다. 사실 2폭이 더 있었으나 중간에 소실되었다.[4] 가로 32㎝, 세로 62㎝의 한지에 그려져있는데 무신도 10폭 모두 소나무 판자에 붙여져 있다. 모두 진채 물감으로 그려졌으며, 각 폭마다 신위 1위씩을 앉은 자세로 그려 넣었다.각각의 무신도에는 한자로 신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신명들은 이두로 표기해 놓은 순수 우리말인데, 그중 남신은 천자위, 상사위, 수령위, 원망위, 감찰위, 제석위 등 6폭이고, 홍아위, 중전위, 본궁위, 상군위 4폭이 여신이다. 남신도의 의관은 그림마다 서로 다르며 1폭을 제외하고 모두 부채를 들고 있다. 한지에 채색 안료인 진채를 사용하여 그렸는데, 육지의 무신도들과는 화법이 많이 다르다. 색감은 빨강·노랑·초록 등 삼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부분적으로 금박이 입혀져 있다.
3.1. 특징
제주인들의 신앙과 생활상이 함께 그려져 지역 특성과 전통이 잘 나타나있다고 평가받는다.한국 채색화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선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평면적인 채색을 하였으며, 한국 채색화의 전통을 가장 독특하게 남기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빨강·노랑·초록의 화려한 옷을 입은 신들의 얼굴표정, 부채를 잡은 손과 손가락의 움직임에서 신들의 권능과 영력이 생생하게 표현되어있다.
4. 기타
현용준 교수 이전에 무신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민속학자였던 무라야마 지준이 그 주인공으로 당시 조선의 무속신앙을 연구하던 중, 원 소유자인 심방 고임생의 자택에서 무신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남겼다.그러나 후속 연구가 없어 그대로 묻혀졌다가 해방이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현용준 교수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