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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0:55:50

아마카스 마사히코

파일:아마카스마사히코.jpg
만주영화협회 2대 이사장
이름 한자: 甘粕正彦
히라가나: あまかす まさひこ
한국식 독음: 감박정언
영문: Amakasu Masahiko
출생 1891년 1월 26일
일본 제국 미야기현 센다이시
사망 1945년 8월 20일 (향년 54세)
소련 점령하 만주 장춘
국적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만영이사장
임기
2대 1939년 11월 1일 ~ 1945년 8월 20일

1. 개요2. 생애
2.1. 아마카스 사건2.2. 만주국 건국에 참여2.3. 선전예술에 입문2.4. 만주국 영화산업의 중추2.5. 말년과 죽음
3. 매체 및 여담4.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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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 육군 헌병 장교. 다이쇼 시대의 대표적인 백색테러인 아마카스 사건의 장본인이며 이후 만주국의 예술활동에 종사했다.

2. 생애

2.1. 아마카스 사건

1891년,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제2구대에 속했는데 옆의 제1구대장이 다름아닌 도조 히데키였다. 당시 도조 히데키는 무척이나 엄격한 성품과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 때문에 일부 생도들로부터 존경심을 사고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아마카스는 자신의 구대장도 아닌 도조를 찾아가서 문안하곤 했다. 죽이 잘 맞은 둘은 경쟁적으로 천황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면서 갖은 얘기를 나누었다.

1912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4기로 졸업하고 기병 장교로 임관했으나, 낙마 사고를 겪은 후 헌병 병과로 전과했다. 코지마치 분대장이며 헌병 대위로 근무하던 1923년, 관동 대지진의 소동을 틈타 가모시타 야스고로(鴨志田安五郎) 상병, 혼다 시게오(本多重雄) 상병, 헌병대 특고 모리 케이지로(森 慶次郎) 등과 함께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 오스기의 조카 다치바나 소이치 등을 연행하여 목졸라 살해한 후 우물에 유기한 아마카스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부하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3년 12월 8일 군법회의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치바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했다.[1]
파일:220px-Masahiko_Amakasu,_September_1923.jpg
일본군 시절의 아마카스

아마카스는 수감 초기에 자신의 우국충정(?)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울분 때문인지 단식투쟁을 벌이며 감옥에서 죽겠다고 난동을 부렸으나 이 소식을 들은 도조 히데키가 사람들을 파견하여 설득하자 얌전해져서 조용히 수감생활을 하였다. 3년 복역 후 아마카스는 모범수로 선정되어 황실 경사가 온 것을 기념하여 대사면되었다. 가석방 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2.2. 만주국 건국에 참여

1929년 귀국한 후 오카와 슈메이의 인도로 1930년 만주로 건너가 특무기관을 설치하고 1931년 만주사변의 시발점이 된 류탸오후 사건 조작에 참여했다. 1931년 11월, 나카노 고이쓰, 와치 다카시, 가사기 요사아키 등 관동군과 다이유호카이의 인물들과 함께 자치지도부를 결성하여 각 현 단위의 건국공작에 들어갔다. 1932년 3월, 만주국이 건국된 후 이 자치지도부는 3월 15일 해산되었다. 선통제를 호위하여 만주로 데려오는 공작을 실시했으며 민정부 경무사장, 궁내부 자의, 대동공사 주재자 등의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이후 도조 히데키가 관동군 헌병사령관, 관동군 참모장으로 복무하던 시절 그의 오른팔로 활동했으며 만주국의 괴뢰황제인 강덕제를 조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만주국 통신사 사장 사토미 하지메를 통해 페르시아에서 아편을 입수, 만몽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막대한 비자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를 만주에 고용시키는 알선 사업을 행하여서도 많은 돈을 확보했다. 엄청난 비자금을 쥐고 있던 덕분에 낮에는 관동군 사령부가 만주국을 지배하고 밤에는 아마카스가 지배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훗날 총리를 지내는 기시 노부스케도 이때 아마카스의 부하직원이었고 그에게 1천만엔의 공작금을 전달받기도 했다. 현재 돈으로 900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돈이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적으론 유용하진 않고 특무공작에만 쓰는 양심은 있었다고 한다.

2.3. 선전예술에 입문

1934년 4월, 일본 도쿄지방재판소 판사 출신의 만주부 사법부 형사사 1과장 무토 도미키치와 만나게 되었다. 무토는 1937년 11월에 협화회 선전과장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관현악을 이용하여 만주국 건국을 선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37년 12월 18일부터 19일까지 신경협화회관에서 <시민망년예술대회>를 주관하는 등 음악을 통한 선전에 몰두했다.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아마카스는 예술을 이용한 선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 확대에 반대했던 이시와라 간지가 관동군으로 쫓겨왔는데 이시와라는 만주국에 대한 일본의 간섭을 중단하고 만주국의 독립을 완성하자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관동군 사령관의 만주국 내면 지도권 철회에 대해>라는 보고서였는데 이 때문에 이시와라는 관동군에서도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 특히 만주국을 괴뢰국으로 유지하고자 했던 아마카스는 이시와라에게 대놓고 "당신이 만주에 있는 것은 오늘날에는 만주국에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돌아가라."라고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이 때문에 이시와라는 결국 사표를 제출하고 관동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7년, 협화회 중앙본부 총무부장 겸 기획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8년 7월, 만주국은 만주제국수호경제사절단을 유럽 각국에 파견하였는데 이때 아마카스는 부단장에 임명되었으며 무토는 보좌역 단원이 되었다.

2.4. 만주국 영화산업의 중추

1939년 11월 1월, 만주영화협회 2대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만영이라 불리는 만주영화협회의 혁신을 가져왔다. 기존의 만주영화협회는 국무총리 장징후이 직속의 기관으로 전문적 영화인이 참가하지 못해서 독일, 프랑스의 외국영화 수입을 주로 하고 있었다. 1938년에야 첫 영화를 내놓는 형편이었다. 아마카스는 취임과 함께 <만주영화의 성격과 만영>을 발표하여 영화는 국가의 중요사업이며 소련, 이탈리아, 독일의 예시를 들어 국가가 관여하여 만주국의 영화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카스의 취임사는 다음과 같았다.
"만영의 사명은 만인에게 보이는 영화를 만다는 것으로 대상은 어디까지나 만인에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점에서 만영은 과거에 대실패를 범했습니다. (...) 지금 국가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영화를 통해서 만인대중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아마카스는 오카다 소조 등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칼라영화 개발에 나섰으며 1940년 <만영 영화의 임무와 만영>을 발표하여 국제적으로 만주국의 실태를 인식시키고, 국내적으로 건국의 진의를 이해시켜야 하며, 기존 만주 영화관에서 상영하던 민국 영화나 상하이 영화를 대체하기 위한 독자적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만영의 임무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민중을 교화하기 위한 '계민영화'를 만들 것을 주장했다.
"만영의 계민, 오락영화가 진정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기 위해서는 건국의 이상이 그러한 영화 속에 혈액과 같이 자연히 침투하여, 순화되어, 솟아져 나오게 되는 것을 요하나, (...) 만주영화에 있어 노출이냐 순화냐 라는 것이 아니더라도 건국의 이상은 반드시 현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카스는 비록 선전용 관제영화에 집중하였으나 만주 영화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와 "아마카스가 곧 만영, 만영이 곧 아마카스이며 아마카스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향란을 배출한 것도 그의 공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선전에만 집중하여 정작 관객의 눈을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마카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영화는 이론이 아닙니다. 상대의 두뇌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상대의 생활상, 생활감정이라는 것의 특징을 잘 보고, 잘 알고 나서가 아니면, 정곡을 벗어난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 정치가 표면이라면, 영화는 내부의 작업입니다. 이 내부의 작업인 영화가, 지나치게 표면에 치우쳐, 끌려 다녀서는, 영화의 사명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전혀 이상을 향해 달려, 공을 세우기에 초조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관념만이 부상하고, 내용이 공허한 것으로 되어서는 큰 일입니다."

2.5. 말년과 죽음

1943년 3월 만주작곡가협회가 구성되자 작곡가협회 고문을 맡았으며 1944년 10월, 만주예문연맹이 개편되어 만주예문협회로 재조직되자 회장에 취임하여 예문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예문에는 본질적으로 국경, 민족을 초월한 성격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해도 그 때문이야말로 모든 예문이 사상전의 무기로써 중요시되는 것이고 민족협화의 정신도 예문에 의해서야말로 배양되는 것입니다. 이 예문의 성질은 자칫하면, 비국가적, 비국민적인 것과 혼동을 야기하기 쉬운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앞서 말한 대로 예문정신을 존중하고 비평정신의 양양을 기대한다고 해도, 국가의 융창 없이 예문의 융창이 없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문은 모두 애국의 예문이어야 하는, 이것은 엄숙한 사실입니다."

이렇듯 아마카사는 예문을 사상전 무기이며 민족협화의 수단으로 보았다. 그는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만주국 예문가들의 활동 지침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몰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벌어지면서 소련군이 몰려오자 8월 20일 아침, 이사장실 칠판에 "큰 도박, 원금도 이자도 없이 빈털터리"라고 적은 후 청산가리를 먹고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신은 만영본사 뒤편 호서회관으로 소방용 수레에 실려 운구되었는데 3천명의 조문객이 1킬로미터에 걸쳐 따라갔으며 오족협화의 정신을 위해 수레의 오른쪽을 일본인이, 왼쪽을 중국인이 잡고 끌었다. 그의 장례식이 거행된 직후, 대동대가의 관동군 총사령부를 소련군의 카바료프 대장이 접수하였다.

3. 매체 및 여담

파일:아마카스카와시마.jpg
마지막 황제에 나온 아마카스(왼쪽). 오른쪽은 카와시마 요시코.

4. 관련 문헌



[1] 살해에 가담한 모리 케이지로 조장은 징역 3년, 카모시타와 혼다 상병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2] 아마카스는 젊은 시절에만 콧수염을 길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