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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20:46:14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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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일파 숙청?2. 남북한 내각 간의 비교
2.1. 북한 초대 내각2.2. 내각 내 친일 경력자2.3. 극우 측에서 주장하는 명단2.4. 왜 북한도 친일파를 기용하였는가
3. 전향론

1. 친일파 숙청?

흔히들 '남한과 달리 북한에선 모든 친일파를 숙청했다'고 세간에 널리 알려져왔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북한에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의 친일파들이 존재했다.

우선 실제로 남한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이 한 차례도 이루어지지 않은데 비해 북한에서는 그나마 처벌이 몇 차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에서 있었던 친일파 숙청의 희생자들을 보면 친일파도 처벌되었지만 김일성 우상화에 방해가 되는 다른 독립투사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경우도 있다. 더구나 김일성을 지지한다고 전향한 친일파는 오히려 정부 요직에 앉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북한에서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에 가담한 자들은 보통사람보다 재산이 많았고 지주 및 유망한 기업가인 경우가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숙청이 됐으며, 대부분은 당하기 전에 월남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그나마 제대로 청산됐다고 볼 수 있는 친일파는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에서 혐오하는 지주들과 기업가들이었으며, 이들을 제외한 북한의 친일파는 후술할 내용처럼 완벽하게 숙청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북한도 친일 논쟁에서 깨끗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8.15 해방 이후, 38선 이북의 지역의 모든 행정권은 소련 군정에 의해 권력을 이양받은 지역 인민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었고, 이 인민위원회의의 구성원은 지역마다 달랐지만 주로 좌파/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막상 모여서 일을 해보려고 하자 실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인민위원회 자체가 '공산주의/좌파 세력들만 주도했었다'고 보기에는 매우 무리가 있다. 광복 직후 남한에 미국이, 북한에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던 초창기에는 중앙인민위원회에 공산주의자들이 다수를 점령했을지언정 지방 인민위원회 경우는 지역에서 꽤 세력있던 유지나 민족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들까지 치안/행정 업무에 힘을 기울였었다. 특히, 남한 지역에서의 인민위원회 경우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지지가 매우 많았다.

그런데, 나중에 남한에 미군이 진주했을 때 미군이 이들 인민위원회를 아예 부정해버려 결국 남한에서의 인민위원회는 소멸... 이건 명백한 흑역사였다. 북한의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는 이들 인민위원회를 살렸지만, 문제는 이 인민위원회를 변질시켜 지역에서 민족주의 성향이 있던 사람들을 다 내쳐버리고 아무런 실무 경험도 없는 공산주의자들만 기용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라는 것을 명심하자.

이는 오랫동안 일본 제국이 한국인들을 저교육 상태로 방치한 데다가, 행정실무나 업무기구 구성을 맡아 실무 경험을 갖추고 있는 자들이 일본인이거나 친일파밖에 없었다는 점이 크다.[1] 그래서 북한은 소위 탄백 작업이라는 형식의 자아비판 및 공개사과의 형식[2]으로 악질적인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친일파들을 용서해주고, 이들을 행정기구에 앉히는 상황이 벌어진다.[3]

어쨌든 그나마 변명하자면, 남한은 한국전쟁 당시에 한국군 내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살기 위해서 열심히 싸운 것도 있었고[4][5] 반민특위 등 친일파 자체를 청산하려는 노력도 했다. 물론, 아무리 한국전쟁에서 열심히 싸웠다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6] 반민특위도 실제 제대로 처벌한 사례가 전무하기 때문에 아직도 이런 과거에 대해 비판과 옹호로 왈가왈부가 많다.

그러나 북한은 오히려 박헌영이나 김원봉의 경우처럼 김일성보다 독립투쟁을 열심히 했던 독립운동가들을 김일성 우상화 작업의 걸림돌로 판단하여 친일미제간첩으로 몰아붙였고, 이것이 오늘날 북한 정권에서 인정하는 공식 역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북한 초기의 하부 행정기관에서의 친일/부일경력자 기용은 가려졌으며 왈가왈부는커녕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김일성과 김일성을 따른 만주파를 마치 그들만이 홀로 일어난 구국의 독립영웅인 양 포장하고, 나머지 항일운동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정권에서 친일파를 기용할 리가 없다는 북한 정권의 역사관에서도 기인한다. 물론, 박헌영은 한국전쟁의 주동자이자 원흉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독립운동가라도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에 행정조직으로 편입되지 못한 데다, 오히려 그러다가 공개 사과를 하고 자아비판을 했다간 자신의 재산이 몽땅 날아갈 처지에 있었던 지주기업가들은 결국 대부분 북한을 떠나서 월남하게 된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가 공화국을 건설할 때 즈음에 평양의 기업가들이 찾아와서 조국 건설에 도울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난 걔들도 다 포용했음"이라고 거짓말이나 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스스로 공산주의 역사변화 원칙에서 봉건제 → 자본주의 →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 사회주의 노동자/농민 혁명 → 공산주의 완성에 따라 정상궤도를 탄 국가라고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악성선전이고 실제 역사적인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이런 식으로 북한 정권의 요직에 올라간 사람이 바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였다. 그는 일본 제국 육군 관동군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이를 옹호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했다" 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다만 김영주가 관동군 통역으로 일할 당시, 그의 나이가 17세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다. 7.4 남북 공동 성명 때는 이후락과 함께 서명하고 동시 발표를 했을 정도로, 남한에서는 북한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후반 김정일과의 후계구도 경쟁에서 밀려난 후 한동안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1993년 국가 부주석에 올랐으며 그후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을 맡았었다.

하지만 김영주가 관동군 통역이라고 친일파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냥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해방 후 미군통역으로 일했다고 무작정 친미파로 보는 건 무리가 있고 맞는 말이다. 해방 후나 6.25전쟁 때 미군통역을 했다고 해서 친미파나 미국의 앞잡이로 보는 것이 무리가 있다. 진보 쪽에서 진정한 언론인으로 군사독재와 전체주의에 저항한 지식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리영희만 봐도 6.25때 미군 통역장교를 하며 국군에서 7년간 복무했고 이승만과 사이가 각별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통역을 맡기도 했었다.

더구나 김영주가 통역으로 일한 그 당시는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등으로 일본의 공적1호로 될 시기인데 그 동생이 통역으로 있었다는 것도 어폐가 있고 사실은 김일성 체포 내지 회유를 위한 인질성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노골적인 친일파들로 손꼽히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인 심영, 문예봉, 황철, 리면상, 조령출 등의 인물들이 해방 후에는 월북했고 또 다른 권위주의 체제였던 북한 정권을 선전하는 역할에 충실하며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북한도 그냥 필요에 따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봐줬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김정일의 부인이자 김정은의 친모인 고용희도 친일파[7] 후손이다. 자세한 것은 고용희 문서 참조.

2. 남북한 내각 간의 비교

2.1. 북한 초대 내각

직위 성명 당파 경력
수상김일성북로당독립운동 경력자, 동북항일연군(보천보 전투)
부수상박헌영남로당독립운동 경력자, 사회주의 항일운동 관련으로 여러번 투옥
부수상홍명희민주독립당독립운동 경력자, 신간회, 임꺽정
부수상김책북로당독립운동 경력자, 동북항일연군
국가계획위원장정준택북로당서흥광산 지배인, 소련군정에 의해 임명
민족보위상최용건민주당독립운동 경력자, 동북항일연군, 항일무장투쟁
국가검열상김원봉인민공화당독립운동 경력자, 의열단
내무상박일우북로당독립운동 경력자, 조선의용대 부사령관
외무상 박헌영 부수상 겸임
산업상 김책 부수상 겸임
농업상박문규남로당독립운동 경력자, 경성제대반제운동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 경력, 건국동맹
상업상장시우북로당독립운동 경력자, 일제강점기 국내파 조선공산당
교통상주녕하북로당독립운동 경력자, 일제강점기 국내파 조선공산당
재정상최창익북로당독립운동 경력자, 조선독립동맹
교육상백남운근로인민당독립운동 경력자, 1940년 투옥. 마르크스 경제학자
체신상김정주청우당1953년 병사.
사법상리승엽남로당독립운동 경력자, 다만 1940년 출소 이후 변절 의혹이 있음, 박헌영 최측근, 1937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 건국동맹
문화선전상허정숙북로당독립운동 경력자,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투옥, 조선독립동맹
노동상허성택남로당독립운동 경력자, 모스크바 유학, 노동조합운동가
보건상리병남남로당독립운동 경력자, 소아과의사, 1942년 조선민족의 우수성 주장하다 경성제국대학에서 해임
도시경영상이용신한민족당독립운동 경력자,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의 장남,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로군 사령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무임소상이극로건양회독립운동 경력자,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투옥, 해방 후 석방

2.2. 내각 내 친일 경력자

두 한국의 초대 내각은 부일경력자가 거의 없다. 의외로 세간의 상식과 달리, 남한(대한민국)의 초대 내각은 부일경력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남한 내각에서는 유진오, 윤치영, 북한 내각에서는 이승엽 등이 친일 경력을 갖고 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으나,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가 극에 달하는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에 변절한 자들이다. 물론 그들의 친일/부일 경력은 분명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 휴전 이후 건국 초기의 풍조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우선, 남한에서는 내각 내 부일협력자 비율이 무척 늘어났다. 임종국에 따르면 제1공화국의 각 부처 내 부일협력자 비율은 다음과 같다. 백분율 옆에 병기한 괄호 안의 숫자는 부일경력자/장관역임자를 나타낸다.
한국의 내각 내 부일협력자
내각 백분율 부일경력자/장관역임자
내무부 42.1% (8/19)
재무부 50% (4/8)
법무부 55.5% (5/9)
국방부 28.6% (2/7)
문교부 16.7% (1/6)
농수산부 26.7% (4/15)
상공부 60% (6/10)
부흥부 50% (2/4)
사회부 20% (2/5)
체신부 25% (2/8)

다시 말해, 한국전쟁 후의 이승만 정권은 결코 친일매국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통령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을지 몰라도, 그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기용한 수족 상당수가 친일매국경력이 있었던 것이다.

2.3. 극우 측에서 주장하는 명단

극우 측에서 주장하는 북한의 친일파 명단도 있으나[8] 이에 대해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9]
이름북한 내 지위조갑제가 주장하는 친일 행적주성하 기자의 반론
김영주북한 부주석, 북한 내 당시 서열 2위, 김일성 동생일제 헌병 보조원사실 왜곡
장현근북한 임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무장, 당시 서열 10위일제 중추원 참의숙청 추정
강량욱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일제하 도의원김일성 친척
리승엽남조선 노동당 서열 2위친일단체 "대회숙" 가입, 일제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표에 넣지 말아야 할 과장 사례, 숙청됨
정국은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친일밀정, 일본간첩출신숙청 추정
김정제북한 보위상 부상일제하 양주군수숙청 추정
조일명북한 문화선전상 부상친일단체 "대화숙" 가입,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숙청 추정
홍명희북한 부수상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10]숙청 안됨
이활북한 인민군 초대공군 사령관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표에 넣지 말아야 할 과장 사례
허민국북한 인민군 9사단장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표에 넣지 말아야 할 과장 사례
강치우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표에 넣지 말아야 할 과장 사례
김달삼조선로동당 4.3 사건 주동자일본군 소위표에 넣지 말아야 할 과장 사례
박팔양북한 로동신문 창간발기인, 로동신문 편집부장친일기관지 만선일보 편집부장, 문화부장표에 넣지 말아야 할 과장 사례, 1966년 이후 숙청됨
한낙규북한 김일성대 교수일제하 검찰총장표에 넣지 말아야 할 과장 사례
정준택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일체하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숙청 안됨
한회진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일제 함흥철도 국장숙청 추정

사실과 다른 것이 많이 있지만[11] 홍명희를 제외한 위 명단에서 언급된 몇몇 인물들의 경우 부일경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북한의 친일 청산 또한 떠드는 마냥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2.4. 왜 북한도 친일파를 기용하였는가

전술했지만, 해방 후 북한의 상황 역시 남한처럼 여러 모로 인재풀이 텅텅 비어 있어 친일파를 적극 기용한다. 즉, 북한 또한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친일파들이 새 정권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공훈배우이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최승희가 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교육문화성 부상을 지내고 공훈 인민배우 칭호받은 황철, 문예봉, 그리고 뜻밖의 계기로 후대에 잘 알려진 심영 등 같은 공산주의 국가 수립에 동조하는 친일파들은 북한 정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내 서열 10위였던 장헌근, 김정제, 조일명 등 많은 친일파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 참여하였다.

북한 공군에 일본군 출신 공군 장교가 많이 포함되었다고 하지만 일본군은 파일럿도 장교 출신이 적었으며, 조선인 비행 장교 출신은 몇 명 안된다. 애당초 조선인 일본군 장교도 매우 적었다. 일부 뉴라이트가 대표적으로 주장하는 북한군 공군 중장 이활은 일본의 민간 비행학교를 나온 사람이며, 일본군 복무기록도 불분명하다. 뉴라이트가 주장하듯이 이활이 일본군에서 2천번이나 출격했으면 이 사람은 "초 에이스"인데, 일본군의 어떤 기록에도 이 사람의 기록이 없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활은 북한 정권 초기에 공군사령관이 된 자도 아니고, 6.25 때의 공적으로 1961년에야 공군사령관이 되었으니 뉴라이트가 주장하듯이 이 사람을 북한 초대 내각에 들어간 친일파로 지목한 것은 분명한 오류다.

한국전쟁 이후, 초대 내각 구성원을 비롯한 항일운동 경력자 다수가 종파분자,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숙청된다. 남은 건 빨치산 활동했던 사람 중에서도 김일성에게 충성심이 확고했던 사람들과 친일파들 가운데 김일성에 절대 충성을 맹세하던 자들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민공훈배우'로 칭송받았던 황철과 심영이라든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가사를 쓰며 '혁명시인'으로 칭송받은 리찬 등등. 친일 청산은 제대로 안하고 자신의 독재를 위해 독립운동한 사람들을 자신의 편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3족을 멸하고 이들의 공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북한의 친일 청산 운운은 틀린 말이다.[12] 이는 남한에서 노덕술, 이종형, 김창룡 같은 악질 친일파들이 자신의 전적을 숨기기 위해 열렬히 반공을 가장하며 (광신적인 혐일주의자였던) 이승만의 신임을 받은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남한은 정권 교체가 여러 차례 이루어지면서 정치적 대립을 떠나서 독립운동은 독립운동대로, 친일은 친일대로 공과 과를 따져서 재평가하자는 주장이 늘어난 것과는 달리,[13]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한 번 찍힌 놈은 공로도 다 빼앗긴 채 영원히 친일 종파분자로 몰리고 있다.

굽시니스트의 시사만화에 의하면 겉보기에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 잘 되었다고 보여지는 이유로 기존 세력을 그대로 기용하는 미국과 기존 세력을 말살하고 공산주의 세력을 파종하는 소련의 통치 스타일의 차이에 있다고 한다. 물론 굽시니스트도 그 전 내용에서는 김일성 정권이야말로 빈약한 인재를 충족하기 위해 친일파 브레인들을 영입하는데 상당히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군말없이 거론하였고, 이후 내용에서는 김일성이 후대에 주변인들을 숙청할 때 친일이라는 구실을 써먹음으로써 친일파를 청산한 것처럼 역사 왜곡질을 했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고 거론했다. 당시 회차 전체 내용

북한도 과거 친일파의 흑역사를 대놓고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조선에도 친일파가 없지는 않았지만, 수령님과 장군님의 령도력으로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조국 건설에 합류했다."는 식으로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친일파들의 잘못을 은폐하고 친일파들을 미화하는, 남한 입장에서는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의 기괴한 주장을 하고 있다.[14]

3. 전향론

대놓고 첨부터 친일하는 부류를 제외하고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에는 상당 부분 전향을 하게 된다. 이것은 굳이 식민지 조선의 경우만 아닌, 소위 요시찰인이나 과거 전력이 의심스러운 자들을 따로 모아서 공개적으로 전향 선언을 하고 일정 부분 일제에 협력을 하게 된다. 이는 사실상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로 이행되면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

이는 한국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1930년대 이후로는 고등경찰이 일본 내 좌익이나 사상범들을 붙잡아서 전향시키고 일제에 협력시키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당시 일본 공산주의 운동가 중에서 거물급으로 뽑히던 사노 마나부 등이 있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뒤져보면 일본이 군국주의 파시즘 국가로 흐르는 것을 거의 막을 수 없는 기정사실화 하는 분위기가 잘 나타나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한국인들도 상당수 전향했다.[15]


[1] 실제로 북한의 초대 내각 구성원인 정준택은 일제하에서 광산 지배인을 한 경력이 있다. 북한에서도 '나름' 자기들이 악질 친일파들을 처단한 사례를 박석윤(매일신보 부사장) 등을 거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가' 출신으로 친일 경력 있는 이종만(이 사람은 '최고인민의회' 의원직까지도 역임하고, 애국렬사릉에 묻힐 정도로 북한에서는 꽤나 거물인사다.), 역시 문학 계열에서 대표적인 친일 경력 있는 지식인 이찬(이 사람은 해방 후 '김일성 장군님의 노래'라는 시를 지어 북한에서 혁명 시인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지금도 북한에서 굉장히 대우를 잘 받고 있다!) 등을 그대로 기용한 것을 보면, 북한 역시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2] 이것도 심하지 않은 친일을 했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밑에서 설명할 악질적인 친일파들의 상당수는 그런 거 없었다.[3] 여담으로 당시의 상황을 북한의 주장대로 잘 그린 영화가 바로 〈그들의 청춘시절〉이라는 영화다. 주인공이 일제강점기 때 굉장히 잘 나가던 선박 기술자인데, 해방이 되고 나자 주변에서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남조선에서 온 월남 제의를 뿌리치고(이 부분이 꽤 중요. 남한의 모 선생에게서 온 편지를 받는데, 편지에는 기술자를 우대한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북한에 남아있다가 민족반역죄를 조사하는 기관에 붙들려 갔다가, 인망 있는 당 간부가 와서 "이렇게 중요한 사람을 잡아 가둬서 어쩌자는 거냐"라며 관계자를 면박을 주고 구출해 준 뒤에, 갑자기 김일성이 나타나서 모든 화합을 이끌어내고 화기애애하게 마무리 짓는다.[4] 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스스로 평가하길 "일본군 부역자 따위 없는 정통성 있는 인민의 군대"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숙련도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심지어 팔로군에서 분대장을 하던 사람이 군단장직을 맡지 않나, 상당히 개판이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한국전쟁 개전 후 춘천에서 군대의 진입이 막힌 것, 서울에서 3일 이상 지체하게 된 것 모두 이러한 문제들, 다시 말해 자격 없는 지휘관들의 삽질 때문이라고 한다. 박헌영 평전에 따르면 당시 대규모 전투를 입체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고 한다.[5] 북한군은 개전 당시 2개 군단으로 편성 되어있는데 당장 총사령관부터가 장관급 장교 경험은 고사하고 영관급은 커녕 빨치산이랑 소련군 대위 경력이 전부다.[6] 하지만 북한 역시 김일성 정권에 충성하면 일제시대 장교출신들을 기용한 것은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6.25전쟁에도 참여를 했다.[7] 정확히는 일본군에게 군복을 납품하던 자본가[8]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조갑제닷컴의 논객 김필재로, 2010년경부터 그런 주장을 했다. #[9] 사단장이나 교수를 억지로 끼워넣은 격이다.[10] 다만 홍명희의 경우 이름이 도용되었을 뿐 해방 전까지 은둔생활을 했다.[11] 예컨대 김영주는 주성하 기자에 의하면 김영주는 형들이 (일본측에게는) 불순분자였기 때문에 반인질 상태로 끌려다니면서 빨치산에 대한 선무공작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자발적 친일로 보기 힘든 상황. 한낙규는 일제강점기 때 '만주국 검찰총장'을 지냈던 고위 관료였으나,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지냈을 뿐 내각인사는 아니다.[12] 남한의 이승만도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좌파 성향을 가졌던 독립운동가들(예: 이관술, 최능진, 조봉암 등)을 탄압하거나 처형하긴 했어도 김일성마냥 자신의 편을 드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3족을 멸하거나 자신 외의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사실상 말살하지는 않았다.[13] 김원봉백선엽이 대표적이다. 김원봉은 일제강점기에는 의열단 단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의 거물이었으나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기에 보수 진영에서 집중적으로 비판받고 있고, 백선엽은 6.25 전쟁 시기에는 다부동 전투로 한국을 지켜낸 명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간도특설대에 복무했기에 진보 진영에서 집중적으로 비판받고 있다.[14] 이와 비슷한 논조로 이승만도 "왜정시대에 악질적 해악을 저질렀다고 해도 지금 잘 하는 일이 있으면 애국자"라는 취지의 주장을 1954년 한 바가 있다. #[15] 해방 후 미당 서정주가 말한 그대로를 옮겨보자면 "나는 일본이 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청나라와 러시아를 관광 보내고 동아시아의 패왕으로 떠올랐던 시절이라... 그리고, 뒷날 친일파로 변절한 한국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치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은데, 이는 "일본인과 동등한 선거권을 얻고 민권을 얻기 위해" 학병 지원을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쉽게 말해, 일본이 망할 리가 없으므로 그 안에서 나름 살아갈 방법을 찾다보니 이렇게 된 것. 지금의 시각으로는 지나치게 근대적이고 사회진화론적인 시각에 갇힌 관점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