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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02 02:46:07

경희궁 흥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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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편전은 한 건물에 고정되어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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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colbgcolor=#bf1400> 경희궁 흥정당
慶熙宮 興政堂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건축시기 1620년 (창건) / 1865년 ~ 1868년 (철훼)
파일:경희궁 흥정당.jpg
<colbgcolor=#bf1400> 흥정당 사진

1. 개요2. 역사3. 정문4. 구조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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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희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공식적인 편전은 자정전이나 일상적으로는 흥정당을 더 많이 활용했다. 기능적으로 창덕궁 희정당, 창경궁 숭문당과 유사하다.

2.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었다. 침전인 회상전, 융복전의 바로 남쪽에 있어서, 언덕을 타야하는(...) 자정전보다 접근성이 훨씬 좋았다. 더군다나 조선 후기에는 자정전을 빈전[1]으로 주로 사용했기에, 자연히 평상시에는 흥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회상전에서 화재가 일어났을 때 같이 불타 1831년(순조 31년)에 재건했다.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가 8살에 즉위한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여기서 했다.

고종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부분 경희궁 건물들을 공사 자재로 쓰려고 철거했다. 그러나 흥정당 건물은 숭정전 · 회상전 · 정심합 · 사현합 · 흥화문 등과 함께 살아남았다.
파일:학교건물 흥정당.png
파일:광운사 이건 이후 흥정당.png
<colbgcolor=#bf1400> 학교 건물로 쓰이던 당시의 흥정당 <colbgcolor=#bf1400> 광운사 이건 이후 흥정당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가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2]를 지으면서, 흥정당 건물은 1915년 4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 부속 단급소학교의 교실이 되었다. 이후 1928년 3월에 지금의 용산 지역에 있던[3] 광운사(光雲寺)에서 건물을 매입하여 가져갔다. 1950년대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3. 정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희궁 숭양문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구조

5. 여담


[1] 빈전(殯殿):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2]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했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3] 장충동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4] 보통 전통 건축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5]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