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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5:19:51

베이핑-톈진 전투

베이핑-톈진 전투
중일전쟁의 일부
파일:북평함락.jpg
1937년 8월 13일 베이핑으로 입성하는 일본군
날짜
1937년 7월 25일 ~ 30일
장소
중화민국 평진 지역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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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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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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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영향
평진지역 함락.
병력
제29군 산하 8만 명 지나주둔군, 조선군 제20사단, 관동군 2개 여단, 본토파견 3개 사단 등 3만 명
피해규모
1만 6천 명 사상 600명 사상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폭풍전야3.2. 전투의 시작3.3. 베이핑 함락3.4. 톈진 함락
4. 결과5. 여담6. 매체에서7. 참고문헌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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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7년 7월 말부터 베이핑(현재의 베이징)과 톈진을 두고 벌어진 국민혁명군일본군 사이의 전투.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겸 29군 군장 쑹저위안이 일본에 대한 양보책을 지속하다가 결국 중국군의 파멸로 이어졌다.

2. 배경

1937년 7월 7일에 발생한 루거우차오 사건에 대해 쑹저위안은 국부적 해결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지속하며 일본에 계속 양보했다. 7월 11일, 쑹저위안은 <루거우차오 사변 현지교섭>을 체결하였고 7월 19일 지나주둔군 사령관 가츠키가 제시한 7개조 세목에도 조인하며 계속 일본에 양보했다. 반면 장제스가 영도하는 국민정부는 화북의 병력을 바오딩, 스좌장에 집결하며 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쑹저위안은 7월 19일, 베이핑의 방어시설을 해체하고 성문을 열어놓는 등 일본을 달래는 데만 급급했으며 7월 20일에는 주중 일본 대사관 무관 이마이 다케오에게 북상하는 중국군을 바오딩 이남에서 정지시키겠다고 서약하기도 했다. 쑹저위안의 이러한 행태에 장제스는 7월 22일 급전을 보내 추궁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제38사단의 진지는 철폐되고, 베이핑성 안의 방어 시설도 또한 없어졌다고 한다. 왜구는 우리 성내의 경비가 허술해졌을 때, 반드시 더욱 무리한 요구를 해오거나 아니면 일거에 베이핑성을 점령해버릴지도 모른다. 위험은 매우 크다. 한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과의 대화 결과를 지급 보고할 것.

하지만 쑹저위안은 7월 11일에 체결된 협정 내용을 간단하게 보고할 뿐이었다. 이에 장제스는 쑹저위안에게 다시 전보를 보냈다.
중앙은 이번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과 책임을 함께 해왔다. 앞서 말한 3개조가 만일 형이 이미 조인한 것이라면, 중앙은 동의하고 형과 함께 책임을 질 것이다. 다만 원문의 내용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제2조의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는다에 대해서는 임시의 조치, 혹은 기한부로 하는 것이 좋다. 군사 수의 제한은 안된다. 제3조의 항일단체의 철저한 단속은 어디까지나 우리 측이 자주적으로 처리할 문제로, 상대방이 요구할 사항은 아니다. 이렇나 점은 진정한 결말을 맺기 위해서 일본이 7월 7일에 증파한 부대를 철수시키는 것이 중요한 점임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허나 쑹저위안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3. 전개

3.1. 폭풍전야

7월 22일, 장제스는 참모차장 웅빈을 베이핑에 파견하여 톈진에 주재하던 쑹저위안을 베이핑으로 호출, 주권과 영토를 사수하기 위해 일본군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설득했다. 이에 쑹저위안도 항전의 필요성에 대한 동의를 표했지만 아직까지 유화적인 해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한편 일본군은 7월 11일의 협정에도 불구하고 루거우차오, 완평현성, 대정촌 일대로 오히려 병력을 증강시켜 중국군을 견제하기 위한 진지를 구축했다. 중국 첩보에 의하면 이미 일본군 8개 사단, 16만 명의 병력이 중일국경 지역에 집결한 상태였다. 7월 24일, 38사단장 장자충이 가츠키 사령관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협정대로 일본군을 철수시킬 것을 요청하려 했으나 가츠키 사령관은 몸이 불편한다는 핑계를 대고 장자충을 만나주지 않았다. 일본군의 일부 부대는 오히려 완평현성과 장신점을 향해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쑹저위안은 일본군의 공중공격에 대비하여 하남성에 주둔한 고사포 부대를 바오딩으로 전진배치하는 한편, 중앙으로부터 300만발의 탄약을 보급받아 일본군과의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7월 24일, 베이징대학 교수 전원이 "우리는 인도와 정의를 위해, 자유와 평등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의 사람들은 평화를 파괴하고 문화를 무참하게 손상시키는 원흉은 중국이 아니고 일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해주기 바란다."고 연명선언했다.

3.2. 전투의 시작

그러던 중 7월 25일 오후 4시, 동북방면에서 일본군 100명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톈진-베이핑 사이에 위치한 낭방(廊坊, lángfāng)에 도착하여 전화선 수리를 명목으로 낭방역을 점령하였다. 이에 낭방의 지휘관 38사단 소속 113여단장 유진삼이 일본군에게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중국군 113여단과 대치하였다. 7월 26일 0시를 기해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돌연 발포하여 첫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 새벽에 일본군 전투기 14대가 폭격을 감행함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첫 폭격이 벌어졌다. 이어 오전 7시, 텐진으로부터 일본군 증원부대가 장갑차를 앞세우고 공격을 퍼부어 낭방의 중국군을 궤멸시켰다. 오전 10시, 중국군은 낭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이 소식에 이시와라 간지 등 불확대파들조차 "이제는 국내 사단을 증원하는 수밖에 없다. 때를 놓치면 끝장이다. 지급처리를 요한다."고 태도를 바꾸는 등 일시적인 확전을 지지했다.

7월 26일, 낭방을 점령한 일본군은 톈진-베이핑 사이의 북창, 낙대 역을 잇달아 점령하고 철도를 차단했다. 동시에 가츠키 사령관은 쑹저위안 앞으로 2가지 사항을 요구하며 따르지 않으면 일본군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날 저녁 6시, 일본군 1개 대대가 자신들을 야외 훈련에서 돌아온 일본 총영사관 위병들이라고 속이고 베이핑 광안문으로 난입하였다. 이를 간파한 29군 25독립여단 산하 679단 단장 유여진은 일본군을 광안문 안으로 불러들인 다음에 재빨리 문을 닫고 일본군을 포위하여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궤멸 직전에 이르렀으나 쑹저위안이 급히 개입하여 이들을 보내주라고 지시한 덕에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다. 이것을 광안문 사건이라고 한다.

3.3. 베이핑 함락

결국 쑹저위안은 7월 26일의 최후통첩을 수령한 이후, 일본을 유화책으로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7월 27일 베이핑 성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장유번을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방어부대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7일 저녁에 과정원을 바오딩으로 보내 쑨렌쭝, 만푸린 등의 부대를 북상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일본군은 화북 공략을 위한 병력 배치를 마무리한 상태였다. 7월 27일 오전 3시, 일본군은 자신들이 내건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베이핑 동쪽 20킬로미터 지점의 통주의 중국군을 공격하고 다시 5시에 항공기 18대와 기병대를 동원하여 베이핑 남쪽 단하를 공격하였고 중국군은 1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7월 27일 오후, 고려영, 창평, 탄산, 사하의 중국군 기지가 일본군의 일제 공격을 받았다. 7월 28일 오전 8시, 베이핑 남쪽에 위치한 남원의 29군 사령부가 일본군 항공기 40대의 공습을 받았으며 조선군 20사단 소속 3천명의 일본군 기계화 보병부대가 맹습하였다. 중국군 기지는 모두 파괴되었고 29군 부군장 동린간, 132사단장 조등우 등 여러 고급장교와 장병들이 전사했다. 이어 관도군 독립보병 1여단과 혼성 11여단이 서원을 공격했다. 북원에도 일본군의 공격이 이어졌으며 텐진의 외항인 탕구에 위치한 다구 포대도 일본 해군과 관동군 야전중포병 7연대의 공격으로 무력화되었다.

5사단, 6사단, 10사단 소속 3만명의 일본군이 3면에서 베이핑을 포위하자 쑹저위안은 28일 오후에 베이핑 성내에서 친더춘과 장자충을 호출하여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결국 베이핑의 명사들이 일본군의 포화에 베이핑의 문화유산이 파괴될 것을 우려하였으며 중과부적임이 명백했으므로 긴급회의는 베이핑 포기를 결정했다. 베이핑에는 장자충이 기찰정무위원회 대리위원장 겸 베이핑 대리시장을 맡아 머물기로 하고 9시에 쑹저위안과 친더춘이 잔여 병력을 인솔하여 바오딩으로 퇴각했다. 7월 30일, 일본군이 베이핑을 함락시켰고 중앙육군학교 베이핑 분회 소속 생도와 교관들은 일본군에 맞서 최후까지 저항하다 대부분 전사했다. 황하 북쪽 기슭에 범선을 타고 지나가던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갑자기 전쟁이 우리에게 닥쳐왔다. 우리가 밤에 머무를 숙소를 찾으려 했던 작은 마을은 군인과 민간인, 수레, 노새, 말, 노점상으로 가득했다. 마을을 향하는 흙길을 걸어 올라가자 부상당한 병사들이 길 양쪽으로 줄지어 쓰러져 있었다. 더럽고 피묻은 붕대를 감은 사람이 수백명이었고, 그중에는 의식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 그들 곁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3.4. 톈진 함락

29일 오전 2시, 일본군이 텐진의 경찰 기관을 접수하기 위해 접근하자 28사단 부사단장 이문전을 중심으로 톈진의 중국군은 치열하게 반격하여 일본군 비행장과 일본군이 장악했던 톈진의 동역과 서역 지역을 모두 탈환하는 쾌거를 올렸다. 한편, 낭방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던 일본군 폭격기가 지둥방공자치정부 보안대 병영을 오폭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에 지둥방공자치정부의 수괴인 인루겅의 횡포에 불만이 많았던 보안대 병사들의 분노가 폭발, 29일 새벽에 3천명의 부대가 봉기하여 인루겅을 체포하고 일본군 수비대, 특무기관, 일본인들을 공격하여 방공정부, 특무기관에 일하던 2~300명의 일본인과 조선인을 살해했다. 이것이 바로 통주 사건이다. 이들은 인루겅을 베이핑으로 압송하여 국민정부에 바치려 했으나 일본군은 통주 사건을 국민정부가 사주한 테러라고 비난하며 1개 연대를 보내 진압했다.

텐진에 대한 일본군의 반격도 이어져서 결국 대포와 비행기를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에 중국군은 7월 30일, 텐진 역시 포기하고 남방으로 철수고 말았다. 베이핑-톈진 지역에서 29군의 피해만 5천명을 넘었으며 총 사상자는 1만 6천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군의 피해는 고작 600명에 불과했다. 일본군은 이어 영정하를 도하, 장신점을 점령하고 중국군이 집결하는 바오딩 공략을 위해 29군 추격을 정지하였다.

4. 결과

베이핑과 톈진을 중국이 잃음에 따라 일본군은 제2의 만주국을 설립할만한 지반이 확보되었다고 여겨 더 이상 전쟁이 확대되지 않으리라 낙관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명장 탕언보를 파견, 일본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쑹저위안의 잔여병력과 화북 주둔 중국군이 북상하면서 베이핑 탈환전이 개막한다. 이어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면서 국지적인 영토분쟁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중일전쟁은 전면전으로 확대된다.

5. 여담

한가지 2차대전의 비사 가운데 하나로 베이핑-텐진 전투 이후 텐진 조계에 주둔하고 있던 이탈리아 왕국군이 1943년 항복하면서 조계를 접수하러 온 일본군과 소규모 충돌을 빚었다. 이탈리아 해병대인 마르코 대대는 24시간 버틴 끝에 일본군에 항복했다. #

6. 매체에서

패왕별희에서 일본군 기마대가 베이핑으로 입성하는 씬이 아주 잠깐 나온다.

7. 참고문헌

8.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