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베를린
1. 고대와 중세
기원전 7~8세기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게르만족이 남하하여 현 독일을 중심으로 한 게르마니아 일대에 퍼져 살게 되었다. 베를린을 위시한 브란덴부르크 지역은 롬바르드족, 수에비족 등이 살았다.375년 훈족이 유럽에 당도하자 잔혹한 훈족을 피해 100여 년에 걸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대이동의 결과 원래 엘베강 동쪽에 살았던 게르만족들은 대부분 엘베 강 서쪽으로 이동했다.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지역에 살던 수에비족과 롬바르드족 등도 훈족을 피해 각각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 등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 정착했다.
453년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가 죽고 훈족이 갑자기 멸망하자 엘베 강 동쪽의 드넓은 동유럽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그러자 5~6세기에 걸쳐 그자리에 슬라브족이 내려왔고 베를린을 비롯한 브란덴부르크 일대에는 슬라브의 일파인 벤드족 등이 정착했다.
10세기 독일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이 잇달아 세워진 후, 오토 대제가 마자르족의 침공을 종식시켰고, 이후 작센 공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등을 중심으로 당시 슬라브인들이 살고 있는 엘베 강 동쪽을 수복하려는 동방식민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100년대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브레히트[1]를 위시한 독일인들이 벤드족이 살고 있는 엘베 강 동쪽 지역을 공략했고 1157년 신성 로마 제국이 브란덴부르크 일대를 복속하면서 베를린 지역은 다시 게르만의 영향권에 들어왔다. 이때 베를린이 형성되었으나 초기에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고, 슈프레강의 북동쪽 둑에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때에는 슈프레강의 섬에서 쾰른(Kölln)[2] 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었고, 통상의 중심지였던 쾰른이 1237년 도시로 승인되었으며, 1244년 베를린 또한 도시법으로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1307년에는 베를린과 쾰른이 그들의 공동 방어를 위한 연합을 설립, 공통의 시청사를 지었다. 그뒤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상업도시로 발전하였고, 다른 한자동맹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상거래의 자유, 도시자치를 위해 영주와 싸우면서 14세기에는 통상과 제조업의 중심지로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1415년 호엔촐레른 가문의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6세가 독일왕 지기스문트로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된 뒤부터 변경백의 권력이 약화되기도 했으나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3] 때 베를린-쾰른은 자치도시로서의 특권을 빼앗기고 다시 분리되어 군주의 행정 아래 들어갔다. 그 뒤 베를린과 쾰른은 상업도시로서의 지위는 떨어진 반면, 쾰른 북부에 호엔촐레른 가문의 성[4]이 세워짐으로써 왕궁·관청도시로 발전하였다. 1486년 선제후 요한 치체로가 베를린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로 선언하면서 본격적으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 개혁 시기인 1539년에 선제후 요아힘 2세는 베를린 근처 슈판다우(Spandau)에서 마르틴 루터의 주관으로 루터파로 개종[5]하였고, 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가 공인되면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전체에 종교개혁을 실시했다. 요아힘 2세의 아들 요한 게오르크 선제후는 서부 독일의 루터교도 및 유대인 등을 받아들였고, 상공업을 발전시켰다.
2. 근세
그러나 3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베를린은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하며 도시 건물의 1/3이 파괴되었고, 시민의 절반 이상이 도망가거나 사망했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베를린은 인구가 6천 명으로 줄어들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30년 전쟁 말기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大)선제후(Großer Kurfürst)[6]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재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선제후는 슈프레강과 오데르강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여 함부르크와 브레슬라우 등의 상업도시와의 사이에 수송로가 열려 상공업이 진흥되고 인구수는 5만 5천 명으로 증가했다. 대선제후 치세 말기인 1685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위그노에 대한 재산 몰수령을 내리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이것을 기회로 여겨 즉시 위그노에게 종교와 언어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칙령을 내렸고, 위그노들이 대거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우수한 새로운 시민을 합친 베를린은 상업·공업이 급속히 발전하여, 북동부독일의 지도적인 도시로서 문화적으로도 개화의 기운이 넘치는 신흥 도시가 되었다.
이후 1701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고, 베를린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제치고[7]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더욱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바로크 건축 양식의 궁전과 귀족들의 저택 등이 건설되고, 고전주의 양식으로 된 도시경관이 갖추어졌다. 또 중상주의 정책에 입각한 국왕의 산업보호에 힘입어 모직, 면직, 견직 등의 직물업과 은행업이 크게 일어났다. 지금도 여러 일화, 심지어 성문기본영어에도 등장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비록 다른나라들로부터 병정놀이에 심취한 괴짜왕 취급을 받았지만,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고, 베를린을 주기적으로 시찰하면서 근무가 태만한 공무원을 직접 매질하는 등 공직 기강을 바로 잡아 그의 아들대에 이룩한 프로이센과 베를린의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위하면서 프로이센과 베를린은 번영기에 접어들었다. 물론 초창기에는 말도 안되는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프리드리히 대왕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녀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에 딴지를 걸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및 후속전인 7년 전쟁이 일어났고, 7년 전쟁의 와중에 한때 크게 수세에 몰려 1757년 오스트리아군, 1760년 러시아 제국군에게 파괴되었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는 잡히기 전 자살하려고 독약까지 지니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두 전쟁에서 연속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프로이센은 비옥한 슐레지엔을 획득하여 번영하기 시작한다. 전쟁이 잦아든 프리드리히 대왕 재위 중반 이후 베를린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 상수시 궁전 등을 건축했다. 또 프랑스식으로 개조된 프로이센 학사원이 자리잡았다.[8] 또한 문화적인 특색으로 프랑스에서 전파된 계몽주의적인 경향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궁정문화로 시작되어, 극작가 레싱 등의 활약으로 시민 사이에 뿌리를 내렸는데, 그 새로운 문화경향은 가톨릭적이고 복고적인 경향이 짙은 남부 및 서부 독일의 문화에 비해 이색적으로 작용하면서 통상의 중심지이면서 예술과 과학이 번창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 때문에 베를린은 Spree-Athen(Spreeathen, 슈프레강의 아테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3.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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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대왕 사후 프랑스 혁명기를 거쳐 나폴레옹 전쟁으로 접어들게 된다. 1806~10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 전쟁 와중인 1810년 알렉산더 폰 훔볼트 남작,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등의 노력으로 베를린 대학교가 세워졌는데, 베를린 대학교는 "훔볼트식 모델"이라 하여 근대 대학시스템의 표본으로 자리잡았다. 우리가 현재 구분하고 있는 전공 학부구분과 박사학위 시스템등이 베를린 대학교에서 실험적으로 도입되었다.[9] 당대의 일류 석학들을 모아 독일 각지의 역사깊은 대학들을 능가하는 명성을 얻음으로써 독일의 학문·예술의 중심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빈 체제하에서 전화의 피해를 복구하기 시작,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인구 20만에서 1861년에 55만이 되었다. 이에 따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30년 전쟁 직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가 구축했던 성벽을 해체하여 도심을 확장시켰다.
1871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프로이센 왕국을 주축으로 한 독일 제국이 출범하자 신생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인구 82만 6천 명이 되었다.
1910년대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의 모습.
1936년 나치 독일 시기와 패망 직후 연합군 군정 시기의 모습.
빌헬름 2세 치세 말기인 1910년, 베를린의 인구는 207만 6200명으로 늘어났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1920년 10월 수도 대확장을 통해 원래 면적의 12배가 넘는 면적으로 확장되었다. 관련 영문 위키백과 문서 베를린 대확장 법령 독일어 원문[10][11]
1920년대 초 독일과 베를린은 막대한 배상금으로 큰 고통을 받았고 살인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렸지만 20년대 중반부터 빠르게 회복해 나갔다. 1920년대 말 베를린은 이전처럼 유럽 문화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회복했다. 이 시기 베를린에는 놀렌도르프플라츠(Nollendorfplatz)를 중심으로 지식인과 예술가, 소수자들이 모여들었다. 베를린에 수백개가 들어선 카바레는 전후 도발적인 문화의 상징이었고, 성소수자들이 잡지를 내는 등 양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4. 분단기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나치의 심장부 베를린 또한 드레스덴이나 쾰른과 같은 독일의 다른 도시들처럼 연합군의 공습을 받으며 전쟁 내내 파괴되었으며 특히 유럽전선 최후의 전투인 베를린 공방전(1945년 4월 16일 ~ 5월 8일)에서 소련군과의 치열한 시가전을 통해 베를린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12] 베를린 공방전이 끝난 직후 베를린 인구의 무려 70%가 여성이었으며, '잡석 여성들(Trümmerfrauen)'이라 불린 이들이 거리의 잔해들을 치웠다. 잔해가 어찌나 많았는지 폐허와 잡석들을 모아올린 더미가 베를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13]이 될 정도였다.서베를린 | 동베를린 | |
시기(市旗) | ||
면적 | 479.9㎢ | 409㎢ |
인구(1946) | 1,996,250명 | 1,174,582명 |
인구(1989) | 2,130,525명 | 1,279,212명 |
점령국 | 미국 영국 프랑스 | 소련 |
구(區) | 노이쾰른(Neukölln)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쇠네베르크(Schöneberg) 슈테글리츠(Steglitz) 템펠호프(Tempelhof) 첼렌도르프(Zehlendorf)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 티어가르텐(Tiergarten) 빌머스도르프(Wilmersdorf) 슈판다우(Spandau) 라이니켄도르프(Reinickendorf) 베딩(Wedding) | 미테(Mitte) 프리드리히스하인(Friedrichshain) 헬러스도르프(Hellersdorf)[14] 호엔쇤하우젠(Hohenschönhausen)[15] 쾨페니크(Köpenick)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 마르찬(Marzahn)[16] 팡코(Pankow) 프렌츨라우어 베르크(Prenzlauer Berg) 트렙토(Treptow) 바이센제(Weißensee) |
이후 소련군의 점령 양상과 별도로 베를린 자체가 독일의 수도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연합국 4개국, 즉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해 분할되었다. 냉전기 동서 베를린은 각기 미국과 소련의 원조로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단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옛 베를린의 모습들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49년 독일 정부 두 개가 병립하자 소련 점령지구인 동쪽 지구(동베를린)는 "사실상" 동독에, 나머지 3개국 점령지구(서베를린)는 "사실상" 서독에 속하게 되었다. "사실상"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는 연합군 군정기를 벗어나 동서독 양국이 세워진 이후에도 베를린은 연합군 점령지대로 취급되어, 공식적으로는 서독의 영토도 동독의 영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17] 다만 서베를린의 행정권을 서독이, 동베를린의 행정권을 동독이 행사했을 뿐이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독일민주공화국의 수도(Hauptstadt der DDR)'라고 칭했지만, 서방 연합국들은 공식적으로는 동독의 사칭 취급했다. 소련을 포함한 제2세계 국가들은 그냥 동독 영토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서베를린에서는 서독 연방의회 의원을 선출하지만 직접 뽑는 게 아니라 서베를린 시의회의 간선으로 선출될 뿐더러, 이들은 표결권이 없었고, 서독 기본법이나 서독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도 서베를린에서는 그 효력이 제한되었다. 그리고 징병제였던 서독 본토와 달리 서베를린에서는 징병제가 적용되지 않아[18] 병역을 피하려는 젊은이들이 유입되기도 했다. 심지어 동독 집권당이던 사회주의통일당의 서베를린 지부가 존재했다. 이 상황은 1990년에 연합군이 철수하고 통일과 함께 정식으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이 합쳐져 베를린 주가 세워지고 나서야 해소되었다.
이렇게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은 공식적으로는 서독과 동독에 속하지 않았지만, 동베를린이 공식적으로 동독의 영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수도라는 모순되는 상황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1974년 서독 월드컵 때 상당수의 경기가 공식적으로 서독의 영토가 아닌 서베를린의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편 서독에 속한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에 완전히 둘러싸인 '육지의 섬'이 되었다. 1948년 독일의 전후 처리 등을 두고 소련과 서방 국가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소련은 서베를린까지 완전히 먹어버릴 요량으로 서베를린을 전차 부대로 완전히 둘러싼 채 베를린 봉쇄를 감행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아사 위기에 처한 서베를린이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상상을 초월한 대규모 베를린 공수작전으로 인해 소련의 베를린 봉쇄는 실패하고 말았고 서베를린은 계속 서방 자유주의 세계의 도시로 남게 되었다. 한편 당시 서독과 비교 대상이었던 동독을 육성하기 위해 소련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고, 동베를린은 동구권 국가 도시 중에서는 가장 발전된 도시였다.
그러나 냉전의 긴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서방과 동구권의 경제적 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동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주자가 늘어났다. 매년 수십만명이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주하자 이러다가는 50년 이내에 동독 인구가 0명이 될 판이었다. 이것은 동독과 소련의 큰 골치거리였다. 사실 동독의 수장 발터 울브리히트는 1950년대부터 베를린 장벽을 세우자고 줄기차게 스탈린과 흐루쇼프를 졸랐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의 건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확립한 포츠담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이는 전쟁의 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스탈린과 흐루쇼프는 울브리히트의 간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흐루쇼프 입장에서도 베를린 탈주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동독 체제 자체가 붕괴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 문제로 늘 고심을 거듭했다. 결국 흐루쇼프는 1958년 베를린에서 연합국 4개국이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했고, 그렇지 않으면 모종의 조치(전쟁)를 취할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했으나 아이젠하워를 필두로 한 연합국 지도자들은 포츠담 협정 위반이므로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흐루쇼프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물러나며 망신을 샀다. 그러나 1961년 미국 대선에서 약관 43세의 케네디가 아이젠하워의 부통령이었던 닉슨을 꺾고 최연소 미 대통령에 당선되자, 흐루쇼프는 이를 기회로 여겼다.[19] 결국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 야밤에 기습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그리고 흐루쇼프의 예상대로 케네디는 아무런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20][21] 이후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베를린 장벽 건설 후 동독은 장벽에 죽음의 구역 (Todesstreifen)를 설치하여 지뢰, 철조망, 감시탑, 군견 등을 설치하고 탈주자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즉각사살하라는 명령(Schiessbefehl)을 내렸다.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의 무자비한 자유과 인권 탄압의 상징이 되었다.
한때 세계 정복을 꿈꾸던 베를린이었던 만큼, 서베를린만으로도 서독 제1의 인구를 가진 큰 도시였다. 그러나 분단기는 베를린을 크게 쇠퇴시켰다. 동독 한가운데 콕 박힌 서베를린에서 기업의 중추 업무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연히 베를린에 있던 지멘스와 알리안츠의 본사가 뮌헨으로 떠나갔다. 축구라고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전쟁 전까지만 해도 꽤나 강팀으로 먹어주던 헤르타 BSC 역시 분단으로 인한 접근성 저하가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비실거리는 약팀으로 몰락하고, 대신 남부의 바이에른 뮌헨이 독일을 대표하는 거의 유일한 강팀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뮌헨으로 이사간 알리안츠는 바이에른 뮌헨에 알리안츠 아레나라는 선물을 안겨주게 된다. 아무튼 간에 이런 식으로 냉전 시기 서베를린에는 제대로 된 산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동베를린은 공산주의 정권의 수도가 되어 온갖 삽질과 실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베를린 대학교 또한 동베를린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와 서베를린의 베를린 자유대학교로 쪼개져버려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베를린 장벽 건설 이전에는 주요 동독 탈출 루트이자 도심 교통의 중추였던 베를린 지하철과 베를린 S반 또한 장벽 건설과 함께 동과 서로 분리되어 무정차 통과하거나 유령역이 되는 역이 나오는 등 파행 운행되었다. S반은 동독 DR이 서베를린 구간까지 계속 운영하여 서독 측의 보이콧 대상이 되었다. U반은 서베를린측 노선망이 동베를린측 노선망보다 훨씬 충실했기에 서베를린에서는 U반이 계속 교통의 중추로 기능했고, 함부르크처럼 노면전차를 버스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구 동베를린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U반 노선이 부실하던 관계로 미테 구 대부분의 역들이 유령역으로 전락했다. 이때의 흔적으로 지금도 베를린에서 노면전차는 구 동베를린 지역을 위주로 운행된다.
독일 분단 시절인 1980년대 영국 왕립 군사경찰에서 제작된 서독에서 출발하여 동독을 거쳐 서베를린으로 통행하는 방법이 나온 안내 영상.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상으로 주의사항에 대한 안내가 나와있다.[22][23][24] |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서는 육로로 동독의 아우토반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선 지리적 위치상 반드시 동독을 거쳐 가야했다. 동독 국적자가 아니라면 정해진 구간만 통행해야 했다. 따라서 해당 아우토반에는 동독과 서방의 자동차가 동시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서독에서 온 이용자들을 위한 휴게소가 따로 지정되어 있어서 서방인과 동독인들이 서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이를 위해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에 막대한 사용료를 지불했다.
그런데 문제는 동독의 아우토반은 시속 80km의 속도제한이 있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에 설계된 모델을 마이너 체인지해가며 1980년대까지도 그대로 생산하던 트라반트나 바르트부르크 등의 동독 승용차들에게는 시속 80km도 상당한 고속이었고, 상당수의 동독 자동차는 시속 80km로 달리는 것도 무리였다. 하지만 속도 무제한 아우토반을 달리던 서독의 운전자들에게는 시속 80km 속도제한은 큰 문제가 되었다. 서독 정부는 이에 대해 동독 정부와 협상했고, 엄청난 추가 비용을 내고 서독 자동차에 한해 시속 100km 속도제한을 적용시켰다. 같은 도로를 놓고 서독 자동차와 동독 자동차에 다른 속도제한이 적용되는 상황은 동독 주민들이 보기에도 이상하게 느껴지기 충분했다. 아우토반을 달리는 메르세데스-벤츠, BMW 같은 고성능 승용차가 바로 옆에서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동독인들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다고 한다.
철도로 서독과 서베를린을 이동하는 경우에는 동독 내 무정차하는 Transitzüge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동독 출경 시 동독 측이 경비하기 쉬운 한적한 역에서 승객 전원이 심사를 받았다.
다만 당시 위와 같은 육로 이용이 21세기의 육로 국경 통과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1989년 동독의 여행 자유화 조치 이전까지만 해도 첨예한 냉전 상태였기 때문에 육로를 통과하는 것은 적국의 영토를 이동하는 것이고, 동독과 소련 입장에선 적국의 국민이 자국 영토를 통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까다롭게 굴었다. 위 영국 측에서 제작한 영상만 봐도 서독 여행 가이드를 보여주지 말라, 휴게소를 이용하지 말라 등 까다로운 조건을 안내하고 있다. 동독 입장에서는 서독에게서 돈을 받고 할 수 없이 국경을 열어준다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온갖 트집으로 여행자들을 괴롭혔다.
이후 1989년 동베를린 시민들 손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동서독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또한 분단된 지 45년 만에 재통합되었다. 이후 1991년에는 정부를 서독의 임시수도 본에서 베를린으로 옮기기로 결정, 이후 지금까지 통일 독일의 수도로 기능한다.
나치 독일 시절과 현재의 베를린 비교.[25]
1990년에는 독일 내에서 정부 기능을 베를린으로 환도할지 아니면 반세기 동안 실질적인 행정수도였던 본에 그대로 둘지를 두고 갈등이 많았다.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에 보면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는데[26] 천도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베를린 환도를 지지하는 타블로이드 신문인 "빌트(Bild)'는 독일 국민의 52%가 베를린을 지지한다고 대문짝만하게 실었으며, 본 잔류를 지지하는 타블로이드지 "엑스프레스(Express)"[27]는 53%의 국민이 본 잔류를 지지한다고 역시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문제는 이 두 신문이 같은 날 발행되었다는 것(...) 아무리 4~5%가 오차범위 내라고는 하지만 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두 신문이 아전인수 격으로 써제낀 결과였다.
결론적으로는 베를린으로 환도가 결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5. 독일 재통일 이후
통일 후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베를린은 수도임에도 다른 독일 대도시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편이다. 2010년대까지는 독일 평균 1인당 GRDP를 밑돌았고[28], 2022년 기준 1인당 GRP가 4만 8,147유로로 독일 전체 평균 4만 5,993유로보다 조금 높다. 반면 세금 투입량은 최고라 세금 먹는 하마이다.베를린의 구(區)는 2001년 1월 1일부로 개편을 통해 대거 통합되었다. 베를린의 구는 1920년 베를린 대확장 당시 20개였고, 동베를린에서 3개가 늘어 개편 직전인 2000년에 23개(구 서베를린 12, 구 동베를린 11)였으나, 통폐합을 거쳐 현재의 12개로 줄였다.
2000년대 들어서 베를린은 잃어버린 40년을 되찾기 위한 대규모 개발계획들을 속속 추진했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수도 이전부터 시작해서, 베를린의 잡다한 공항들을 폐쇄하고 새 공항을 지었고, 중앙역 또한 새로 만들어 영업 중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동쪽 파리 광장에서 슐로스 다리까지의 베를린의 중심축 거리인 운터덴린덴(보리수나무 아래)거리 양 옆으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를 비롯해 왕궁, 도서관, 오페라하우스가 있었지만 분단되면서 소련식으로 마개조당했는데,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복원이 이루어졌다.
베를린 왕궁도 복원공사를 마치고 2021년 7월에 재개장하였는데, 크기로서는 파리의 루브르급에 달할 정도로 큰 프로이센 왕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2차대전 기간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동독에서 봉건주의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강조하면서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킨 뒤 그 자리에 공화국 궁전(인민의회의사당 겸 컨벤션센터 겸 국민문화회관)을 세웠다.
2차대전 전 베를린 대성당과 베를린 왕궁의 모습
공화국 궁전의 모습
복원 후 조감도
독일 슈피겔은 2016년 7월 21일에 베를린의 인구가 350만 명을 넘었고 동시에 주택난도 동반되고 있다고 밝혔다. # 2023년 기준으로는 386만이다. 이와 동반하여 월세 및 부동산값 또한 유럽 주요도시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 중이다. 독일은 주택 소유율이 50% 이하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임대주택에 거주한다. 동베를린을 포함한 구 동독 지역은 주택 대부분이 통일 후 민영화 과정에서 수만채 단위로 민영 임대업체에 매각되었다. 결국 보다 못한 베를린 시 정부가 2020년 2월부터 2014년 이전에 건축한 집은 5년간 월세를 올리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 독일 안에서도 상당히 찬반이 갈리는 정책 중 하나로, 당시 시의회 야당이었던 기독교민주연합은 이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반대파들은 위헌심사를 제기한다고 한다. 결국 14개월 만에 위헌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임대주택를 국영화 여부 주민투표를 주의회 선거와 같이 치른다.#
베를린 시민의 과반수가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민간 부동산회사가 보유한 주택 24만여 채를 몰수하는 데 찬성했다.#
동서독 통일 이후, 베를린시에서 첫 여성 시장이 탄생했고, 2023년 4월까지 재임했다.#
[1] 원래 안할트를 통치하던 아스카니아 가문 출신으로 사후 아스카니아 가문은 작센계, 안할트계, 브란덴부르크계로 갈라졌다.[2] 서쪽의 대도시 쾰른과는 철자가 하나 다르다. 베를린이 확장하면서 노이쾰른(Neukölln) 구가 생겨났고 쾰른은 알트쾰른(Altkölln)이 되었다. 현재는 베를린 왕궁을 경계로 서쪽은 박물관섬(Museumsinsel), 동쪽은 어부섬이라는 뜻의 피셔인젤(Fischerinsel)로 불린다.[3] 프리드리히 대왕과 다른 인물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는 프리드리히 4세.[4] 이 성이 베를린 성(Berliner Stadtschloss)의 기원이다.[5] 단, 개인적인 개종이었고 브란덴부르크 국가 단위 개종은 황제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 보류하고 있었다.[6] 대왕, 대제에 해당하는 용례로 위대한 군주였다는 의미다.[7] 통념과 다르게 프로이센 공국-동프로이센은 프로이센 왕국 역사에서 단 한순간도 중심지였던 적이 없었다. 애초에 브란덴부르크와 베를린이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계 직계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대놓고 프로이센 공국 출신 융커들을 박멸해 베를린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완성했다.[8] 오일러, 라그랑주, 라이프니츠, 아인슈타인 등등 저명한 사람들이 많이 근무했다.[9] 미국과 캐나다의 유수 연구중심대학들이 모두 훔볼트식 모델을 북아메리카에 최초로 도입한 대학인 존스 홉킨스 대학교을 벤치마킹하여 성장했고, 오세아니아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인 호주국립대학교도 존스 홉킨스 대학교를 본떠 설립됐음을 생각해보면 훔볼트식 모델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10] 이걸 이해하려면 1963년 1월 서울 대확장을 생각해봐도 될 듯하다.[11] 지금의 서울특별시 경계가 이때 거의 완성되었고, 이후의 추가 편입은 1973년에 이뤄진 구파발 일대에 불과하다.[12] 당시 베를린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재래식 무기로 공격한 소련군보다는 미 공군의 공습이 훨씬 두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연합군의 공습으로 민간인의 인명손실이 5만여 명이 나온 데 비해 베를린 공방전에서는 인명손실이 그 2배인 10만 명이었다.[13] 해발 120m인 토이펠스베르크(Teufelsberg). 서베를린에 있었으며 미군의 감청 기지가 있었다.[14] 1986년 승격[15] 1985년 승격[16] 1979년 승격[17] 독일 재통일 조약체결 당시 미영불소 4개국 정상의 서명이 들어간 것도, 베를린의 주권을 미영불소 4개국에서 통일 독일로 이양해야 했기 때문이다.[18] 상술했듯 서베를린이 서독의 영토가 아닌 연합군 점령지였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 안에 있어 UN사령부의 관할인 대성동마을 주민들이 병역의무가 면제되는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19] 케네디는 취임 직후 쿠바 피그만 침공에 실패하는 등 초기에 엄청나게 어리숙하고 삽질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흐루쇼프는 케네디를 얕보게 되었다.[20] 케네디는 전쟁을 하느니 베를린 장벽을 용인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발표했지만, 서방 시민들과 언론들로부터 무능한 자유세계 지도자라는 비판을 감내해야 했다.[21] 케네디가 베를린 장벽을 용인하면 소련은 이후 더 큰 도발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고, 예견대로 이듬해 소련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으켰다. 그러자 이때야 소련의 본색을 깨달은 케네디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강경대응으로 돌아섰고, 흐루쇼프는 철수하며 이후에는 더 이상의 도발을 자제하였다.[22] 기본 수칙: 동독 아우토반의 교통법규(특히 제한속도)를 반드시 준수하시오. '서베를린 통행 가이드'를 소련군 검문소에 들고 가지 마시오. 소련군과 동독군경을 대할 때에는 항상 협조적이지도 않고 비협조적이지도 않은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시오. 저들이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마시오. 검문소에서 소련군이 당신에게 경례할 경우 본인의 성별에 관계 없이 맞경례를 하시오. 졸음쉼터에 소련군, 동독군 또는 동독 경찰이 있는 경우 해당 시설을 사용하지 마시오. 휴게소에서 정차하거나 사용하지 마시오. 카메라를 꺼내지 마시오. 불가피하게 소련군 또는 동독 군경을 마주하게 될 경우 절대 공격적으로 대하지 말고 침착하시오. 소련군 검문소에서 절대로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마시오. 접촉했던 동독군경 또는 소련군의 인상착의 및 계급을 최대한 자세히 기억해 두시오.[23] 주요 사고 및 차량 고장 시: 동독 군경 또는 동맹국 국적의 여행객이 도와주러 왔을 경우 자신이 영국인임을 알리고 Breakdown Card를 건네 준 뒤 적절한 조치를 받을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시오. 동독 군경 또는 소련군에게 어떠한 진술도 하지 마시오. 중대한 경우가 아니면 소련 구급차나 동독 구급차를 이용하지 마시오. 만일 이용했을 경우, 소련군에게 incedent card를 건네어 영국군에 자신의 상황을 알릴 수 있도록 하시오.[24] 동독 군경에 단속되어 강제로 Stop되었을 경우: 동독 군경에게 죄를 인정하지 말고 끝까지 잡아떼시오. 동독 군경에게 벌금이나 과태료를 내지 마시오. 대신 소련군을 불러 달라고 하여 그들에게 벌금 또는 과태료를 납부한 뒤 증명서를 받으시오. 뇌물을 주지 마시오. 저들이 당신의 신체나 차량을 수색하게 두지 마시오. 동독 측과 문제가 생기거나 동독 측에서 소련군 호출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 경우 동맹국 국적의 여행객을 세워 가까운 검문소에 자신이 동독 군경에 잡혀있음을 알릴 수 있도록 하시오.[25] BGM은 나치독일 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다운폴의 엔딩곡이다.[26] 현대문명진단 연재 당시 소스 상당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행되는 보수성향 신문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자이퉁에서 따왔다.[27] 이 신문은 쾰른에서 발행되기 때문에 쾰른에서 가까운 도시인 본을 밀었다.[28] 거의 모든 국가에서는 수도의 1인당 GRDP가 전국 평균을 상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