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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요아힘 빌헬름 가우크 Joachim Wilhelm Gauck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940년 1월 24일 ([age(1940-01-24)]세) |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로스토크 | ||
정당 | (1989~1990) (1990~) | |
재임기간 | 제11대 대통령 | |
2012년 3월 18일 ~ 2017년 3월 18일 | ||
종교 | 개신교(독일 개신교회)[1]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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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독 출신 독일의 민주화운동가 겸 인권운동가[2]이자, 독일연방공화국의 제11대 대통령이다.2. 생애
2.1. 초기
1940년 독일 로스토크에서 항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이름이 동일했던 아버지[3]는 유능한 항해사로 2차대전 기간에는 해군 장교로도 활동하기도 했는데, 가우크가 11세였던 1951년 소련군에게 체포당한다. 혐의는 서독에서 넘어온 불온서적들을 소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중을 선동했다는 것. 가족들은 아버지가 체포되고 거의 3년 가량을 생사조차 모른채로 지내야했으며, 가우크의 아버지는 1955년에야 겨우 굴라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4]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그의 생애에서 큰 영향을 끼쳤고, 그가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아버지가 겪은 고초는 가우크를 강경한 반공주의자로 만들었고, 김나지움과 대학교 재학 시절 내내 가우크는 공산당 청년회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스스로를 반공주의자라고 밝히고 다녔다. 다만 이로 인하여 가우크는 언론학을 전공하는 것을 동독 당국으로부터 거부당했고, 대신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로 활동하게 된다. 후일 가우크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언론학 전공을 거부당했을 당시 제1 대안은 철학을 전공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동독에서 철학이라는 것은 말이 철학이지 마르크스주의와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철학을 접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목사로 활동하지만 당연히 공산당 치하에서 목사로 활동하는 것이 쉬웠을 리가 없다. 당국은 목회 활동에 끊임없이 태클을 걸었으며 슈타지 역시 가우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5]
2.2. 통일 이후
1989년 동독 정권을 뒤흔든 시민들의 시위 와중에 동독 내 지식인들은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이라는 시민단체를 창설하고 가우크도 여기에 참여한다. 이후 독일 총리 헬무트 콜에 의하여 가우크는 구 동독 문서관리청장에 임명되고, 슈타지의 기밀 문서 및 이에 관련된 반 인권 범죄를 조사하는 일을 담당하면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문서관리청장에서 물러난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6] 2010년에는 퀼러 대통령이 사임하자 사민당과 녹색당 연합의 후보로 대통령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지지하는 기민당의 크리스치안 불프에게 밀려 낙선했다. 한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2000년대 초중반에 기민당 쪽에서도 가우크를 대통령 후보로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가우크 본인이 고사해서 무산됐다는 것. 심지어 2010년 선거 와중에도 구 동독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민당 정치인들중 몇명은 '당도 당이지만 솔직히 가우크가 더 나은 인물이다.'며 가우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하지만 불프가 2012년에 비리로 구설수에 올라 임기 중 사임하게 되자 보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등록해 당선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 가우크는 기민당,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정확히는 총 선거인 1,232명 중 108명의 기권을 제외하고 991표(80.4 %)를 얻었다. 심지어 반공성향의 가우크를 껄끄럽게 여기는 좌파당 지지자 중에서도 절반 가까이는 가우크를 지지했다. 이러한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가우크는 무난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참고로 좌파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베아테 클라르스펠트(Beate Klarsfeld)를 밀었는데 이 사람이 누군지는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문서 참고.
매우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임기의 종료 이후 연임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불출마 사유가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임기 중에 역대 최고령 대통령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실은 다음 사람을 위해 겸양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아데나워만 해도 73세에 총리에 올라 14년간 집권했으니까. 이후 치러진 원내 대선에서 외무장관을 역임 중인 사민당 출신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당선되었고, 가우크는 2017년 3월 19일에 슈타인마이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퇴임했다.
3. 여담
- 명목상의 상징적 국가원수인 독일의 대통령답게 재임 중 별다른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0년 대통령 간접선거 기간에는 "난 사민당 지지자도, 녹색당 지지자도 아니다. 그냥 요아힘 가우크다."라고 말한 바 있다. 독일 언론에서는 가우크의 정치 성향을 전반적으로 자유보수주의 정도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우크가 유일하게 거부감을 드러내는 정당은 바로 과거 동독의 집권당이었던 사회주의통일당 계열이 상당수 들어가있는 좌파당[7]. 그 때문인지 좌파당도 가우크를 무척 싫어한다. 2010년 대통령 선거 당시 기민당 후보였던 불프와 사민당 후보였던 가우크를 비교하면서 좌파당이 보인 반응은 '이건 히틀러와 스탈린 중 하나를 고르라는 건데..?' 였을 정도다.
- 다만 자신이 극렬 반공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영 갈등보다 국론 통합의 원칙을 우선시하는 독일의 제도권 정치인들답게 사회가 분열되더라도 자신의 진영인 범우파를 지지하는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 2020년 튀링겐주의회 선거 이후 진행된 주총리 선출 투표에서 자유민주당의 토마스 켐머리히 후보가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지표를 받아 주총리로 선출되며 "나치 이후 최초로 극우파의 지지를 받은 선출권력"이라는 거센 파문이 일자 켐머리히를 강하게 비판하며 주총리직 사퇴를 요구했으며, 자신이 싫어하는 좌파당 소속인 보도 라멜로프 후보에게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다.
- 대한민국 대통령과도 정상회담을 두 번이나 했다. 둘 다 박근혜와 했는데, 2014년 4월 박근혜의 방독때 독일의 벨뷔궁[8]에서 1번, 2015년 10월 가우크의 방한때 한국 청와대에서 1번했다. 2014년의 정상회담때 한국 정부가 방한을 요청했고, 독일 정부가 이를 수용하고 약속하여 다음해 한국에 왔다. 한국 국회에서 연설도 했다.[9] 연설 주제는 "독일통일 경험과 한반도의 통일"로서 동독의 대표 민주화 운동가였던 자신이 바라본 독일 통일기 근대사[10]에 대한 해석과 한반도의 남북통일 관련 미래에 대한 견해였다. 그는 "독일 통일과는 여러 분야에서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통일은 한국인 모두에게 담대하고 큰 도전일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지난 세월간 이어진 한국의 발전을 보면서 저는 분단된 한반도의 지나온 70년이, 미래에는 분명 한반도의 유구한 전체 역사 중 하나의 에피소드로 남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즉 세월이 흐르면 후손들이 분단시기를 하나의 에피소드로 생각해 "우리 조상님들때 분단되었던 때도 있었지"라고 생각할거라는 의미로, 언젠가 이뤄질 한반도의 통일을 확신한다는 뜻.
-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11] 선수들을 응원하려고 몸소 경기를 관전했으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실축으로 바이에른 뮌헨이 챔스 우승을 놓쳤다. 가우크는 그래도 열심히 뛰어준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며 위로해주려 했으나 이 때문에 실의에 빠진 슈바인슈타이거가 악수를 거부해서 사건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우크는 언론에 "슈바인슈타이거를 용서하라"는 의견을 제시했으며 오히려 슈바인슈타이거를 감쌌다.[12]
- 2013년에는 프랑스를 방문하던 도중 오라두르쉬르글란에 방문하여 당시 나치 독일군이 저지른 참상에 대해 프랑스 정부에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오라두르쉬르글란에서 희생된 영혼들에게 역시 사죄했다. 그 이후 다시는 나치의 만행같은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막겠다고 약속했다.
- 2014년에 개최될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불참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그 이전에도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러시아의 인권 탄압[13]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를 하고 있었다. 다만 불참은 자신에 한한 것이고, 독일 선수단은 예정 대로 참가한다고 첨언했다.#
- 1959년 소꿉친구와 결혼했다가 1991년 이혼하고 2000년부터 다니엘라라는 기자와 동거 중이다.
[1] 독일 개신교회 소속 교단이었던 '메클렌부르크 복음주의 루터교회' 교단에서 목사로 섬겼으며, 이후 메클렌부르크 복음주의 루터교회는 독일 개신교회 소속의 두 타교단과 통합하여 독일 개신교회 소속 '북독일 복음주의 루터교회'가 되었다.[2] 동독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독일 통일 직후에는 10년간 슈타지 전문 사냥꾼으로 명성을 떨쳤었다.[3] 이러면 아버지쪽 이름이 요아힘 가우크.Sr, 아들 쪽이 요아힘 가우크.Jr이 된다.[4] 당시 서독의 수상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가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쟁포로를 비롯해 소련에서 강제노역에 종사하고 있는 독일인들이 모두 풀려나게 됐다. 하지만 굴라크의 악명에 걸맞게 가우크의 아버지 역시 심하게 학대를 받아서 장애를 갖게 된다.[5] 통일 후 세상에 공개된 슈타지의 가우크 감시 일지에 따르면 가우크를 "개선의 여지가 없는 반공주의자(unverbesserlicher Antikommunist)"라고 묘사하고 있을 정도. 그 감시일지를 통일 후 찾아낸 주도자도 가우크 의원 본인이었다. 한국의 5공 청산처럼 독일은 슈타지 청산을 했는데, 그게 가우크가 주도한 것이다.[6] 정확히 말하자면 통일 직후에 정계에 투신했고 동맹 90/녹색당의 일원으로 동독 지역에서 의원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의원 선출 직후 문서관리청장으로 임명되는 바람에 의원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그 덕분에 가우크는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이후 가장 짧게 의원직을 수행한 인물로도 기록되어있다.[7] 좌파당은 구 사회주의통일당 계열, 당의 중도화를 비판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당한 오스카 라퐁텐 계열의 좌파 그룹, 그리고 비제도권 극좌파 단체들이 통합한 일종의 선거연합체이다.[8] 독일의 청와대이다. 대통령이 기거하고 근무도 하는 곳으로, 독일에서는 대통령궁이라고도 불린다. 미국 언론에서는 독일의 백악관이라고도 자주 쓴다. 물론 정식명칭은 벨뷔궁이 맞으며, 독일 내에서 정식명칭대로 벨뷔궁이라고 하거나 대통령궁이라고 둘 중 하나로 부른다.[9] 이후 슈타인마이어로 대통령이 바뀌어서 문재인과 윤석열 모두 가우크는 못 만나고 슈타인마이어와 정상회담을 했다.[10] 가우크는 독일 통일을 앞둔 시기에 처음 동독 연방의원(국회의원)이 되어 통일 작업에 직접 관여한 사람이다. 슈타지(당시 한국으로 치면 안기부에 해당하는 동독의 정보기관으로, 동독의 국가보안법 핑계로 동독 민주화운동가들을 떼거지로 잡아다가 고문을 많이 했다.) 해체 및 문서공개 작업을 주도했다. 한국은 정보기관이 중정부-안기부-국정원으로 이어지는데, 슈타지는 안기부 개념이다. 슈타지가 한국말로 하면 "안전부"이다.[11] 독일 국가대표 축구팀 구성원의 대부분이 이 팀에 소속되어 있었다.[12] 당시 슈바인슈타이거는 자신의 실축 때문에 허탈함과 슬픔에 빠져 단상에 오를 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가우크가 내민 손을 못 보고 지나쳤던 것. 슈바인슈타이거 자신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 행동에 대해 즉각 사과했다.[13] 정확히 말하면 2013년 8월 러시아에서 새로 제정된 동성애 통제법에 의한 LGBT 탄압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