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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민주당 당수 | 기독교민주연합 당수 |
출생 | 1919년 7월 8일 | |
독일국 프로이센 자유주 졸링겐 | ||
사망 | 2016년 8월 24일 (향년 97세) | |
독일연방공화국 바덴뷔르템베르크 바트 크로징엔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정당 | [[자유민주당(독일)| 자유민주당 ]] | |
재임기간 | 제4대 대통령 | |
1974년 7월 1일 ~ 1979년 6월 30일 | ||
종교 | 개신교 (복음주의)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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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정치인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의 제4대 대통령 및 제6대 부총리 겸 외무부장관을 지냈다.2. 생애
2.1. 전반기
1953년, 자민당 소속으로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어 공식적으로 선출직 정치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이후 제4대 연방하원 선거의 결과로 CDU/CSU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다시 한번 자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자 연방경제협력개발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입각하게 된다. 이후 총리가 에르하르트로 바뀐 이후에도 자리를 지키지만 1966년, 자민당 지도부가 에르하르트 총리의 증세안에 반발하여 연정을 포기하고 자민당 소속 각료들을 내각에서 사퇴하도록 하자 같이 사퇴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에르하르트의 후임으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가 기독교민주연합 당수가 되어 새로운 내각 구성을 시작하게 됐는데, 여기서 자민당이 빠진 상태에서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선택하자 졸지에 자민당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렸고 이에 대해 자민당 당수였던 에리히 멘데는 "코끼리끼리의 결혼을 합의해놓고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다."고 분개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연정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후임 당수로 발터 셸이 선출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반전이 시작된다. 원래 자민당 내에서도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운 셸이 당권을 잡게 되자, 자민당 역시 기존에 멘데 총재 시절의 보수성을 탈피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게된 것. 사민당의 구스타프 하이네만을 후임 대통령으로 지지한 것이 본격적인 노선 전환이 그 시작이었다.
2.1.1. 1969년 총선, 그리고 정권교체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부총리와 기민련의 키징어 총리 간의 맞대결 구도로 치러진 1969년 총선은 68 혁명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선거였다. 나치당 부역 경력이 있던 키징어 총리는 단숨의 구태라는 낙인이 찍혀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총선 결과, 사민당이 1당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기존 의석에서 22석을 불리면서 창당 후 최다 의석수를 확보했다. 자민당 역시 의석수가 줄긴 했지만, 30석을 지키면서 다시 한번 캐스팅보트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그래도 일단 1당을 지킨 키징어는 당초에는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포기하고 자민당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로의 성향 차이도 있었지만 키징어 총리가 총선 과정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제도를 폐지해버리겠다고 선언하는 등 오만한 모습을 보였는데 지역구 의석 없이 득표율로 배분되는 비례대표로만 의석을 확보해오던 자민당에게는 사형 선고와 같은 소리였던 것.
이 사이 손을 내민 브란트의 손을 잡고 전후 독일 역사상 최초의 적황연정을 구성해 정권교체에 이바지한다. 대신 셸은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 자리를 얻어내고 자민당 의원들 역시 내각에 대거 입각하게 된다.
다만, 브란트의 총리 지명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는데 셸과 자민당 지도부의 태도 변화와 달리 1선 의원들 중에는 아직 보수성이 강한 의원들이 다수 남아있었던 것. 총리 지명 투표에서 자민당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배반표가 다수 나왔는데[1] 자칫하면 3표차로 내각 구성에 실패할뻔하기도 했다.
여튼 총리 인준 투표도 통과되면서 사민당과 자민당과의 연정이 본격적으로 출발하게 된다. 이 후 강경보수파 의원들과의 노선 투쟁을 통해 1971년 전당대회에서 경제적 자유가 기본권과 환경권(!)을 결코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프라이부르크 강령을 통과시킨다.
2.2. 후반기
브란트 내각의 부총리 겸 외무부장관으로서 동방 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되는데,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고 기존의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해 동독의 존재를 공식 인정하는 등 과거와는 전혀 다른 외교정책을 펴게 된다. 보통 데탕트 시대의 대표자 중 한 명으로 브란트 총리가 꼽히지만 그 실무선에서 셸의 존재감 역시 부정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하지만 이 외교 정책으로 인해 자민당, 심지어는 사민당 내에도 수많은 반대파가 생겨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결국 1972년 4월, CDU/CSU 주도로 내각불신임안까지 하원에 제출되는 상황이 되었다. 불신임안은 가결에 필요한 249표에서 단 2표가 모자라 겨우 부결되었지만 적황연정은 출범 3년만에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서 브란트와 셸은 승부수를 띄우는데, 브란트 총리가 당내 반대파를 누르기 위해 의회 해산을 시전하고 조기 총선으로 국면을 빠르게 전환한 것. 말그대로 총선은 서독 국민들에게 동방 정책에 대한 신임을 묻는 투표가 됐는데, 여기서 사민당이 11석이 늘어난 230석을 차지해 전후 처음으로 1당 지위를 탈환하고, 자민당 역시 의석을 11석 불리면서 CDU/CSU에 완승을 거둔다. 당연히 사민당과 자민당의 대승에 데꿀멍한 당내 반대파들 역시 숨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두 정당은 다시 한번 연정을 구성했고 브란트와 셸은 압도적인 독일 국민들의 지지 속에 임기를 연장할 수 있게 됐다.
1974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귄터 기욤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후임 총리가 선출 될때까지 일주일간 총리 대행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재무부장관으로 있던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 후보로 지명되자 브란트때와 마찬가지로 자민당의 대표로서 공식 지지했고 선출 절차가 완료되자 본인도 부총리와 자민당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후임은 한스디트리히 겐셔가 맡게 된다.
대신 의회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구스타프 하이네만의 뒤를 이어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79년 6월 30일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후, 유럽 운동 기구의 회장 겸 하원의원 회의의 의장(1980~85), 유럽 연방주의 연합의 독일부 회장(1980~89)를 역임하였다. 1991년 이래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의 명예 회장을 지내왔다.
2016년 8월 24일 바트크로칭겐의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3. 비판
- 나치 독일 시절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하고 루프트바페에서 복무했던 사실이 있어 논란이 된 바 있다. 셸은 이에 대해 당시 입당 신청을 한 것인지, 자동으로 된 것인지 기억할 수 없지만 당원 지위는 정지됐다고 해명했다.#
[1] 이중에는 '프람은 안된다'는 식으로 빌리 브란트 총리가 사생아 출신이란 점을 모욕하는 내용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