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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4:03:26

콰메 은크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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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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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프란시스 콰메 은크루마
Francis Kwame Nkrum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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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9년 9월 21일
영국령 골드코스트 은크로풀
사망 1972년 4월 27일 (향년 62세)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부쿠레슈티
종교 가톨릭 → 무종파적 그리스도교[1]
소속 정당 유나이티드 골드코스트 컨벤션(1947-1949)
협약 인민당(1949-1966)

1. 소개2. 생애
2.1. 초기 생애2.2. 죄수에서 대통령으로2.3. 독재와 실각
3. 현재와 평가4. 저작과 그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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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가나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초대 대통령으로 가나의 독립운동을 지휘하여 아프리카 독립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동시에 집권 후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실책을 거듭한 독재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당시 영국령이던 골드코스트 출생으로 어렸을 때 가톨릭 선교사의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그가 소속된 아칸 부족에서 낮은 계급을[2] 가졌지만 가나의 수도 아크라의 대학을 들어갔으며 졸업 후 교사가 되었다. 1935년에는 친족들에게서 돈을 빌려 미국으로 유학하여 링컨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45년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서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서아프리카 학생동맹[3]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를 위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47년 그는 다시 가나로 돌아와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49년에 투옥됐다.

2.2. 죄수에서 대통령으로

하지만 그의 행동으로 국내 위기가 계속되고 국가 행정이 마비되기에 이르자 그는 다시 체포되어 중노동이 부과되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51년 2월 8일에 실시된 첫 번째 총선에서 인민대회당은 자신들의 위력을 힘껏 발휘했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감옥에서 석방되어 1952년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는 1951년 미국을 잠시 방문하는 동안 링컨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민대회당은 의회의 전체 104석 중 72석을 확보해 여당이 되었지만 야당들은 지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온존시키는 것은 그에게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이에 따라 그는 1957년 12월 지역 정당들을 강제적으로 하나의 전국적인 야당으로 통합시켰으며 이듬해 위험인물로 간주되는 사람을 재판 없이 구금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예방구류법을 제정했다.

1960년 가나가 독립한 후 그는 국민투표를 통해 군주제를 폐지하고 가나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프리카의 현 문제는 서구가 가져온 자본주의의 악영향 때문이라고 보고 자본주의가 가져온 변화를 수용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흑인 민족주의와 아프리카 사회주의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공업과 교육, 외교, 정치 지지자 육성에 매진하였고 외부로는 자신이 아프리카의 실질적 맹주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2.3. 독재와 실각

은크루마의 독재에 대한 1964년 뉴욕타임즈 기사

감옥을 반대 세력 콜렉션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일당독재를 추진했으며 그의 지지자들이 권력을 남용해 반대파 등의 사람들을 무단으로 잡아가도 눈을 감고 무시하였고 자신이 가용할 자금 동원을 위해 카카오 유통 공사를 악용했다. 본디 이 기구는 골드 코스트에서 생산된 카카오를 모두 매입 수출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구체적으로 카카오의 가격 변동을 억제해 안정된 수입을 카카오 농가에 가져오려고 했지만 그는 자금 동원을 위해 카카오 매입 가격을 낮추고 그 차액을 착복했다. 이는 유통업자 및 농업인들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신생국이 겪는 무질서와 국가와 국민의 역량 부족으로 인한 혼란이 점점 가속화되었다.

거기에 말로는 좋은 것들을 갖다 붙이면서 실상은 아프리카의 각 지역/민족/부족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목놓아 비판하던 식민지 시절 국경선[4]과 지배 체계를 그대로 내지 약간 바꿔서 사용했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처넣었다. 예를 들어 1958년 금 광산 광부 파업 이후 만든 법을 이용해 1961년 철도 노동자 파업 당시 반대파들을 자신의 감옥 콜렉션에 수집한 일이 있다.

국내 경제에 대한 외국 자본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든 외국 기업의 국내 직접 투자를 불허하는 정책은 국내 개발을 추진 민간 자본을 해외에서 도입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했으며 그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카카오 집단농장도 실패로 끝났다. 카카오는 원래 소규모 농가에서도 충분히 채산성이 나오는 작물이며 집단화시켜야 할 필연성이 부족해서 정책 초기부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기는 커녕 반대가 심했지만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인 정책이었다. 집단농장 정책이 실패함에 따라 기계화에 필요한 비용도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볼타 강에 거대한 인공 호수를 만들고 그 전력으로 알루미늄 정련 공장 등의 공업지대를 가동시키고 동시에 주변국에 잉여 전력을 판매하고 외화를 얻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1962년 1월 착공하여 1966년부터 가동을 시작했지만 예상을 밑도는 성과밖에 얻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권력의 힘을 동원해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린 경찰의 서슬에 눌렸긴 했지만 국민의 그에 대한 불만은 높아져 갔으며 개인적으로는 식민지 부역자 위주로 구성된 경찰을 완전히 수중에 넣으며 자신의 호위 겸 수족으로 쓰면서도 암살 위협에 대해 상당히 두려움을 느꼈다 한다. 거기에 경제 상황은 날로 악화되어만 갔다. 1957년 2억 파운드의 외화와 2천만의 부채가 있었지만 1964년에는 부채가 4억 파운드로 불어났고 외화 보유고는 바닥을 쳤다. 그가 의욕적으로 주도한 외교전은 아프리카 통일기구(아프리카 연합의 전신)로 그 결실을 맺긴 했지만 정작 본부는 그의 반대 파벌이었던 에티오피아아디스 아바바에 위치했으며 기구의 성격도 이쪽에 가까운 등 자신의 사상을 제대로 투영시키지도 못해 반쪽짜리 성과가 되어 어디가서 맘껏 자랑하기엔 힘든 상황이었다.

1964년에는 득표율 99.91%라는 기적의 수학을 발휘한 부정선거를 벌여 일당독재로 종신대통령 체제를 어거지로 만들었으나 그가 국가 및 국민의 역량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벌린 공업 정책이 대차게 실패하는 바람에 경제 혼란이 발생하여 국내의 지지를 잃었고 그의 사상에 기반하여 사회주의 국가와 가깝게 지내고 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더더욱 공산권 제2세계 국가들에게 다가서는 대외정책으로 인해 서방 국가들의 어그로를 모는 행동을 한 덕분에 그는 국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었다.

결국 1966년 2월 24일 그가 베이징에 갔을 때 경찰로 이루어진 친위대 설치 및 군 숙청을 한 덕분에 은크루마 반대 세력이 강했던 군이 서방국가 첩보기관들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서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후 서아프리카로 돌아온 그는 기니에 망명처를 마련했는데 당시 기니 대통령 아메드 세쿠 투레는 그와의 유대를 표명하기 위하여 그를 기니의 공동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그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저작활동을 하다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1972년 4월 27일 암으로 인해 63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3. 현재와 평가

2010년대 초반 기준으로 젊은층은 그를 아프리카 독립의 아버지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좋아하지만 중장년층은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5] 유명한 독립운동가 출신이었으나 후에 독재자의 길을 걸으며 나라 경제를 파탄냈다는 것과 영국 대학교에서 학위를 딴 엘리트 출신이라는 것은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와도 비슷하다.

그의 실책으로 인해 혼란이 빚어졌고 이러한 혼란상이 199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졌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무리는 아니다. 현재 가나에서는 묘소와 기념비, 동상을 세워주는 등 그가 가나와 아프리카 독립에 대해 기여하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위해 열심히 활동한 공만큼은 인정하는 듯하다. 어쨌든 가나 내부에서도 평가가 굉장히 갈리는 인물이다.

2015년 SBS '좋은 아침' 설 특집에서 샘 오취리의 가나 고향집 방문기에서 방송 중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가자마자 맨먼저 독립광장을 찾아 그의 묘소에 참배하는 모습이 나왔다.

4. 저작과 그의 이데올로기

신식민주의는 가장 나쁜 형태의 제국주의이다. 신식민주의는 그것을 자행하는 자들에게는 무책임한 권력을 의미하며, 그것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교정 불가능한 착취를 의미한다.
그의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의 사상과 이론을 기초로 만든 아프리카 사회주의와 흑인 민족주의에 관한 책자들이다. 아프리카 신생국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개괄적으로 분석한 〈아프리카는 단결해야 한다(Africa Must Unite)〉, 그의 추종자들이 정립한 탈식민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도의 이론적 분석인 〈컨시언시즘(Consciencism)〉,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영국과 미국의 경제활동을 비판하는 〈신식민주의: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Neo-Colonialism:The Last Stage of Imperialism)〉 등이 있다.

그는 신식민주의에 대해 신식민주의의 본질은 거기에 종속되어 있는 국가가 이론상으로 독립적이며 국제상의 주권국으로서의 모든 외적 장식물들을 지니고 있지만, 실상은 그 경제 체제, 따라서 그 정치적인 정책은 외부의 지시를 받고 있다며 현재 국제 정세에서 적잖은 나라들의 미국 자본주의적 영향 아래 제대로된 주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현실을 현실적으로 직시하기도 했다.[6] 신식민주의라는 용어를 통해 분석한 그의 논리는 폭넓은 마르크스주의의 견지에서 주로 경제적으로 설명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표망했는데 아래는 그의 저작에 나온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독립이 민중과 소원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해방된 영토의 사회주의는 수많은 원칙들을 필요로 한다. 사회주의가 그 목적에 충실할 때, 사회주의는 민중의 사회적 발전이 식민주의에 의해 파괴당하기 이전에 있었던 평등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인 민중의 과거와 연결을 맺으려고 애쓴다. 사회주의는 식민주의의 결과들에서 민중의 이해관계에 기여하는 데 적합한 요소들(새로운 생산 방법과 새로운 경제 조직 방법 같은 것들)을 찾아낸다. 사회주의는 식민주의의 자본주의적 관습이 만들어 낸 변칙들과 광포한 이해관계의 확대를 견제하고 중지시기코자 한다. 사회주의는 민중의 심리학을 되찾아 거기에서 식민 심성을 지워 버린다. 또한 사회주의는 민중의 자립과 안전을 단호히 수호한다. 요컨대 사회주의는 변증법을, 즉 서로 적대하는 세력들에서의 창조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투쟁의 창조성을, 그리고 정말로 모든 변화에는 여러 세력의 작동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또한 유물론을 받아들여 이 유물론을 평등에 관한 사회적 어법으로 번역한다.[7]


[1] 1925년, 가톨릭식 세례를 받았고 미국 방문 중에는 흑인 장로교회에 출석하기도 했으며 이후 무종파적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정의했다.[2] 은크루마의 집안은 대장장이 집안이었는데 그 부족에서는 지위가 낮았다고 한다.[3] 여기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아프리카 독립운동에서 중심적 역할들을 많이 맡았다.[4] 다만 이건 어쩔 수 없다. 국제법적으로 비록 자결권과 충돌하는 감은 있지만 국제적 안정 차원에서 독립 이전의 행정적 경계를 그대로 독립 후 국경으로 인정하는 원칙이 널리 자리잡았기 때문이다.[5] 보통 독재자들이 중장년층에게 선호받고 젊은층들에게 비토받는 것과는 대조적이다.[6] 예를 들어 2023년 니제르 쿠데타(혹은 민중봉기)의 이유를 보자면 사건이 벌어진 이유에는 은크루마가 지적한 문제가 있었다. 니제르 인민들은 월 평균 소득이 51달러에 불과한 빈곤의 수렁에 빠져 있고 니제르는 프랑스 원자력 발전소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 사용되는 막대한 우라늄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니제르인 7명 중 1명만이 전력 혜택을 볼 정도로 가난하다. 니제르 인구의 1/5 미만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여전히 원시적인 자급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수준이다. 즉, 이런 부분을 콰메 은크루마는 지적했다.[7] 로버트 J.C 영, 김택현 옮김,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 박종철출판사, 2005, 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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