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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10:40:21

제리 존 롤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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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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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ry John Rawlings
1947년 6월 22일 ~ 2020년 11월 12일 (향년 73세)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군인 시절2.3. 1980년대 군정 시대2.4. 1990년대 민정 시대2.5. 2000년대와 그 이후

1. 개요

전직 가나 대통령이자 독재자. 종교는 가톨릭. 독립 후 혼란한 가나에서 여러 번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1] 정권을 잡았다. 집권기간 경제를 점차 성장시키고 90년대 민정 시대엔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 다툼을 했다는 평가와 재임 기간 인권을 탄압하고 부패 논란이 있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47년 6월 22일, 아크라에서 출생했다. 스코틀랜드인에웨족간의 혼혈이어서 그런지 피부가 상당히 하얀 편이다. 사미아 은크루마처럼 아치모타 학교에 입학했다.

2.2. 군인 시절

1968년부터 세콘디타코라디에서 공군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고, 1969년 학교를 졸업했다.

공군이 된 이후 당시 많은 활약을 해 여러 상을 받았다.

한편 가나에서는 콰메 은크루마 정권을 무너뜨린 안크라와 아프리파의 군정을 거쳐 에드워드 아쿠포 아도가 대통령이 되고 총리 코피 아브레파 부시아의 민정이 세워졌으나 이후 아쳄퐁 장군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그러나 아쳄퐁 장군도 프레드 아쿠포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1979년 제시 롤링스와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로 정권을 전복하고 가나를 지배하던 부패한 프레드 아쿠포의 군사정부에 대항해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다. 군사 쿠데타 성공 직후 라디오에서 방송한 롤링스의 육성 전국 방송.#
인민엘리트에 의해 압제당할 경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건 군대에 달려있다.
제리 존 롤링스는 자신의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하며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2]

이후 힐라 리만의 민간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고 잠시 물러났다. 이 기간 중 제리 존 롤링스는 전 정권 세력인 아쿠포, 아프리파, 아쳄퐁 세력 등 정적 약 300명을 숙청하고 처형했다.

2.3. 1980년대 군정 시대

1981년에 경제침체로 리만 정권이 흔들리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로 집권했다.[3] 처음엔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펴 국가의 공장을 감독하기 위해 노동자 평의회를 도입했고, 모든 지역 사회에 노동자 방어 위원회가 생겨났으며,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냉전 시절이 저물어가는걸 느꼈는지 2년만에 단념하고 곧 커피와 코코아 농장 등 가나의 국유 산업을 사유화하면서 경제 전반에 구조조정을 실시해 시장 경제를 받아들여 세계은행과 IMF의 호응을 얻었다. 이후 가나 경제는 연 5% 성장한다.[4] 허나 긴축 정책에 민심의 동요도 있었기에 롤링스는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번의 쿠데타 시도에 시달리는 등 집권기가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또 야당 지도자 투옥 등 정부의 탄압은 국내외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2.4. 1990년대 민정 시대

1992년 다당제를 도입해 민주 정부를 구성하고 언론자유를 허가하는 등 국내 정치를 안정시켰다. 이후 그간의 지지를 바탕으로 본인이 세운 사민주의 성향의 국민민주회의 민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약 58%의 득표율로 선거에서 크게 승리했다. 가나 제4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1996년 대선에서도 약 57%의 득표율로 연임에 성공한다. 2000년 3선 출마 금지를 지켜 (당시 50대라 정치인으론 나름 젊었음에도) 더 출마하지 않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상당수 아프리카 정치 지도자들이 위헌 논란을 무릅쓰고라도 3연임을 강행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2.5. 2000년대와 그 이후

2002년 존 쿠푸오르 정부에 저항을 촉구했고 이에 경찰의 심문을 받기도 했지만 일정 선은 지키며 정계와 거리를 두고 생활했다.

2010년 소말리아에 대한 아프리카 연합 특사를 역임했다.

2020년 11월 12일 사망했다.# 사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장례식은 2021년 1월 24일부터 27일까지 국장으로 치러졌다.
[1] 한번은 군사정부를, 한번은 본인이 세운 민간정부를 쿠데타로 뒤집어 엎었다.(...)[2] 여담으로 2021년 기니 쿠데타의 주역인 마마디 둠부야도 제리 롤링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쿠데타 행위를 옹호하기도 했다.[3] 헌데 웃긴건 리만 정권 역시 당시 대중들에겐 롤링스의 꼭두각시 정권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꼭두각시란 편견이 있는 정권을 자기가 또 뒤집어엎은 격. 이후 리만은 민주화된 1992년 대선에 출마해 약 6.7%의 득표율로 3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1998년 사망했다. 2019년 9월 대통령 취임 40주년을 기념하여 자선단체 힐라 리만 재단이 세워졌다.[4] 다만 가나의 80~90년대 GDP는 그래프상 큰 변화는 없다. 오히려 가나 경제가 확실히 성장하기 시작한건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