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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31 17:10:05

헤르만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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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rmannmueller.jpg
풀네임 Hermann Müller
헤르만 뮐러
출생 1876년 5월 18일
사망 1931년 3월 20일 (향년 54세)
재임기간 1920년 3월 27일 ~ 1920년 6월 20일 (제12대)
1928년 6월 28일 ~ 1930년 3월 27일 (제20대)
출신 정당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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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활동한 독일정치인이자 외교관. 두 차례 총리직을 역임했으며, 외교관으로는 독일 측 대표 중 하나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기도 했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발흥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독일의 혼란스런 정치상과 본인의 건강 악화로 인해 막지 못한 비운의 정치인이기도 하다.

2. 생애

만하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경제적 궁핍과 견습생 시절을 체험하면서 좌파적 정치 성향을 지니기 시작해서 189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한다. 사민당 초기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구하는 극좌계열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중도좌파적으로 성향이 변했다.[1] 특히나 유창한 외국어 구사 능력이 주특기여서 제2 인터내셔널의 독일측 대표자로 참가하기도 했고, 1차대전이 임박한 1914년 7월에는 프랑스사회주의자 대표와 양국 노동자들의 공동행보를 놓고 협상을 벌이기도 한다.[2].

1차대전 종결 이후로는 사민당의 대표를 맡던 와중에 외무장관으로 입각하여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을 하기도 했다.[3] 그 직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요청을 받고 총리로 취임해 독일 각지에서 벌어지는 극좌파의 무장폭동을 진압하는 한편으로 각종 준군사조직의 무장을 해제[4]하는 일에 전념한다.[5] 또한 의무교육의 실시, 실업자 구제 정책과 같은 사회보장제도의 기반을 다지는 데도 성공하였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적인 조건을 무력하게 승인한 사민당 정권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치솟으면서 1920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참패하고 결국 뮐러는 3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후 뮐러는 가톨릭 중앙당요제프 비르트 내각에 참여하였으나 세금 인상 문제[6] 및 근로시간 8시간 정책 실시 시기 등을 놓고 갈등을 빚다가 결국 1922년 연정이 붕괴되고 만다. 하지만 1923년 이후 인플레이션이 통제불가능의 상황에 치닫고 프랑스가 전쟁배상비를 조속히 납부할 것을 요구하며 루르 점령을 벌이는등 독일이 국가적 위기에 빠지자 1923년, 1924년, 1926년 등 여러 차례 거국적 대연정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7] 이후 1928년 총선에서 다시 사민당이 승리를 거두자 뮐러는 다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 복귀하게 된다.

그렇지만 뮐러 본인의 건강 자체가 워낙 안 좋았던 데다가, 연정파트너였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독일 인민당과 여전히 사사건건 국정 운영을 놓고 충돌이 벌어졌으며, 대외적으로도 폴란드, 소련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향하는 와중[8]1929년 대공황이라는 초대형 악재가 터져버린다. 대공황으로 독일 내 실업자의 수는 급증했고 이들에게 줄 무상급여를 위해서는 공적기금의 투입이 필요했지만, 보수계열 정당들이 이를 거부해 버린 것. 이에 뮐러는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비상대권 시행을 부탁했지만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고 이로써 뮐러 내각은 사망선고를 받는다. 그의 후임으로는 하인리히 브뤼닝이 취임한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좋지 않은 건강[9]에도 뮐러는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히틀러나치당의 집권을 막고자 노력하던 와중[10]1931년 결국 세상을 떠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Friedrichsfelde_Zentralfriedhof_03-2015_img11_Hermann_Mueller-Franken.jpg

[1] 이러한 성향으로 당내에서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동지였으며 로자 룩셈부르크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2] 그렇지만 독일 사민당은 계급 대신 조국을 선택했고, 이미 뮐러가 협상을 하던 와중에 독일 사민당은 독일 제국의 전비 조달을 위한 국채 발행에 찬성하고 있었다(...)[3] 전임 외무장관이자 총리인 필립 샤이데만이 베르사유 조약에 자기는 서명할 수 없다며 사임하면서 거의 독박을 뒤집어쓰는 심정으로 벌어진 일이다.[4] 가령 철모단이라든가 스파르타쿠스단이라든가...또한 동부 슐레지엔 지역에서 폴란드인의 봉기를 진압하고자 독일인들이 구성한 자경단들도 이러한 준군사조직에 포함된다.[5] 단순히 치안유지 목적이 아니라 협상국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러한 단체들을 모두 해산시킬 것을 요구했다.[6]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이끄는 보수계열의 독일 인민당소비세 인상을, 뮐러와 사민당은 부자증세를 주장했다.[7] 다만 원체 경제 문제를 둘러싼 입장이 서로 달랐으며 보수계열의 지역자치단체 정부가 사민당을 탄압하는 경우가 많아 연정이 자주 깨진다.[8] 폴란드와는 독일-폴란드 무역전쟁폴란드 내에 거주하는 독일계 소수민족 문제로, 소련과는 공산주의자 탄압 문제가 외교적인 논란으로 비화된 것.[9] 쓸개쪽이 안좋았다고 한다.[10] 사민당 의원들에게 설사 브뤼닝 내각에 한 명의 사민당 의원이 입각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브뤼닝 내각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줄 것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