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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15:23:28

몽테스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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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몽테스키외
Montesquieu
파일:Charles_Montesquieu.jpg
본명 샤를루이 드 스콩다[1]
Charles-Louis de Secondat
출생 1689년 1월 18일
프랑스 왕국 아키텐 라브레드[2]
사망 1755년 2월 10일 (향년 66세)
프랑스 왕국 파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철학자, 법관, 작가
학파 계몽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약력 보르도 고등법원 평정관
보르도 고등법원장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서명
파일:몽테스키외 서명.svg

1. 개요2. 생애3. 법의 정신
3.1. 흑인 노예무역 비판
4. 어록5. 주요 저서6. 여담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법률가, 역사가, 계몽주의 정치철학자. 익명으로 출판한 《법의 정신》에서 삼권분립을 최초로 주장하여 공화주의 이론과 법제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미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1689년 1월 18일 라 브레드 성에서 태어난 몽테스키외는 보르도 지방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부친 자크 드 스콩다(Jacques de Secondat)는 왕실 친위대의 무관 귀족이었으며 그가 7살 때 사망한 그의 모친 또한 영국 가문의 후예였다. 모친이 사망한 해에 그는 남작 작위와 라 브레드를 물려 받았다. 11살 때는 오라토리오 수도회가 운영하는 쥬이(Juilly) 학교로 보내져 1705년까지 역사와 지리, 라틴어 문학과 고전 교육을 받았다.

16살에 보르도 법과대학을 입학하여 19살에 법학학사 학위를 받고, 이틀 뒤에 법원변호사가 된다. 하지만 바로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고, 고등법원 재판장이었던 삼촌이 몽테스키외를 파리로 유학을 보내 법학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그가 24살이었던 1713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고향인 라 브레드로 귀향해서 법원판사가 되었고 1715년에는 부유한 신교도, 잔느 라르티그(Jeanne Lartigure)와 결혼하여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다. 1년 뒤에는 삼촌마저 죽으면서 몽테스키외에게 영지와 상당한 재산, 고등법원 재판장직을 물려준다.

1716년 보르도 아카데미에 가입하여 1719년에는 『지구의 자연사 프로젝트』를, 1720년 『물체의 중력의 원인에 관한 논고』와 『물체의 투명성의 원인에 관한 논고』 등을 작성했다. 그러나 1721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성의 저서인 《페르시아인의 편지》라는 편지형식의 소설을 익명으로 출간하였는데, 이는 발간되자마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친구 데몰레 신부가 말했듯이 "빵처럼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가상의 페르시아인 두 사람, 위스벡과 리카가 프랑스 각지를 체류하면서 프랑스 사회에서 느낀 점을 편지 형식으로 서술하고, 프랑스의 제도와 관습을 페르시아의 것과 비교한다. 특히 1710년에서 1720년 사이의 파리 생활방식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 절대 군주 정치 체제, 삼부 회의, 아카데미, 대학 등을 희화화한다. 게다가 가톨릭의 교리 및 관행과 교황으로부터 수도승에 이르는 사제집단에 대한 신랄한 조롱도 담겨져 있다.[3]

이는 순진한 이방인의 눈을 통해 프랑스 사회의 여러 모순과 문제점을 고발하려는 몽테스키외의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발은 더 나아가 프랑스 왕정의 절대주의와 그 사상적 기반으로 기독교 등 체제의 모순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이는 18세기에 가톨릭에 대해 행해진 가장 신랄한 공격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펼친 비평은 시대의 호응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작품의 대성공과 더불어 저자를 찾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정체가 밝혀져, 프랑스 전역에 알려진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에게 파리 사교계의 문이 열렸다. 이후 1728년까지 6여년간을 사교계에서 활동하면서 프랑스 최고 외교관이 되기 위한 야망을 키웠다. 마침내 1728년 만 39세의 나이에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된다.

이에 고무되어 외교 역량을 키우기 위해 유럽 전역에 걸친 긴 여행을 떠났다. 합스부르크 제국헝가리, 베네치아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나폴리 왕국, 제노바 공화국 등을 거쳐, 로마에서는 교황 베네딕토 13세의 접견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1729년엔 체스터필드 경을 동행하여 영국으로 가서 수상 로버트 월폴, 조너선 스위프트 등과 교류하며 1년 6개월간 체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1731년 프랑스 라 브레드로 돌아온 몽테스키외는 2년간의 연구 및 집필 활동에 들어가, 1734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로마인의 위대성과 쇠퇴의 원인에 관한 고찰》을 출간하였다.

이후 그는 학문에 더욱 열중하여 장장 15여 년에 이르는 연구와 집필 끝에 1748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대표적 서적이라 할 수 있는 《법의 정신》을 출간했다. 이맘때 쯤, 그의 시력은 점점 나빠졌기 때문에, 세 명의 비서가 차례로 몽테스키외가 구술한 것을 받아 적은 것이 이 책의 첫번째 원고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수많은 지식인 사이에서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1년반 사이에 21판을 찍었을 정도로 화제를 불러모았다. 하지만 종교적 권위를 비판한 점으로 말미암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되었다. 이에 몽테스키외는 1750년 『법의 정신 변호론』을 추가 집필함과 동시에 교황청에 선처를 부탁하였으나 무산되었다.

1755년, 파리를 휩쓴 열병에 몽테스키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고, 몽테스키외에게도 죽음이 다가온다. 그는 전통적인 가톨릭 의례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로서 몽테스키외의 임종이 시작되었다. 의례를 맡은 예수회 소속 루트 신부는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임종의 순간에 이르러 신부는 몽테스키외가 교회를 비판했던 입장들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몽테스키외는 그 요구에 끝까지 저항한다. 임종을 앞둔 몽테스키외의 침실이 일순간 교회와 철학자 사이의 투쟁의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결국 개인적 신념을 버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종교를 모욕하지도 않은채 1755년 2월 10일 조용히 숨을 거뒀다. 매장은 다음 날 오후 5시 생 쉴피스 성당의 생트주느비에브 성전에서 행해졌다. 철학자들 가운데서는 오로지 드니 디드로만이 참석했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디드로는 『백과전서』 제5권에 수록된 「절충주의」 항목에서 몽테스키외를 기리며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바쳤다.
그는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빛을 찾았고, 빛을 발견하자 탄식했다.
Alto quaesivit caelo lucem, ingemuitque reperta[4]

3. 법의 정신

몽테스키외의 저서로 삼권분립의 개념이 바로 이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세계 최초의 삼권분립 국가인 미국의 건국에도 이 책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는 이 책에서, 법이란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명령이 아니라 그 나라의 풍토, 풍속, 종교, 국민성 등에 기반한 국민의 정신인 '법의 정신(esprit des lois)’에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입법자는 이 법의 정신을 살펴 그 사회에 적합하고 개별적인 실정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그 사회의 정신이 어떤 정치체제와 적합한지를 논하기 위해, 기존에 논의되던 정치체제를 크게 3가지, 즉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으로 나누었다.[5] 공화정은 다수의 인민(민주정)이나 소수의 인민(귀족정)이 권력을 가지는 정부를 말하고, 군주정은 한 사람이 정해진 법에 의해 통치하는 정부를 말하며, 전제정은 한 사람이 법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와 변덕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정부를 말한다. 또한 각각의 정치 체제는 그 정부를 움직이게 하는 원리가 있다. 그 원리는 각 정부를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서, 일종의 인간 감정(Human passion)을 말한다.[6] 즉, 공화정에서는 시민들의 정치적 덕성,[7] 군주정에는 명예, 전제정은 공포가 각각의 정부에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감정이라는 것.

그는 또한 이러한 정치체제의 장단점을 논하면서, 그 중에서 '절제된 군주정'이 프랑스에 가장 적합한 체제라고 옹호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절제된 군주정'은 입헌군주제와 비슷한데, 귀족과 법관이 중간 계급이 되어서 군주의 독재를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이 서로 견제하며 조화를 이룰 것을 추구하는 삼권분립의 이론을 강조하며 그와 관련해 영국의 헌법을 면밀히 분석한다. 다만 행정권은 군주에, 사법권은 귀족에게, 입법권은 인민에게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에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세 정치 세력의 상호견제로서, 지금의 삼권분립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맥락하에서 그는 법적으로 보장된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강조한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이후 그의 이러한 '정치적 자유'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운동에 이론적으로 지대한 기여를 하게 된다.

3.1. 흑인 노예무역 비판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흑인 노예무역을 비판했다. 사이가 안좋았던 볼테르마저, 몽테스키외가 노예제를 비판한다고 하자 이를 지지하면서 "몽테스키외는 배운 것에서 거의 항상 틀렸었다. 왜냐하면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광신도와 노예제의 옹호자와 싸울 때는 거의 항상 옳았다."라고 말했을 정도.

어떤 사람은 《법의 정신》에서 이와 대조적으로 흑인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고 흑인에 대해 우월감을 내포하는 내용이 있다고 오해를 하기도 한다. # 이런 오해는 심지어 세계사 교과서에까지 실려서 2014학년도 교학사 교과서 179쪽에 보란 듯이 실려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는 몽테스키외가 당시 가톨릭의 이름을 빌려 흑인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지를 반어법으로 비꼰 것일 뿐이다.[8] 즉, 몽테스키외가 흑인 노예제를 옹호한다는 것은 착각이며, 책 전체를 제대로 읽었다면 저렇게 말할 수 없는 오독에 해당한다.

논란의 대목은 《법의 정신》 15편 「시민적 노예제 법의 풍토성과 관계」에 나온다. 15편 3문단에서 '노예제의 기원'을 따져보고, 4문단부터는 '사실 노예제는 좋다'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더니 5문단에서 '흑인 노예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흑인의 선천적 무능함과 열등함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까지 한번이라도 자세히 읽어봤다면 이것을 이루는 논리부터가 사실상 세계정세를 풍자하는 이야기, 2000년 전 그리스의 원전에서 빌려온 이야기 등등으로 엄청 화려하고 지독한 풍자로 가득 찬, 아무 말 대잔치를 연 거나 다름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후 6문단에서 몽테스키외는 노예제의 필요성까지 정당화한 뒤, 이후 '여기까지 모두 개소리였습니다'하고 7문단에서는 부푼 풍선을 뻥 터뜨리듯 노예제의 비합리성과 철폐를 주장한다. 결국 여기의 모든 인종차별적 내용은 최대한 장식적으로 부풀린 거대한 반어법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가장 옹호하는 가치는 평등애(平等愛)이며, 그는 바로 이 평등애를 바탕으로 공화 정부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정도로 평등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이러한 그에 대해 '평등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오독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4. 어록

Pour qu'on ne puisse abuser du pouvoir, il faut que, par la disposition des choses, le pouvoir arrête le pouvoir.[9]
우리는 권력이 권력을 남용할 수 없도록, 사물의 배치를 통해 권력이 권력을 멈추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Il n'y a point encore de liberté si la puissance de juger n'est pas séparée de la puissance législative et de l'exécutrice.[10]
재판권이 입법권이나 집행권과 분리되지 않는다면, 자유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Pour devenir vraiment grand, il faut se tenir avec les gens, pas au-dessus d'eux.[11]
진정으로 위대해지려면 사람들 위에 있지 말고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Il n'y a point de plus cruelle tyrannie que celle que l'on exerce à l'ombre des lois et avec les couleurs de la justice.[12]
법의 방패 아래서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보다 더 큰 폭정은 없다.
Les lois inutiles affaiblissent les lois nécessaires.[13]
쓸모없는 법은 필요한 법을 약화시킨다.
La liberté est le droit de faire tout ce que les lois permettent.[14]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이다.
L'amour de la république, dans une démocratie, est celui de la démocratie ; l'amour de la démocratie est celui de l'égalité.[15]
민주주의에서 공화국에 대한 사랑은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은 평등[16]에 대한 사랑이다.
Il faut pleurer les hommes à leur naissance, et non pas à leur mort.[17]
우리는 사람이 죽을 때가 아니라, 태어날 때 슬퍼해야 한다.
Ce n'est point le peuple naissant qui dégénère; il ne se perd que lorsque les hommes faits sont déjà corrompus.[18]
태어나는 젊은 세대는 타락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이미 부패했을 때만 타락한다.

5. 주요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페르시아인의 편지
Lettres persanes
<colbgcolor=#fff,#1f2023> 1721년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Considérations sur les causes de la grandeur des Romains et de leur décadence
1734년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1748년
법의 정신 변호론
Défense de l'Esprit des lois
1750년

6. 여담


[1] '몽테스키외'는 그의 작위명(제2대 몽테스키외 남작,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이다. 이를 합쳐서 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라고 서명한다.[2] 보르도 남쪽 18km에 위치하고 있는 라 브레드 성(chateau de la Brede)에서 태어났다.[3] 그 중에서는 잔 다르크를 경건을 가장한 협잡꾼이라고 비하한 것도 있다.[4] 원래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4권 692행에 나오는 말이다. 디드로가 재인용한것.[5]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법이기도 하다. 다만 다른 점은, 몽테스키외는 '공화정'을 다시 둘로 나누어서 다수의 인민이 권력을 가지면 '민주정', 소수의 인민이 권력을 가지면 '귀족정'으로 분류하였다.[6] 『법의 정신』 p.21[7] 단 귀족정에는 '절제' 또한 필요.[8] 한 번역본에서는 당시에 지식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조너선 스위프트식 풍자라는 평가도 존재한다.[9] 《법의 정신》 11편 4장에 나오는 말이다. 몽테스키외는 법을 '사물의 본질에서 유래하는 필연적 관계'라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들의 법을 갖고 있다. 신에게는 신의 법이 있고, 물질에는 물질의 법이 있으며, 인간에게는 인간의 법이 있고, 짐승에게는 짐승의 법이 있다. 따라서 이 어록은 필연적으로 서로를 견제할 수밖에 없는 그런 법(질서)을 가진 사물(권력의 주체)들을 배치하여 다른 권력의 폭주를 막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10] 《법의 정신》 11편 6장.[11] 출처 미확인. 몽테스키외 3대 주요 저작과 법의 정신 변호론에서도 해당 문장을 찾을 수 없어서 해당 문장의 진위가 의심된다. 구글링했을 때 영문으로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영문 "To become truly great, one has to stand with people, not above them."에서 프랑스어로 역번역된 문장으로 보인다. 다만, 영미권에서는 이 말이 마치 몽테스키외를 대표하는 명언으로 언급되고 있을 정도라서, 3대 주요 저작과 법의 정신 변호론 이외의 몽테스키외의 다른 출처에서 나온 문장일 수는 있다.[12]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14장 #[13] 《법의 정신》 24편 16장.[14] 《법의 정신》 11편 3장.[15] 《법의 정신》 5편 3장.[16] 여기서 말하는 평등은 법 앞에서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다. (경제적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님)[17] 《페르시아인의 편지》 40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해당 문장만 보면 반출생주의적인 문장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죽을 때 장례식에서의 과도한 슬픔과 사치를 비판하고 있는 문장이기 때문에 반출생주의적인 문장으로 단정할 수 없다.[18] 《법의 정신》 4편 5장.[19] 그나마 문예출판사의 이재형 번역이 편역본 중에서는 가장 평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