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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그라이츠 후국 Fürstentum Reuß-Greiz / Reuß älterer Linie | ||
국기 | 국장 | |
Ich Bau Auf Gott 나는 신으로부터 지어졌다 | ||
위치 | ||
1778년 ~ 1918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로이스 백국 | 바이마르 공화국 | |
역사 | ||
1778년 성립 1918년 멸망 | ||
지리 | ||
위치 | 독일 튀링겐 | |
수도 | 그라이츠 | |
인문환경 | ||
언어 | 독일어 | |
종교 | 루터파 개신교, 가톨릭 | |
민족 | 독일인 | |
정치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입헌군주제 | |
국가원수 | 후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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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을 구성했던 후국(Fürstentum)이었으며 수도는 그라이츠(Greiz)였다. 독일어 이름 Reuß älterer Linie을 따서 대로이스 후국이라고도 하는데 로이스 가문의 큰집 격이었다.1905년 기준으로 면적 316.7 km²으로 독일 제국을 구성하는 영방 가운데 가장 작았고, 인구는 7만 남짓이었다.[1]
2. 약사
로이스 가문이 다스려온 백국이었으나, 1778년 신성 로마 제국의 요제프 2세에 의해 후국으로 승격되었다. 한 뿌리였던 로이스게라 후국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6세를 기념하기 위해 공실의 모든 남자 구성원이 하인리히라는 이름을 썼다.북독일 연방을 거쳐 독일 제국의 구성원이 되었다. 독일 제국이 붕괴하면서 자유주로 개편되었다가, 로이스게라 후국과 합쳐져 1919년 로이스 인민주(Volksstaat Reuß)가 되었고, 1920년 5월 1일 신설된 튀링겐에 흡수되었다.
3. 왕사(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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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11세 | 하인리히 13세 | 하인리히 19세 | 하인리히 20세 | |
하인리히 22세 | 하인리히 24세 | |||
그라이츠 백작 | }}}}}}}}} |
로이스 공가는 모든 남자 구성원이 하인리히라는 이름을 썼다. 로이스-그라이츠의 경우에는 100세까지 모두 채워지면 다시 1세부터 시작하기로 했으나, 24세를 끝으로 단절되었다.
- 하인리히 11세 (1778-1800)
- 하인리히 13세 (1800-1817)
1747~1817. 신성 로마 제국 요제프 2세의 절친이었으며 오스트리아군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1807년 라인 동맹을 거쳐 독일 연방에 가입. 빈 회의에선 작센 왕국으로부터 땅을 조금 뜯어낸다. - 하인리히 19세 (1817-1836)
1790~1836. 딸 둘만 두었던 탓에(살리카법) 공위는 동생이 이어받는다.[2] - 하인리히 20세 (1836-1859)
1794~1859. 1848년 혁명 이후 헌법을 제정은 했으나 실제 시행은 않았다.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 - 하인리히 22세 (1859-1902)
1846~1902. 나이가 어려 21세가 될 때까지 모비인 헤센홈부르크의 카롤리네가 섭정했다. 카롤리네는 반프로이센파였으며 그 때문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 프로이센 왕국군에 게라가 점령되었고 10만 탈레르를 배상해야 했다. 1867년 친정을 시작하면서 헌법을 도입했다. 하인리히 22세도 부모처럼 반프로이센 시각을 견지했고, 보불전쟁의 승리 축하,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3세에 대한 추모,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과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모두 반대했고 의화단 운동 파병도 반대했다. 별명은 장난꾸러기 하인리히(Heinrich der Unartige). 4녀 헤르미네는 빌헬름 2세의 후처가 되었다. - 하인리히 24세 (1902-1918)
1878~1927. 어릴 적의 사고로 정신과 육체 모두 온전하지 않아 로이스게라 후국의 제후들이 섭정했다. 미혼이었으며 그가 사망함에 따라, 로이스-그라이츠 계통은 단절되었다.
3.1. 공위요구자
- 직계
- 하인리히 24세 (1918-1927)
- 슐라이츠 계통
- 하인리히 27세 (1858~1928)
1927년에 직계가 단절되면서 로이스게라 후국의 공위요구자인 하인리히 27세가 로이스 공가의 통합 수장이 되었다. - 하인리히 45세(1895~1945)
나치당원이었다. 미혼인 채로 소련군에 납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어 1962년 법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으면서 슐라이츠 계통이 단절되었다. - 쾨스트리츠 계통[3]
- 하인리히 4세(1919~2012) - 하인리히 45세의 15촌 조카.[4]
- 하인리히 14세 (1955~) - 하인리히 29세를 포함 슬하 2남 2녀
- 하인리히 29세 (1997~) 후계자.
4. 국가
로이스의 노래(Die Reußenhymne)1860년 율리우스 디텔(Julius Dietel)이 작사했다. 당시 독일 영방들의 국가들이 대개 영국 국가의 곡조를 빌린 것과 달리, 디텔은 요제프 하이든이 작사한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가의 곡조를 빌렸다. 즉 이 노래는 독일인의 노래와 곡조가 같다.
Gott, erhalt' in Deiner Gnaden Unsern Fürsten, Deinen Knecht! Wahre Ihn vor allem Schaden, Schmücke Ihn mit Licht und Recht! Geh' mit Ihm auf seinen Pfaden, Bis die letzte Stunde schlägt! Gott, erhalt' in Deiner Gnaden Unsern Fürsten, Deinen Knecht! Spende Glück Ihm, Heil und Frieden, Freude alle Tag' und Stund'! Lieb' und Treu' sei ihm beschieden In des Fürstenhauses Rund! Und Sein ganzes Volk hienieden Segne Ihn mit Herz und Mund: Gott, erhalt' in Deiner Gnaden Unsern Fürsten, Deinen Knecht! |
[1] 그래서 이름과는 달리 작은 집보다 영토가 작았다.[2] 장녀 루이제 카롤리네는 작센알텐부르크 공자 에두아르트(초대 공작 프리드리히의 7남)와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다가 사별하고 로이스게라 공가의 방계 가문인 로이스쾨스트리츠 가문의 하인리히 4세(후손인 아래의 쾨스트리츠 계통 출신 공위요구자와는 동명이인)와 재혼해 1남 3녀를 두었는데, 하인리히 4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증손자 하인리히 14세가 현재 로이스 공가의 수장을 맡고 있다.[3] 정작 이 가문의 본가는 오스트리아에 있다. 진첸도르프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성을 그 대가 끊기면서 19세기 초에 상속해서인데, 게다가 로이스 가문이 다스리던 영지에 있던 성들이 소군정에 의해 몰수되고 동독이 되어버리면서...[4] 상기한 바와 같이, 하인리히 19세의 장녀의 증손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