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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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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요하네스 브람스
Johannes Brahms
파일:FEW6oSFaIAAbZUi.jfif.jpg
출생 1833년 5월 7일
독일 연방 함부르크
사망 1897년 4월 3일 (향년 63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직업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사조 후기 낭만주의
학위 브레슬라우 대학교 (음악학 / 명예박사)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박사)
종교 개신교(루터회) → 무종교(불가지론)
서명 파일:요하네스 브람스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브람스 컬렉션
3. 작풍(作風)4. 주요 작품
4.1. 교향곡4.2. 관현악4.3. 협주곡4.4. 실내악4.5. 합창4.6. 가곡4.7. 피아노4.8. 오르간
5. 바그너와의 관계6. 기타
6.1.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요하네스 브람스독일 함부르크 출신으로 빈(비엔나)에서 주로 활동했던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이다. 고전파 음악의 중후한 작품으로 독일음악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브람스는 19세기 후반기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동시대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그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더불어 "3B"로 칭하기도 했다. 그는 교향곡,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 독주곡, 성악곡 등을 작곡했는데, 교향곡 1~4번, 대학축전 서곡, 피아노 협주곡 1번2번, 바이올린 협주곡, 클라리넷 5중주곡, 헝가리 무곡, 독일 레퀴엠, 자장가 등이 특히 유명하다.[1]

비엔나에서 음악가로서 당대 최고의 명예를 얻었으며,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와 함께 악성(樂聖)들의 안식처인 Vienna Central Cemetery[2] 32A구역에 안장되어있다.

2. 생애

파일:Johannes_Brahms_1853.jpg
20대의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는 1833년 5월 7일 북부 독일의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에서 요한 야코프 브람스(Johann Jakob Brahms, 1806–1872)와 요하나 헨리카 크리스티아네 브람스(Johanna Henrika Christiane Brahms, 혼전성은 니센·Nissen, 1789–1865)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브람스의 아버지는 호른더블베이스 연주자였다. 브람스는 5살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면서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7살부터는 오토 프리드리히 빌리발트 코셀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어린 브람스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브람스의 부모는 브람스를 앞세워서 미국으로 건너가 천재 신동 음악가로서 돈을 벌려 했으나 코셀이 극렬히 반대하여 결국 성사되지 못한다. 브람스는 10살에 코셀의 스승이었던 에두아르트 마르크스젠에게 보내져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마르크스젠에게서 작곡법과 음악론을 배우면서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한다. 브람스는 11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고 전해지나 젊은 시절에 작곡된 브람스의 여러 곡은 대부분 파기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브람스는 학교를 결국 중퇴하고 집안 살림을 돕고자 연회장, 술집, 식당을 전전하면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때로는 개인으로서 피아노를 다른 사람에게 교습하기도 하는 동안 틈틈이, 합창단을 지휘하고 합창 음악을 편곡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브람스의 음악계에 후일 훌륭한 합창 음악을 창작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53년, 브람스는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하노버에서 만나면서 생활이 전환된 후 요아힘과 연주 여행하면서 바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고 요아힘은 편지를 써서 작곡가이자 음악평론가인 로베르트 슈만에게 브람스를 소개했다. 브람스와 슈만 부부는 뒤셀도르프에서 만났다. 로베르트 슈만은 젊은 브람스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 젊은 음악가를 세상에 소개하고자 (자신의 생애 마지막 평론이 된) 평론 「새로운 길」을 발표하였고 이로써 브람스는 전 유럽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슈만의 아내인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과도 가까워졌는데, 브람스는 14살 연상인 클라라와 평생 교류했다. 1857년에 공식 직위를 처음으로 얻어 데트몰트 궁정에서 피아니스트로서 근무하게 되었고 1859년부터 1862년 가을까지는 고향인 함부르크에서 여성합창단을 지휘하고 합창곡을 작곡하며 지냈다.

이듬해인 1863년 브람스는 빈 징아카데미(Wiener Singakademie)의 지휘자로 초빙되어 본격적인 빈(비엔나)에서의 음악가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약 35년 동안 빈 교외의 Lichtental[3]과 Karlsgasse 4에 위치한 아파트[4] 등에서 거주하며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비롯한 뛰어난 음악인들과 교류하였고[5],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키게 된다. 1865년 2월부터 어머니의 사망을 추도하는 작품에 착수해 1868년에 대작 '독일 레퀴엠[6]'을 완성하고 같은 해 칸타타 '리날도[7]'를 작곡한다. 1869년에는 로베르트 슈만의 셋째 딸 유리에를 향한 자신의 실연을 노래한 "알토랩소디"를, 1871년에는 프로이센의 對프랑스전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관현악부 성악곡을 많이 만들었다.

1872년 가을부터 1875년까지는 빈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그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정기 연주회를 지휘하였다. 또 1876년에는 20여 년에 걸쳐 작곡한 "교향곡 제1번"을 초연한 후 자신의 대표작으로 남은 여러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게 되는데 1877년의 "교향곡 제2번", 1878년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가 그것들이다.1879년에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에 감사의 표시로 작곡한 곡이 "대학 축전 서곡"이다. 1883년에는 "교향곡 제3번"이, 1885년에는 "교향곡 제4번"이 완성되었다. 1890년까지 브람스는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비극적 서곡", "현악 5중주곡"을 작곡했다.

1890년에 이르러 브람스는 체력 한계와 창작력 쇠퇴로 결국 작곡을 접게 되었으나 이듬해인 1891년, 클라리넷 연주자 리하르트 뮐펠트의 연주를 듣고 다시 창작력과 영감을 회복한 후 말년까지 클라리넷을 위한 독주곡과 클라리넷이 중심이 되는 여러 실내악 곡을 작곡하게 된다. 1896년, 오랜 친구로 지내던 클라라 슈만이 병으로 쓰러지자 브람스는 기독교 성서에 토대한 "4개의 엄숙한 노래"를 작곡했다.

결국 1896년 5월 20일, 클라라 슈만이 죽었고 브람스의 건강도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서도 오르간을 위한 "11개의 코랄"을 작곡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897년 4월 3일[8], 브람스는 간암이 매우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2.1. 브람스 컬렉션

브람스는 그가 모았던 다른 작곡가들의 악보 원고나 자신의 자필 악보, 장서, 지인의 편지 등을 빈 악우협회에 기증했다. 이후 브람스와 관련 있는 자료가 체계적으로 더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한 악우협회 기록보관소의 브람스 컬렉션이 2005년 오스트리아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3. 작풍(作風)

"나도 브람스가 회색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네.[9] 옷감으로 치면 ' 트위드', 하지만 최상급의 트위드야."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0]
"우리가 모차르트처럼 아름다운 작품은 쓰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그처럼 순수한 작품을 씁시다." (If we cannot write with the beauty of Mozart, let us at least try to write with his purity.) - 요하네스 브람스[11]
"획기적인 사고나 생각은 단순히 하늘이 주신 영감일지도 모른다. 나한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잘 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일해서 내 것이 되기까지는 격멸해야 하는 선물이다. 빨리 얻으려고 서두를 필요도 없다. 악상은 마치 씨앗용 옥수수처럼 우리하곤 상관없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싹이 틀 것이다." - 요하네스 브람스[12]
브람스의 음악은 흔히 고전주의로 불리면서 당대 낭만주의를 배격한 듯하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다. 브람스는 슈만의 제자이듯이 낭만주의 음악을 알만큼 알았다. 그는 고전주의다운 형식 체계를 지키면서 낭만주의다운 정서를 결합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당대 작곡가들처럼 화려하고 찬란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지는 않았다. 이것은 브람스가 북독일 출신으로 북독일 지역의 소박하고 강건한 스타일에 많이 영향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의 지나치게 화려한 스타일은 선호하지 않았다. 브람스의 음악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순수하고 소박하여 사람의 마음을 더 끌리게 한다. 브람스의 음악은 후에 드보르작[13]쇤베르크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4. 주요 작품

4.1. 교향곡

4.2. 관현악

브람스, 세레나데 A장조, Op.16브람스, 대학 축전 서곡

4.3. 협주곡

2중 협주곡 Op.102피아노 협주곡 Op.15&83

4.4. 실내악

브람스, 현악 6중주 Op.18브람스, 피아노 5중주 op.34
브람스, 피아노 3중주 Op.101브람스, 클라리넷 5중주, Op.115

브람스는 실내악에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해도 될 정도로 주옥같은 작품들로 가득하다.

4.5. 합창

4.6. 가곡

브람스, 항해, Op.96 No.4 브람스, 자장가, Op.49 No.4
브람스, 세레나데, Op.106 No.1브람스, 그대 어찌, 나의 여왕이시여, Op.32 No.9
브람스, 오월의 밤, Op.43 No.2브람스, 영원한 사랑에 대하여, Op.43 No.1
브람스, 죽음 그것은 서늘한 밤, Op.96 No.1브람스, 허락하시오, 아리따운 아가씨여, WoO 33 No.2
그 외의 다수의 가곡 및 성악곡이 있다.

4.7. 피아노

브람스, Op.5브람스, Op.24
브람스, Op.39 No.15브람스, Op.76 No.2
브람스, Op.117 No.2브람스, op.118 No.2
브람스, Op.118 No.6브람스, Op.119 No.2
브람스, Op.10 No.2브람스, Op.116 No.2

4.8. 오르간

WoO 7Op.122 No.10

5. 바그너와의 관계

스승인 슈만과 함께 고전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당대 민족주의 음악의 대표격이었던 리하르트 바그너와는 경쟁, 대립 관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외부 여러 요인과 개인에 국한된 몇 가지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서 된 측면을 무시하기 어렵다.

우선 바그너와 브람스는 음악계에서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20살의 나이차가 있었을 뿐 아니라, 바그너가 이미 30대 초반에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를 잇달아 성공시키며 전독일을 대표하는 거장 작곡가로 자기매김한 반면, 브람스는 비교적 대기만성형의 작곡가로 40대 이후에 작곡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다졌다. 이처럼 성공한 음악가로서 바그너와 브람스는 거의 3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있었다.

특히 바그너에 대한 브람스의 태도가 초기에 일관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정확한 사실관계를 밝히기 힘들다. 우선 이 둘의 싸움에 먼저 불을 지핀 것은 브람스였다. 20대의 무명 음악가 브람스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슈만의 음악신보에 바그너, 리스트가 주창하던 신음악을 비판하여 당시 음악계에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무명의 젊은 청년들의 호기에 가까운 도발에 바그너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사건이 브람스 쪽에서는 항상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바그너 쪽에서는 서술된 자료가 없는 것으로 볼때, 바그너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듯 하다. 이 사건으로 미루어볼 때 이미 20대 초반에 브람스는 바그너의 신음악에 대한 거부감과 적대감을 가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미 독일 음악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다진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 브람스는 바그너에 대해 공손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브람스의 음악적 소신이 바뀌었다기 보다 사회적 처신술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브람스는 바그너의 악극을 좋아하고 바그너의 악극 공연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브람스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말했고, 바그너에게 직접 스코어를 요청하기도 했다. 브람스의 이러한 행동은 진심에서 나왔을 수도 있고, 당시 음악계의 거장이었던 바그너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바그너 역시 속으로는 브람스를 높이 평가했다. 바그너는 브람스가 아직 무명 작곡가일때 우연히 브람스의 초기 실내악 작품을 듣고 단번에 브람스의 천재성을 알아차리고 나중에 큰 작곡가로 성장할 것을 직감했다.

한번은 브람스가 헨델의 작품을 지휘하는 연주회에 바그너가 우연히 참석했고 바그너는 브람스를 극찬했다. 물론 작곡가로서 격찬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합창지휘자로 칭찬한 것에 불과했다. 그 극찬에 고무된 브람스는 "바그너를 대적할 작곡가는 없을 것"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후 두 사람의 사이 좋은 관계는 깨지고 만다. 브람스의 연주를 다시 감상할 기회가 있었던 바그너는 이번에는 "전통 안에 갇힌 인재"라면서 브람스를 평가절하했고 심지어 아내 코지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나 작곡할 위인"이라고까지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브람스를 대상으로 바그너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자세히는 모르나 후세 음악학자들은 바그너의 여성 편력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브람스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자필 서명이나 편지를 수집하는 취미도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높이 평가하던 바그너의 자필도 수집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그너가 당시 유명했던 패션 디자이너 골드박에게 보낸 러브레터가 브람스의 수중에 우연히 들어간게 화근이 되어 버렸다. 브람스는 자신의 후견인이나 다름없던 당대 저명한 음악 평론가 한슬릭에게 이 러브레터를 보였고[58], 바그너를 공격할 거리를 찾던 한슬릭에게 좋은 무기를 쥐어준 꼴이 되었다. 한슬릭은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문제삼아 공세했고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빈 공연을 결국 포기해야 했다. 한슬릭이 자신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었는지 사유를 알게 된 바그너는 격분해서 브람스를 마구 공격했다.[59]

바그너는 브람스의 독신을 헐뜯었고 심지어 브람스를 고자·내시라고 하기까지 했다고 하며, "오늘은 길거리의 엉터리 시인이며, 내일은 헨델의 할렐루야가 발쟁이로, 또 어떤 때는 유대인 깡깡이쟁이로 쏘다닐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브람스는 표면적으로 바그너의 독설에 맞대응하지 않았지만 바그너로 인해 매우 심기가 상했다.

바그너가 브람스의 명예박사학위 수여까지도 고깝게 볼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악화했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한슬릭의 탓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 바그너의 진보성을 띤 음악을 고깝게 보던 한슬릭은 바그너를 대상으로 한 대항마로 브람스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다. 언론과 평론가 그룹이 별 상관도 없는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어서 싸움을 붙이는 현상이 이와 유사하다.

바그너와 브람스를 추종하는 사람들 간의 골은 깊어져서 이것은 후에도 계속 영향을 끼쳤다.[60] [61]

이렇다 보니 일반인들 내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는 '대스타 바그너의 공세에 쩔쩔매는 순수한 브람스'라는 식의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양측의 경쟁에서 브람스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거나 신사적이라는 인식이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바그너가 건재했던 시절의 이야기고, 나중에 바그너가 죽자 그 반대로 브람스파가 바그너파를 박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브람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바그너를 열렬히 추종했던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을 가혹하게 비판하여 그에게 많은 시련과 좌절을 안겼다. 또 브람스는 브루크너의 수제자였던 재능있는 젊은 작곡가 한스 로트가 베토벤상을 받는 것을 가로막고, 그의 교향곡 1번의 초연을 좌절시켰다. 고아로 여동생과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했던 불운한 청년 한스 로트는 이 충격으로 브람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소리치고 다니다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요절했다.

또한 브람스파는 젊은 구스타프 말러가 "탄식의 노래"로 베토벤상을 받는 것도 가로막았다. 말러는 베토벤상에서 떨어지면서 전업 작곡가의 길을 포기하고 지휘자를 생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말러는 평생에 걸쳐 브람스의 음악을 평가절하했다.[62] 그러나 말러는 자신의 선배였던 한스 로트가 브람스에 의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목격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브람스와 한슬릭의 무서움을 절감하고 있었다. 말러는 속으로는 브람스를 고깝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브람스를 비위를 잘 맞춰주며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함부르크 지휘자 시절 말러는 최만년의 브람스의 말동무가 되어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브람스의 얘기를 들어주는 말동무가 되었다. 비록 말러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브람스의 뒷담화를 했지만... 여하튼 덕분에 브람스는 젊은 지휘자 말러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고 한슬릭 등에게 말러의 지휘를 자주 칭찬했다. 이렇게 브람스파의 지지를 등에 업게 된 말러는 승승장구하여 1897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당시 빈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로 거론되던 인물들은 펠릭스 모틀, 헤르만 레비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바그너의 제자들이었다. 빈 음악계의 거물 한슬릭은 이들을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당시 브람스파라고 생각하고 있던 소장파 지휘자 말러를 밀어 그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랬다고 브람스가 바그너의 음악적 영향력까지 인정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브람스의 음악적 동지이기도 했던 체코의 유명한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 역시 한 때는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한 적이 있으며, 그것은 드보르자크의 대부분의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었고, 그런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을 브람스가 밀어준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던 게 아마도 당시 음악계의 상황이 바그너라는 강력한 태풍의 영향권을 브람스조차도 벗어나기가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브람스가 눈감아준 것인지도 모른다.

6. 기타

6.1. 매체에서



[1] 19세기 독일 음악계는 리스트-바그너 진영과 브람스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했다. 교향시나 오페라처럼 묘사적이거나 줄거리 있는 음악을 주로 쓰는 쪽과 변주곡이나 교향곡 같은 고전적 형식을 갖춘 절대음악#을 지지하는 이들간의 갈등이었다. 브람스는 음악에서 특정한 묘사나 이야기를 배제하는 절대음악을 지향했으며, 오페라도 쓰지 않았다.[2] 중앙묘지 (네이버 지식백과)[3] Brahms_House (Baden-Baden) (위키백과 영어문서)[4] http://www.viennatouristguide.at/Gedenktafeln/pers/B/brahms_4.htm[5] Smithsonian : Johann Strauss II and Johannes Brahms[6] J. Brahms, Ein deutsches Requiem, Op.45 (네이버 지식백과)[7] Rinaldo (cantata) (위키백과 영어문서)[8] 64세 생일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9]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같은 색채감이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아니라는 의미이다.[10] 롤랑 마뉘엘 『음악의 기쁨 3』 (북노마드, 2014년), pp. 142 -143[11] https://www.google.ca/books/edition/The_Faber_Pocket_Guide_to_Mozart/wbPcoQSIv0sC?hl=en&gbpv=1&pg=PT18 (1894년 드보르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12] 1878년 일기[13] 보헤미아의 브람스.[14] 두 개의 세레나데는 교향곡을 작곡하기 전의 작품이다.[15] 브람스가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을 먼저 썼으나 작품번호를 Op.56b로 하고 나중에 쓴 관현악 버전의 이 곡을 Op.56a로 했다. 하이든의 디베르티멘토 1번의 2악장 주제선율(부제: 성 안토니의 찬가 Chorale St. Antoni)을 먼저 주제로 제시하고 8개의 다채로운 변주곡이 이어지며 파사칼리아 형식의 대위법적 피날레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주제선율을 정말 하이든이 작곡했는지에 대해 일부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16] 악기편성이 브람스의 전체 관현악곡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타악기가 많이 사용되어 밝은 느낌을 준다. 현재지명은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인 당시 독일의 '브레슬라우'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게되어 감사의 표시로 작곡해 대학에 헌정했다. 그가 젊은 시절 들어 기억하는 4곡의 '학생의 노래' 선율들을 곡전반에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극적인 고양감에 이르게 한다.[17] 대학축전서곡과 같은 시기에 작곡되어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브레슬라우'에서 1881년(48세) 그의 지휘로 두 곡이 함께 초연되었다.[18] 브람스의 친구이자 선배였던 요제프 요아힘에게 헌정되었다. 사실 이 곡은 이전에 비오티의 바이올린 협주곡 22번을 듣고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구상하던 차에 파블로 데 사라사테의 연주를 듣고 자극을 받아 작곡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브람스는 이 곡을 사라사테에게 헌정하고자 의견을 물었지만 사라사테는 "10분동안 멍하니 오보에 연주를 듣고 서 있기 싫다"는 이유로 거부하였으며,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에게도 요청이 있었으나 "연주 불가"라며 거절당했다. 결국 작곡을 도와주기도 했던 요아힘에게 헌정하기로 하고 초연을 맡겼으나 요아힘조차도 너무 기교적인 부분이 있다며 작곡 과정에서부터 수정을 요청했을 정도이다. 게다가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거쳐 마지막으로 제안이 간 것이기 때문에 높은 기교를 요구하는 이 곡을 짧은 시간에 연습하느라 대단히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19] 독주자가 화려하게 기교를 표현하기 알맞은 다른 바이올린 협주곡들과 달리 이 곡은 관현악단의 부분이 거의 교향곡에 가까울 정도로 장엄하게 작곡되었으며, 바이올린의 경우 높은 기교를 요구하는 반면 화려함이 없어서 "바이올린에 반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혹평도 들었다. 게다가 초기에는 피아노 협주곡 2번처럼 4악장제로 구상하였다가 요아힘이 설득하여 3악장제로 작곡하였다고 한다. 이후 요아힘, 외젠 이자이을 비롯한 여러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면서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연주자들이 가장 자주 연주하는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가 되었다.[20] 두 피아노 협주곡 작품 번호를 비교해보면, 작곡 시기 간에 엄청난 간극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2번 협주곡은 피아노가 참여한 교향곡을 방불케 하며 피아니스트에게 음악적으로나 기교적으로나 무척 힘든 난관을 안겨주는 대곡이다. 또한 3악장이 기본 틀인 다른 협주곡들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4악장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21] 바이올린2,비올라2,첼로2 구성이며 2악장의 쓸쓸하고 인상적인 멜로디가 매우 유명한데 게임 노바1492의 BGM이 이 곡 2악장의 리믹스이다.[22] 현악 4중주에 비올라가 추가되었다.[23] 1862년 처음에는 현악 5중주로 작곡됐다가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로 편곡됐다. 1864년 브람스는 두 버전을 절충한 피아노 5중주 형식으로 최종 완성했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이지만 열정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태생이 현악 5중주인지라 2악장 등에서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D.956)를 어렴풋이 연상케 하기도 한다.[24] 절친이었던 오스트리아 의사 테오도르 빌로스(현대 외과학의 아버지)에게 헌정한 곡, Billroth 수술법을 창시한 그 빌로스.[25] 쇤베르크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버전이 있다.[26] 연주시간이 50여분 내외로 그의 실내악중 가장 긴 시간을 요한다.[27] 다악장의 악곡치고는 특이하게 느린 악장으로 시작한다. 브람스의 아버지가 호른 연주자였으며 분명 어려서부터 들어온 아버지의 호른연주가 각인되어 이 곡에서 다양한 감정들을 '호른'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음을 느낄 수 있다.[28] 3악장에 자신의 가곡 Op.59-3 비의 노래(Regenlied) 선율이 사용되어 "비의 노래"라는 부제로 불린다.[29] 독일 작곡가 Paul Klengel(1854~1935)에 의한 피아노 독주버전이 있다.[30] 클라리넷 파트는 비올라나 바이올린으로 연주되기도 하는데 브람스가 직접 편곡했다.[31] 클라리넷 파트는 비올라나 바이올린으로 연주되기도 하는데 브람스가 직접 편곡했다.[32] 가사는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소설 "히페리온"에 나오는 시이다.[33] 모두 11곡으로 4명의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곡. 합창으로도 불린다.[34] 독일어 원제는 9 Lieder und Gesänge. 마지막곡이 "Wie bist du, meine Königin"이다.[35] 낭만시대 독일작가 루트비히 티크(1773~1853)의 서정시에 곡을 붙였다.[36] 이 작품 중 4번째 곡이 그 유명한 브람스의 자장가다.[37] 원제는 Liebeslieder Waltzes. 모두 18곡이며 피아노는 네손을 위한 연탄곡이다.[38] 독일어 원제는 8 Lieder und Gesänge 이다.[39] 3번째 곡 '비의 노래'가 바이올린 소나타 1번 3악장에 차용되었다.[40] 작품번호 52번 '사랑의 노래 왈츠'와 연관된 작품. 모두 15곡이며 이 곡도 Op.52와 같이 피아노는 네손을 위한 연탄곡이다. 마지막곡만 괴테의 가사이다.[41] 4번째곡 Vergebliches Ständchen(헛된 세레나데)가 알려져 있다.[42] 가사는 성경 <전도서> <고린도전서> 등의 구절들로 되어있다.[43] 곡이 1번부터 21번까지로 장난 아니게 많기에 일일이 열거하지 않았다. 다만, 특히 유명한 건 5번. 이중 1, 3, 10번은 브람스가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했고 드보르작도 17~21번을 편곡했다. 후에 이 집시음악 모음집에 대해 저작권문제가 생겼을 때 브람스는 '편곡'이라 표기했음을 주장해 이길 수 있었다.[44] 브람스 소나타 중에서도 제일 잘 연주되는 곡이며, 피아노 소나타에서는 드문 5개 악장으로 이루어진 40분 정도의 연주 시간을 소요하는 대곡이다. 초기 작품이지만 깊은 음악적 성숙도와 높은 기교를 요구하는 난곡이다. 4악장을 비롯 전체적으로 베토벤의 '운명 모티프'가 짙게 깔려있다.[45] 슈만이 1854년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여 충격을 받은 클라라 슈만을 위로하기 위해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그녀에게 헌정했다. 곡 전반에 슈만에 대한 존경과 더불어 클라라를 위한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으며, 변주곡의 주제는 슈만의 "다채로운 작품(Bunte Blätter) Op.99"의 네 번째 곡이며 주제 제시후 16개의 변주곡이 이어진다.(다만, 변주 9는 슈만의 "다채로운 작품 op.99"의 5번째 곡을 기반으로 세 손 효과를 이용해 엄지손가락에 4번째 곡의 선율을 섞어놓았다.)[46] 브람스가 1861년 클라라 슈만의 42번째 생일에 그녀에게 헌정하여 그녀가 직접 초연했다. 일부에서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과 더불어 3대 피아노 변주곡으로 부르기도 하며 브람스와 대척점에 있었던 바그너조차 이 곡을 듣고 진가를 인정했다고 한다. 이 곡의 주제는 헨델의 건반악기(하프시코드)를 위한 모음곡 HWV.434중 3번째 곡 Aria and Variation이다.[47] Op.34의 피아노 5중주 F단조를 완성하기전 피아노 버전이다. 클라라 슈만은 이 버전에 비판적이었지만 브람스는 작품번호 34b로 따로 출판했다.[48] 2권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주제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으로 동일하고 1권과 2권의 변주들이 차이가 있는데, 기교적인 면에서는 1권의 난이도가 더 높다.[49] 16곡 중 No.15 A플랫장조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50] 1878년(45세) 작곡. 1~2번:Capriccio, 3~4번:Intermezzo, 5번:Capriccio, 6~7번:Intermezzo, 8번:Capriccio.[51] 1879년(46세) 작곡.[52] 1892년(59세) 작곡. 1번 :Capriccio, 2번:Intermezzo, 3번:Capriccio, 4~6번:Intermezzo, 7번:Capriccio.[53] 1892년(59세) 작곡.[54] 이 작품은 브람스 자신이 스스로 '내 고뇌의 자장가'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1번 E♭장조는 낭만파 시인 헬더의 <여러 국민의 소리>라는 민요 시집 속에서 스코틀랜드의 자장가 일부를 인용했다.[55] 1893년(60세) 작곡. 1~2번:Intermezzo, 3번:Ballade, 4번:Intermezzo, 5번:Romance, 6번:Intermezzo.[56] 6곡 중 2번 A장조 Intermezzo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영화 색, 계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흐른다. 그 외 3번 G단조 Ballade도 꽤 알려져 있는 편.[57] 1893년(60세) 작곡. 1~3번:Intermezzo, 4번:Rhapsody.[58] 별 생각이 없었던 듯하지만.[59] 바그너는 성격이 조금 다혈질이었다.[60] 바그너에게 마누라를 도둑맞은 한스 폰 뷜로가 브람스 진영으로 돌아선 것은 유명하다.[61] 심지어 국민악파도 브람스 진영과 바그너 진영으로 나뉘었는데, 드보르자크가 '보헤미아의 브람스'라고 불린 것, 스메타나를 브람스 진영에서 공격한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62]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텅빈 음악이라 혹평했다고 하지만, 말러가 뉴욕필에 재직하던 시절 브람스의 교향곡 1번과 3번을 각각 두 차례 지휘한 바 있기도 하다.[63] 한국어 제목: '이수'(離愁)[64] 김민재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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