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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20:55:30

아스토르 피아졸라

서양 음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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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아르헨티나의 방송국 텔레페가 아르헨티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아르헨티나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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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 레안드로 알렘 레온 히에코 리산드로 데 라 토레 롤라 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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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나 아이마르 루이스 페데리코 를루아르 루이스 산드리니 마누 지노빌리 마누엘 도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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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노 모레노 마리아노 모레스 마리오 켐페스 마리기타 산체스 마르틴 미겔 데 구에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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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엘레나 월시 메르세데스 소사 니콜리노 로체 니니 마르샬 노르마 알레안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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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살바도르 마사 산드로 데 아메리카 타토 보레스 티타 메레요 술 솔라르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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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아스토르 피아졸라
Astor Piazzolla
파일:attachment/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_Piazzolla.jpg
본명 아스토르 판텔레온 피아졸라[1]
Astor Pantaleón Piazzolla
출생 1921년 3월 11일
아르헨티나 마르 델 플라타
사망 1992년 7월 4일 (향년 71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직업 작곡가, 음악가
장르 탱고
악기 반도네온
활동 1933년 ~ 1990년
종교 가톨릭[2]

1. 개요2. 생애
2.1. 초창기2.2. 중반기2.3. 말년
3.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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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에게 있어 탱고는 발보다 귀를 위한 것이다."

아르헨티나탱고 클래식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와 함께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춤곡이었던 탱고 음악에 재즈, 클래식, 등 다른 장르 음악들의 영향을 대폭 반영한 누에보 탱고(Nuevo Tango)를 내세워 감상용 음악, 순수 음악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 대중 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음악으로서의 탱고는 대부분 피아졸라가 작곡한 것이거나, 그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은 것들이다. 특히 클래식을 탱고와 재즈에 접목해 새로운 접근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쉽게 말해서 19세기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왈츠를 통해서 해낸 일을, 피아졸라는 20세기에 탱고를 통해 해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 리베르탱고(Libertango), 김연아의 2013-14시즌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유명한 아디오스 노니노(Adiós nonino), 오블리비언, 신비한 푸가(Fuga y Misterio), 사계(four seasons)[3][4]등이 있다.

2. 생애

2.1. 초창기

피아졸라는 1921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부의 마르 델 플라타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아버지가 반도네온을 물려주면서 처음으로 음악을 시작하였다. 1930년 그는 부모를 따라 유년기를 미국 뉴욕에서 보냈다. 이 당시 그는 탱고보다는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주로 듣고, 바흐, 슈만의 음악과 유행하던 재즈 음악을 반도네온으로 연주하길 좋아했는데, 이는 그가 주로 하던 탱고와 다른 장르의 음악 사이의 크로스오버에도 영향을 미친다. 피아졸라는 열세 살때 당대 탱고의 거장 카를로스 가르델을 만나고, 그의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 가르델은 그에게 '연주 실력은 훌륭하지만, 탱고를 양키(gringo)[5][6]처럼 연주한다'는 평을 했는데, 그 당시 피아졸라가 재즈, 클래식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정확한 지적이었고, 나중에 피아졸라가 정통 탱고에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면 수십년 후를 예언한 평이었다. 한편으로 가르델은 피아졸라의 연주 실력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할 기회를 주기도 했고, 자신의 연주 여행에 함께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피아졸라의 아버지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했는데, 가르델과 그의 악단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피아졸라는 인터뷰에서 '내가 그때 간다고 우겼거나 아버지가 허락했으면, 반도네온 대신 구름 위에서 하프를 뜯고 있었겠지…'라는 말을 했다.

1936년, 아르헨티나의 고향으로 가족과 돌아오면서 피아졸라는 여러 탱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 당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바르다로의 6중주단이었다. 이 당시 탱고는 빅 밴드 오케스트라가 주로 연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실내악 탱고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피아졸라도 이후 이에 영향을 받아 실내악단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한다. 그의 나이 17살 때, 피아졸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상경해 당시 최고의 탱고 악단이었던 아니발 트로일로의 악단에 연주자로 들어간다. 피아졸라는 그 곳에서 월 240달러를 받으며 반도네온 연주 외에도 편곡, 피아노 연주 등을 맡으며 재능을 드러냈지만, 본인은 '카바레는 매음굴이었다'고 회상하면서 그 시절에 대해 넌더리를 내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숙소는 개판이었고, 여러 동료들 중 약 안 빨고, 여자랑 안 논 것도 그뿐이었다고.

그러던 중 1941년,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찾아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평해달라고 요청하는 패기를 보였고, 루빈스타인은 이 부탁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면서 피아노 파트를 연주하고서는 '다 좋은데, 오케스트라 파트는 어디 있나?'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게 없었다. 음악이론이 부족했던 피아졸라는 피아노 독주곡을 쓰고는 협주곡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루빈스타인은 그럼에도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보고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7]를 사사할 기회를 주었다.

이후 피아졸라는 히나스테라의 밑에서 음악 이론을 배우고, 문학, 미술 등 교양을 쌓으면서 탱고 연주자로도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첫 아내 데데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6년간 히나스테라에게 배우면서 첫 클래식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 피아졸라는 점점 기성 탱고 음악계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작품 편곡을 놓고 팔리게 만들려는 트로일로에게 반발을 맞기도 했고, 피아졸라도 맘에 안드는 동료나 공연 와서 들으라는 음악은 안듣고 염장질이나 하던[8] 손님들에게 폭죽이나 쓰레기를 던졌다고 한다. 결국 이런저런 문제가 쌓인 끝에 그는 1944년 트로일로의 악단을 떠나 1946년 자신만의 악단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오르케스타[9] 티피카'(이하 티피카)를 결성하고, 작품을 발표하면서 독립해나갔다.

2.2. 중반기

티피카 악단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탱고를 알리며 그의 지지자를 모으던 피아졸라는 다른 한 편으로 클래식 작곡에도 전념했다. 버르토크,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실내악 위주로 창작하였는데, 1945년에는 그의 작품 번호 1번 '현악 합주와 하프를 위한 모음곡'이 초연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인정한 첫 탱고곡 '엘 데스반데(El desbande)'도 내놓지만, 당시만 해도 피아졸라는 탱고보다는 클래식을 더 좋아하였다. 아니, '반도네온 들고 밖에 돌아다니기 쪽팔리다'고 했을 정도로 탱고를 반쯤 혐오하였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탱고 저리가, 나도 스트라빈스키 될거야!!'같은 심정으로 살았다고. 한편으로 그의 악단 티피카도 열성 팬들을 모으긴 했지만 댄스 반주로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크게 얻지 못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페론 부부가 정권을 잡고 독재자처럼 권력을 휘두르면서 페론 정권 찬양의 압박이 악단 안팎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페론주의자였던 피아졸라도 본인이 흑역사로 인정한 '아르헨티나 공화국'과 '페론 찬가'를 연주해야 했고, 후자는 본인이 직접 작곡해야 했다. 이후에도 계속 페론주의자들의 압박에 시달려온 피아졸라는 결국 본인의 탱고에 대한 무관심, 정치적인 압박, 인기 부족에 시달린 끝에 티피카 악단은 1949년 망해버렸다. 이후 피아졸라는 객원 멤버로 연주에 참여하거나 영화음악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한편으로 클래식 작곡에도 전념했다. 아, 탱고도 작곡했다. 아주 가끔씩.

그러던 중 1951년 작곡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향곡(Sinfonía Buenos Aires)'으로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하게 정통 관현악 편성에 반도네온 두 대를 추가했기 때문에, 이고르 마르케비치가 지휘한 초연 무대에서 청중들이 클래식 연주하는데 반도네온이 쓰였다며 난동을 일으켰지만, 이 곡으로 파비안 세비츠키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클래식 작곡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어필할 수 있었다.[10] 1953년에는 소편성 관현악을 위해 작곡한 신포니에타(Sinfonietta)를 발표했는데, 이 곡의 악보를 프랑스의 전설적인 음악 교육자인 나디아 불랑제에게 보낸 뒤 배우러 오라는 답장을 받고 이듬해 아내와 함께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불랑제와 처음 대면한 피아졸라는 불랑제에게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작곡한 클래식 작품들의 악보를 보여주고 시연했는데, 그녀의 평은 '다 좋은데 말이야, 니 음악에 감정이 안 실린 것 같은데….'였다. 불랑제는 한편으로 피아졸라의 자작곡들에서 뭔가 특이점을 찾았는 지, 피아졸라에게 클래식 외에 다른 음악도 한 적 있느냐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피아졸라는 자신이 탱고를 했다고 밝히기 싫어서 계속 말을 돌리고 우물쭈물했지만, 결국 자신이 탱고 연주자라고 커밍아웃하고 자작 탱고 중 그나마 자신이 있던 승리(Triunfal)를 연주하자 그녀는 이게 진정한 피아졸라 음악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클래식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탱고는 그냥 생계 수단으로만 여겼던 피아졸라로서는 이를 계기로 탱고 음악가로 완전히 탈바꿈한다. 이후 파리 유학 시절 피아졸라는 불랑제에게 작곡을 배우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는데, 특히 불랑제에게 상당히 엄격하게 배운 대위법푸가 작곡은 이후 피아졸라의 여러 클래식 지향 작품에서 매우 자주 응용되었다. 파리 재즈 클럽들에서 재즈 연주를 들으며 그 영향도 받았고, 이후 자신 만의 실내악단을 만들 계획도 세웠다. 또한 연주 스타일도 고쳐 반도네온을 앉아서 연주하는 대신 의자를 밟고 서서 연주하였다. 본인이 말하길 앉아서 연주하면 늙어보이고, 서서 연주해야 관객과 눈을 맞추고 소통할 수 있다고. 이러한 사소한 변화마저 후대의 탱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파리 시절 생각했던 실내악단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부에노스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한다. 기존의 오케스트라, 빅 밴드를 앞세운 탱고와 달리 실내악을 중심으로 했을 뿐 아니라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를 정식 단원으로 넣어 기성 탱고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뿐아니라 그는 새로운 탱고(Nuevo Tango)를 내세워 예술성을 주로 하고, 성악을 뺐으며, 재즈를 도입하는 등 상당히 혁신적인 시도로 본국에서는 논란에 휩싸인다. 아르헨티나에서 당시 탱고의 입지는 지금과 같은 격있는 음악이 아닌 우리의 트로트와 비슷한 입지였다는 점을 감안 하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잘나가던 신인 트로트 가수가 '나 예술할래요~'하며 턱시도 빼입고 노래하면 반응이 어떻겠냔 말이다.

아르헨티나에서 100만 안티 시절 문희준처럼 비난 세례를 받던 피아졸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도 해체하고 반 강제로 뉴욕으로 건너가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 편곡이나 댄스단 반주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 와중에 1959년 아버지의 부고 소식까지 접하며 최악의 시기를 맛보게 되는데, 이런 절망 속에서 그는 걸작을 하나 내놓았으니 그것이 김연아 선수의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유명한 아디오스 노니노[11]. 우리말로 하면 '안녕, 노니노'이다. 이때를 회상하며 피아졸라는 '나는 천사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내가 작곡한 곡중에 가장 명곡이며 다시는 이런곡을 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뉴욕에서도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피아졸라는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온다.

피아졸라가 돌아온 1960년 당시 아르헨티나는 날로 바뀌고 있었다. 페론 정권이 군부 쿠데타로 무너지고 그렇게 세운 정권이 또 무너지고, 탱고도 로큰롤포크의 인기에 치여 시들해지고 있었다. 피아졸라는 이 혼란기를 기회로 삼았다. TV 출연으로 인지도를 쌓았고, 카바레 대신 등장한 소규모 탱고 클럽에 출연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그의 팬과 안티 사이에 대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번은 TV 스튜디오에서 피아졸라와 그의 안티가 우연히 만나 시비가 붙기도 했고, 택시 기사가 '니 탱고가 탱고냐'며 승차 거부를 했을 정도. 그 와중에도 피아졸라는 티피카 악단,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에 이은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 퀸테토 누에보 탕고(새로운 탱고 5중주단, 이하 5중주단)를 새로 결성하고 활동에 나섰다. 1961년 하마이카 클럽에서 처음 공연을 시작해서 1962년 676 클럽으로 무대를 옮겨 공연을 하였는데, 청중 수는 들쭉날쭉했지만, 천천히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새로 주자들을 영입하여 옥테토 콘템포라네오(현대 8중주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실험이기 때문에 몇 달 활동하고 5중주단으로 돌아갔지만, 평은 좋았다. 이 무렵의 성공으로 지방 순회 공연도 다니고, 유럽 순회 공연도 기획을 하였다. 같은 해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작품인 '포르테뇨[12] 탱고 풍의 3악장(Tres movimientos tanguísticos porteños)'이 파울 클레츠키의 지휘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고 히르시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5년에는 아르헨티나 문화 홍보 차원에서 미국, 브라질을 방문하여 콘서트를 열었는데, 오히려 본국에서보다 평이 좋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함께 공동 작업하여 앨범을 내기도 하여 마침내 첫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클래식도 가끔씩 작곡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무렵부터 부부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피아졸라가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66년 두 부부는 별거하고, 이혼이 합법화될 때까지 사실상 이혼 상태에 있다가 1988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이혼한다. 별거를 시작한 이후 피아졸라는 더 신이나서 바람을 피웠고, 그 와중에도 별거 중인 아내와 밀당을 시도하면서 양다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사는 그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서 1966년부터 67년까지 2년동안 영화음악 두 곡을 제외하고 아무 작품도 쓰지 못했다.

새로운 반전은 1968년에 찾아왔다. 시인 오라시오 페레르를 만나 5중주단도 해체하고 함께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다. 오페레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María de Buenos Aires)'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작업을 이어갔지만 1968년 5월의 초연은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 4개월만에 막을 내렸고, 피아졸라는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피아졸라는 새로 창작열을 얻고 5중주단을 부활시키고 6중주단도 새로 결성한다. 1968~69년에 관현악 편성으로 작곡한 '탕가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한 변주곡 (Tangazo: Variations on Buenos Aires)'이 미국 워싱턴 D.C.에서 초연되었다. 페레로와도 계속 함께 작업해 '바친의 젊은이', '광인을 위한 발라드' 등의 히트곡을 작곡한다. 특히 '광인을 위한 발라드'는 4달만에 15만장을 팔아치우고 전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린다.그 와중에 안티들이 자기 곡을 깎아내리니까 좌파의 소행 드립치던건 안자랑 이러한 활동은 1971년까지 이어졌고, 페레로와 함께 '전주곡 3부작'을, 단독으로 순수 기악곡인 모음곡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Cuatro Estaciones Porteñas)'를 작곡한다.

그러던 중 1971년, 피아졸라는 돌연 5중주단을 해체하고 유럽으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빡빡한 공연 일정을 명목으로 5개월간 파리로 여행을 떠난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새 앨범 '퀸텟을 위한 협주곡(Concierto para quinteto)'을 작곡하고, '콘훈토 9'(이하 9중주단)이란 9중주단을 결성한다. 이 밴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청의 지원을 받고 1971년 첫 해외 공연과 72년 앨범녹음을 하며 성장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시 정부와의 계약 이행을 위해 지방 순회공연을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1972년 4,5월에는 해외 연주여행을 떠나 이탈리아, 브라질에서의 공연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당시 피아졸라는 자신의 콘훈토 9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인 나카르 협주곡(Concierto de Nácar para nueve tanguistas y orquesta), '바르다리토(Vardarito)', '더블 A의 비가', '숨', '3×4', '히피에게 보내는 송가', '40에의 오마주', '9 시리즈', '코르도바의 오마주' 등 명곡을 쏟아내는 등 리즈시절을 찍었다.

그러나 9중주단은 시청으로부터 지원이 끊기면서 와해되었고, 피아졸라는 다시 5중주단으로 복귀한다. 밴드의 와해, 복귀 후의 평론가들의 혹평,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돌아온 페론주의 정권으로 인한 혼란 등이 겹치면서 피아졸라는 정신적으로 흔들린다. 거기에 국내 무대도 줄어들면서 피아졸라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해외에서도 러브콜을 받는다. 하지만 애인 아멜리타의 반대로 이주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곡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거의 아무 작품도 쓰지 못하였고, 결국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다행히 목슴을 건지고 생명에도 지장이 없어 1972년 10월 퇴원하지만, 피아졸라는 이 일이 있은 후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2.3. 말년

피아졸라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후 이주를 결심한다. 1973년 이탈리아인 에이전트 알도 파가니와 계약 후 같은 해 3월 이탈리아 TV 출연을 시작으로 유럽을 주무대로 삼는다. 이 당시 방송용 소곡들을 주로 작곡하였는데, 그것들이 바로 '리베르탱고', '메디탱고', '트리스탱고', '비올렌탱고', '아멜리탱고' 등의 걸작이다. 그 외에도 브라질 순회 공연, 색소폰 연주자 제리 멀리건과의 공동작업 모두 성공하면서 피아졸라는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1975년에는 칸 음악제에서 '로큰롤은 한계에 달했다. 영국인들의 침략도 이제 끝이다.'라며 설레발을 쳤을 정도. 또한 에바 페론을 소재로 한 오페라를 기획했으나, 안타깝게도 어떤 영국인 양반초대박 뮤지컬로 먼저 침을 발라놓는 바람에 시망. 그는 후에도 그 작품을 보고 재미있다고 호평하면서도 '내가 만들었으면 더 잘 만들었을거다'라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나….

이탈리아 외에도 피아졸라는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등을 돌아다니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75년 로마시에서 황금금수상을 받는 등 영예를 누린다. 그러나 고국 아르헨티나의 정치 사정이 악화되면서 향수병이 도졌고, 분위기 전환을 위해 다시 이주를 계획한다. 그러나 영 좋지 못한 일이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오랜 세월 반 파트너, 반 연인 관계로 지내던 아멜리타와 결별한 것. 이 일로 피아졸라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고, 그녀의 이름을 딴 곡 '아멜리탱고'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음악'으로 개명하고 그녀의 이름을 자기 앞에서 꺼내지 못하게 하는 등 그녀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다른 한 편으로 그의 오랜 맞수인 트로일로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그에게 헌정하기 위해 모음곡 '트로일로(Suite Troileana)'를 작곡했고, 이 작품이 그의 영화 음악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Il pleut sur Santiago)'[13], '뤼미에르(Lumiere)'와 함께 그 당시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1975년 중반에 들어서서 피아졸라는 다시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전자 음악에 도전한 것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의 전자음악과 재즈의 퓨전에 영향을 받은 그는 신시사이저와 전자 악기를 이용한 실험을 하였고, 1975년 9월에는 아르헨티나로 귀국해 새로 전자 8중주단을 결성한다. 신시사이저, 전자 오르간, 일렉 기타 멤버들을 포함하고 즉흥 연주를 허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 이 8중주단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보수적인 기존 팬들로부터 거하게 욕을 퍼먹기도 했지만,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피아졸라도 크게 만족했다.

아후 북미, 유럽을 돌며 연주와 창작에 전념하던 피아졸라는 1977년까지 전자음악, 락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500 모티바시오네스' 등의 명곡을 발표했지만, 1977년을 기점으로 다른 멤버와의 갈등 등으로 8중주단 역시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1978년에는 그 해 조국에서 거행된 월드컵을 위해 작곡을 하였으나 그 해 월드컵은…. 결국 그 곡들은 모두 월드컵과 관계 없게 제목갈이를 해야 했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8중주단을 포기하고 5중주단을 새로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새로운 5중주단은 전자음악을 버리고 다시 어쿠스틱한 실내악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안티가 많았지만 해외 반응은 성공적이었고, 5중주단 활동기 동안 '친친', '비유야'등을 작곡하며 작곡가로서도 건재함을 드러냈다. 1979년 초연된 반도네온 협주곡(Concierto para bandoneón y orquesta)과 1980년 초연된 반도네온과 소편성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가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1980년, 다시 해외 활동을 위해 파리로 다시 이주, 5중주단과 함께 유럽 순회 공연을 하는 등 공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80년대 후반에는 영미권 활동에 주력하여 몽트뢰,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여하는 등 여러 장르에서 환영받는 명실상부한 국제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5중주단을 거의 갈아넣다시피한 고된 일정을 소화, 88년 심장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즈음 5중주단도 해체하고 회복 후 6중주단을 다시 결성한다. 이 당시의 음악은 건강 악화의 영향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6중주단은 이전 못지 않은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90년대에도 그러리라고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팬들도 믿었다. 1990년 7월 3일 그리스 아테네의 헤로데스 아티쿠스 야외 음악당에서 그리스 작곡가이자 지휘자 마노스 하지다키스가 지휘한 크로마톤 오케스트라와 생애 마지막이 된 공연을 가진 뒤 파리로 돌아와 다음 공연을 준비하던 피아졸라는 8월 5일 샤워 중 뇌출혈로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어 쓰러졌고, 결국 급히 치료를 받은 뒤 귀국해 오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비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폐렴과 장출혈 등의 질환까지 겹치면서 1992년 7월 4일에 향년 71세로 타계했다. 장례 후 유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평화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3.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곡



[1] 아르헨티나 사람이므로 이름을 신대륙 스페인어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다. 때문에 읽으면 피아솔라(/piasola/)로 발음된다. 그런데 이름의 철자를 보면 알겠지만 피아솔라는 원래 이태리 성이다. 때문에 피아솔라의 국적과 관계없이 이태리 식으로 '아스토르 피아라'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많다. 이 항목은 그냥 영어식으로 대충 읽은 발음을 따라 '피아졸라'로 작성되었다.[2] Massimo Scapin, "A Musician of Touching Faith – Remembering Astor Piazzolla", 「OnePeterFive」, 2021.3.11.[3] 비발디의 사계와 같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3악장으로 구성된 비발디의 사계와 달리 각각 단일악장이다.[4] 가장 유명한 버전은 러시아의 작곡가 레오니드 데샤트니코프(Leonid Desyatnikov)가 편곡한 버전인데, 특이하게도 곡 중간중간에 비발디의 사계가 서로 반대되는 계절에 인용된다. 예를 들어, 피아졸라의 여름에는 비발디의 겨울이 인용된다. 이는 북반구와 남반구의 계절이 서로 반대된다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5] 그링고는 서양인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미국인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아르헨티나가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도 백인 위주의 국가이기도 하고.[6] 양키 문서 참조[7] Alberto Ginastera (1916~1983).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브라질빌라-로보스(Heitor Villa-Lobos, 1887~1959)와 함께 남미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아르헨티나의 열정적이고 우수어린 멜로디/리듬과 현대음악의 반음계적 조성 혹은 무조성이 어우러진 독특한 음악을 만들었으며,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아르헨티나 무곡 2번으로 유명하다.[8] 당시 탱고를 연주하던 카바레에서는 커튼만 쳐놓고 성관계를 했다고 한다. 이런 이들 중에는 후안 페론에바 페론 부부도 있었다고.[9] 스페인어로 오케스트라[10] 다만 피아졸라는 이 때 반도네온을 넣은 게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 지, 1953년에 자신에게 음악상을 안겨준 파비안 세비츠키가 아르헨티나를 방문해 이 곡을 지휘하게 되자 반도네온을 제외하고 관현악 편곡을 다시 한 개정판을 발표했다.[11] 그의 아버지의 애칭이었다.[12] Porteño. 부에노스 아이레스 토박이를 일컫는 은어로, 이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번역한다.[13]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당시 개쌍놈 아우구스트 피노체트의 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