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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게티 죄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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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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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음악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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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jamielaurance.com/Ligeti-Composer.jpg
리게티 죄르지(Ligeti György, 1923-2006)
잘못보면 첼리비다케 젊은시절
1. 소개2. 생애
2.1. 초기와 성장기2.2. 아방가르드 시기2.3. 선율과 조성의 부활
3. 리게티의 작품
3.1. 개요3.2. 주요 작품
3.2.1. 무지카 리체르카타3.2.2. 관현악을 위한 atmosphere3.2.3. 100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적 시3.2.4. 레퀴엠3.2.5. 오페라 르 그랑 마카브르(대종말)3.2.6. 피아노 연습곡집
4. 대중매체와 리게티

1. 소개

리게티 죄르지 산도르(Ligeti György Sándor 1923.5.28 – 2006.6.12)[1]헝가리 태생의 음악가로 20세기 후반의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자국의 음악 선배인 벨라 바르톡의 시즌 2에 해당되는 음악가인데, 물론 그의 음악이 포스트-바르톡의 의미만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는 20세기 중반기에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진영에 속한 대표적인 작곡가였으며 전자음악, 톤 클러스터(tone cluster, 음괴)기법, 마이크로 폴리포니(micro polyphony, 미세다성)양식 등 각 시기의 최전선에 있던 음악적 실험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각 분야에서 주목받는 작품을 남겼다. 한마디로 전통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던 음악가. 다만 50세가 넘어가면서 통상적인 선율과 박자를 가진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에도 단순히 전통으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음악사조들을 활용하여 독창성을 잃지 않았다.

현대 음악이 지나친 난해함과 급진성 때문에 대중들과 유리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리게티는 대중적으로도 꽤 알려진 몇 안되는 현대 음악가인데, 이런 인기를 딛고 소니(SONY)에서 그의 음악 시리즈 전집을 기획하기도 했다.[2] 또한 사후에 관심이 급격하게 식어버린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그의 음악은 그가 사망한 2006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중 예술과도 무관하지 않아서 스탠리 큐브릭의 등의 영화에 그의 음악이 많이 활용되었다. 자세한 것은 아래 항목 참조.

한편 리게티는 여러 음악 교육기관에서 강의와 교수직을 맡으면서 후진 양성에도 주력했는데, 시사평론가 진중권의 누나이자 현대의 중요한 작곡가 중 한 사람인 진은숙도 이 리게티의 제자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 항상 웃는 얼굴에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의 이미지가 풍기는데, 실제로 그는 대작곡가 중에 흔치 않은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비교적 무난한(?) 사회 생활을 했으며 그의 음악에서도 특유의 유머와 익살스러움이 종종 드러난다.

2. 생애

2.1. 초기와 성장기


리게티는 1923년 루마니아 북부 트랜실바니아 지방의 디쇠젠트머톤(Dicsőszentmárton)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3] 6세때 그의 가족은 클루즈(Cluj)시로 이사갔으며 거기서 성장기를 보냈다. 소년 리게티는 음악보다 과학을 전공하려고 했으며 부다페스트 대학의 수리/물리 계열에 합격했지만 당시 헝가리는 나치즘의 영향으로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결과가 번복되어 탈락하고 만다. 그는 과학자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 18세때인 1941년에 클루즈 음악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방학때에는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팔 카도샤(Pál Kadosa)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2차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헝가리의 친나치 성향의 살러시 페렌츠 정권에 의해 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부모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동생(당시 16세)은 마우타우센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리게티는 헝가리의 강제 노동 여단(forced labor brigade)에 징집되었다.[4]

종전 후 리게티는 부다페스트프란츠 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여기서 팔 카도샤 외에 페렌츠 파르카스, 졸탄 코다이 등에게 사사받았다. 1949년에는 이 학교를 졸업한 후 스승들의 영향으로 헝가리 민속음악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1년 후에는 코다이의 도움으로 모교의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헝가리 혁명(1956)이 발발할 때까지 이 교수 자리에 있었는데, 이 시기에 작곡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피아노곡 무지카 리체르카타(Musica Ricercata, 1951-1953)이다. 당시 헝가리는 소련공산주의 블럭에 갇혀서 서방과 교류가 제한되어 있었던데다 당국의 검열과 제한 때문에 리게티는 제대로 음악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음악 상당수가 검열에 걸려서 발표되지 못했으며, 서유럽의 음악사조들이 타락한 문화로 배척받았던 탓에 이들을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2.2. 아방가르드 시기

1956년, 공산정권이 들어서 있던 헝가리에 혁명이 일어나고 짧은 해빙기가 찾아왔다. 이 때 리게티는 비로소 '12음 기법의 소개' 라는 책을 구해서 음렬 작법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고, 이제까지 그가 접했던 20세기 음악은 바르톡과 다른 헝가리 작곡가들의 작품이 전부였으나 이 시기에 라디오로 스트라빈스키쇤베르크 등의 20세기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때 터득한 12음 기법을 바탕으로 피아노를 위한 반음계적 환상곡(Chromatische Phantasie)을 작곡하였다. 이어 레퀴엠에 대한 작곡도 구상하였으나 이 때에는 구상 단계에서 끝났다.[5]

그러나 헝가리 공산정권은 소련군의 개입을 요청하였고 소련군은 이 혁명을 탱크로 무자비하게 짓밟고 다시 과거의 철저한 검열주의가 부활하였다. 이 때 리게티는 아내와 함께 헝가리를 떠나는데, 국경이 폐쇄되기 직전에 탈출에 성공하여 오스트리아비엔나로 망명하였다. 이 때부터 리게티는 본격적으로 서유럽의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음악을 접하게 되고 그의 음악 성향에도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

망명 직후 리게티는 쾰른 음악모임(Cologne School)에서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을 만나 전자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이듬해(1957)에는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Internationale Ferienkurse für Neue Musik, Darmstadt)[6]에 참여하여 서방의 현대 음악가들과 교류하고 강의도 맡았다. 그는 이들 모임에서 다양한 전위 음악과 음향 실험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자신의 작품에 그 영향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모임에서 벌어지는 음악가들 간의 파벌 싸움과 과도한 교조적 경향에 식상하여 점차 이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슈토크하우젠의 '설계된 음악'이나 피에르 불레즈의 총렬주의 등에 반대하였으며, 특히 불레즈와의 갈등은 수십년간 지속될 정도로 골이 깊은 것이었다.[7] 리게티는 지나치게 세밀한 구조성에 치중하여 감성을 배제시키기보다는 전체적인 형태와 느낌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아방가르드 진영 내에서도 나름의 음악철학을 구축한 그는 관현악 작품인 환영(Apparitions,1959), Atmosphères(1961)[8], 100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시(Symphonic poem for 100 Metronomes, 1962)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현대음악가로 떠올랐다.

한편 1960년대부터 그는 음악 교육에도 본격적으로 매진하였는데, 1961년부터 약 10년간 스웨덴의 스톡홀름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재직하였고 1973년에는 함부르크 대학 음악분야의 정식 교수가 되어 1989년 은퇴할 때까지 교수직을 맡았다. 진은숙을 지도하기 시작한 것도 이 함부르크 대학에 재직하던 시기였다.

2.3. 선율과 조성의 부활

1970년대 들어 그의 작곡 빈도는 크게 줄었는데, 리게티 본인의 말에 의하면 수없이 작곡을 시도했지만 제대로 완성한 작품이 거의 없으며 수백편의 스케치와 구상을 모두 버렸다고 한다. 각종 음악사조가 난무하던 이 시기에 자신의 음악의 진로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리게티 스스로도 상당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아방가르드 사조가 점차 도그마화되고 폐쇄적인 경향을 보였기 때문인데, '새로운 것을 추구하자'는 아방가르드의 정신이 점차 전통적인 음악으로부터 무조건 벗어나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되어버렸고 그럴수록 음악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기만 했다. 리게티는 어느 시점부터 무조건 전통을 배척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런 깨달음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을 '퇴보', 심지어는 '타락'으로 여겼던 당시의 분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여튼 리게티의 1970년대 이후의 작품은 1960년대에 한참 매료되어 있던 전위적 경향에서 벗어나 좀더 전통적인 선율과 리듬을 가지고 있으며 그간 무시되었던 조성과 선법체계도 다시 나타난다.[9] 이런 경향을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 바로 그의 유일한 오페라인 르 그랑 마카브르(Le Grand Macabre, 대멸망)이다. 이 작품은 3년간의 작곡기간을 거쳐 1978년에 스톡홀름에서 초연되었다.

이런 음악적/철학적인 고민 외에도 리게티의 창작력이 감소한 또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건강이다. 그는 83살까지 살기는 했지만 결코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으며, 50줄에 접어든 1970년대 이후부터는 건강에 대한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고 주기적으로 큰 병을 앓았다. 예를 들어 1978~1982년 동안에는 병 때문에 단 한 작품도 발표하지 못했다. 나름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작품수가 의외로 적은 데에는 그의 허약한 체질이 큰 원인 제공을 하고 있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리게티는 1980년대 이후부터 다시 창작력을 회복하였고, 이 시기부터는 아방가르드성에 집착하는 대신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의 토속음악,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미국의 재즈음악, 카리브해 연안의 라틴 음악 등 각지의 민속음악이나 대중음악에 구현된 음악적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경향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3권의 피아노 연습곡집이다.

2000대 이후 그는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서 공식작품은 2000년 작곡된 파이프, 드럼, 피들(Síppal, dobbal, nádihegedüvel)을 끝으로 더 이상 발표되지 않았으며 2006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비엔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10] 2016년 현재 리게티의 부인 베라 리게티는 생존해 있으며 그의 아들 루카스 리게티는 작곡가이자 타악기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3. 리게티의 작품

3.1. 개요

리게티의 작품성향은 대략적으로 생애 항목의 제목처럼 세 시기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분류는 지나치게 도식화된 측면이 있는데, 사실 리게티는 기본적으로 끊임없는 실험을 추구하고 새로운 음향을 탐구했던 음악가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특정 범주로 묶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전통적인 작법을 부활시킨 이후에도 그의 음악은 진부함이나 친근함(?)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그가 활용한 음악 요소들은 그대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해체되고 비틀려진 형태로 응용되었다. 그는 평생 실험 정신을 버리지 않은 음악가였는데, 다른 현대 작곡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중들과의 소통을 등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이 소통은 단순히 당대에 유행하는 사조에 대한 편승이나 타협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음악성의 바탕에서 추구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3.2. 주요 작품

볼드체로 씌어진 작품은 따로 설명한다.

* 망명 이전의 작품
- 첼로 독주를 위한 소나타(1948, 1954년 개작)
-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발라드와 춤곡(Ballad and dance for two violins, 1950)
- 피아노를 위한 무지카 리체르카타(Musica Ricercata, 1951~53)
- 현악4중주 1번(1954)

* 아방가르드 시기의 작품
- 전자음악 Glissandi(1957), Artikulation(1958)[11]
- 관현악을 위한 환영(Apparitions, 1958~59)
- 관현악을 위한 Atmosphères(1961)
- 오르간을 위한 Volumina(1962)
- 100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적 시(Poème Symphonique, for 100 metronomes, 1962)
- 기악과 성악을 위한 아방튀르 (Aventures, 1962), 누보 아방튀르 (Nouvelles Aventures, 1965)
- 레퀴엠(1963-65)
- 무반주 합창을 위한 Lux Aeterna(1966)
- 관현악을 위한 론타노(Lontano, 1967)
- 현악 4중주 2번(1968)
- 12개의 현악기를 위한 Ramifications(1968–69)
- 샌프란시스코 폴리포니(San Francisco Polyphony, 1974)

* 1970년대 이후
- 오페라 르 그랑 마카르브(Le Grand Maccabre, 1978 초연, 1996년 개작)
- 바이올린, 호른, 피아노를 위한 3중주(1982)
- 피아노 협주곡(1988)
- 바이올린 협주곡(1993)
- 비올라 독주를 위한 소나타(1994)
- 피아노 연습곡 1집(6곡, 1985)
- 피아노 연습곡 2집(8곡, 1988~1994)
- 피아노 연습곡 3집(4곡, 1995~2001)
- 함부르크 협주곡(Hamburg Concerto, 1999, 2002 개작)[12]

3.2.1. 무지카 리체르카타

무지카 리체르카타(Musica Ricercata) 11곡의 피아노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스트리아 망명 이전의 리게티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상당히 재미있는 발상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아래 표와 같이 각 곡은 사용하는 음고의 수가 정해져 있는데, 예를 들면 첫 곡은 A음만으로 진행되다가 맨 마지막 종결음으로 D 음고를 사용하여 2개의 음고만을 사용하며, 점점 쓰이는 음고의 수가 늘어나 마지막 곡은 12음고가 모두 자유롭게 사용된다.[13]
사용되는 음고
1 D A
2 E♯ G F♯
3 E♭ C G E
4 A♭ B♭ G A F♯
5[14] A♭ F G D B C♯
6 G D A E B F♯ C♯
7 A♭ E♭ B♭ F C G D A
8 G♯ C G D A E B F♯ C♯
9 G♯ D♯ A♯ F C D A B F♯ C♯
10 A♭ E♭ B♭ F G D A E B F♯ C♯
11 G♯ E♭ B♭ F C G D A E B F♯ C♯

이 작품은 음정수를 제한해서 음악을 구성하는 실험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곡에 다양한 음악양식을 적용하여 음악성을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춤곡(4번), 오스티나토(7번), 연습곡(10번), 푸가(11번) 등의 양식을 적용해서 각 작품에 다채로운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쓰이는 음고가 많아지면서 오히려 쓰이지 않는 음을 세는 게 더 쉬워지기도 한다. 그만큼 '특정 음만을 사용한다'는 아이디어가 뒤로 갈수록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리게티는 뚜렷한 특성을 지니는 음소재를 통해 쓰이는 음의 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곡은 바로 음 10개를 사용하는 9번이다. 쓰이는 음 자체에는 큰 특징이 없지만 쓰이지 않는 두 음이 E와 G로 단3도 간격인데, 그 단3도를 이 곡의 소재로 삼아 모든 위치에서 단3도가 나타나게 하면서 쓰이지 않는 음에서는 반드시 예외가 발생하게 만들었다. 한편 쓰이지 않는 음이 하나 뿐인 10번에서는 반음계적 순차 진행에서 해당 음만 건너뛰는 방식으로 쓰이지 않는 음을 드러낸다.

한편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편곡이 되었는데, 11곡 중 6곡(3, 5, 7, 8, 9, 10)이 관악 5중주를 위한 6개의 바가텔(1953)로 편곡되었고 나중에 전곡이 배럴 오르간(barrel organ)[15] 용으로 편곡되기도 했다. 맥스 보니(Max Bonnay)라는 어코디언 연주자는 이 작품 중 8곡(1, 3, 4, 7, 8, 9, 10, 11)을 어코디언 연주용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무지카 리체르카타 제 1번

3.2.2. 관현악을 위한 atmosphere

1961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리게티의 역량을 본격적으로 알린 출세작이며 톤 클러스터(tone cluster, 음괴) 기법을 적용한 작품 가운데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16] 이 곡의 시작 부분은 역대 작품 중 가장 음역이 큰 음괴로 손꼽히고 있는데, 무려 다섯 옥타브에 걸친 반음 단위의 모든 음이 동시에 조용히 연주된다. 이 작품에서는 고전적인 선율이나 조성, 리듬이 완전히 사라지고 여러 선율과 화음을 겹쳐서[17] 거대한 음 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음괴의 음역이 계속 바뀌고 적용되는 악기에 변화를 주지만 감상자 입장에서는 흐름을 잘 못느끼고 마치 소리가 정지되어 있는 것 처럼 느끼며, 잘 모르고 들으면 그냥 소음처럼 들린다. 알고 들어도 소음같기는 마찬가지

리게티는 이후 톤 클러스터/마이크로 폴리포니를 활용한 작품을 여럿 남겼는데, 대표적인 예가 오르간을 위한 볼루미나(Volumina, 1962)나 관현악곡 론타노(Lontano, 1967) 등이다. 같은 기법을 적용했음에도 론타노는 아트모스페르보다 좀더 변화가 많고 역동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3.2.3. 100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적 시



원래 제목은 그냥 <Poème symphonique(교향시)>. 1962년에 작곡(?)되었다. 매우 특이한 작품으로, 사실 음악 작품이라기 보다는 현대 전위 예술 작품에 가깝다. 존 케이지를 비롯한 플럭서스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받은 영향으로 만들어졌다. 처음 감상하게 되면 "이게 뭥미?"라고 느끼게 된다는 점은 존 케이지4분 33초와 비슷한듯.

서로 다른 박자와 지속시간을 가진 메트로놈 100개를 동시에 시작시켜서 그 진자음으로 음향을 구현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상당히 시끄럽게 진행되다가 메트로놈이 하나 둘씩 정지하면서 점점 소리가 옅어지며 최후에는 느리게 움직이는 메트로놈 하나만 남는다. 혹자는 이 작품을 인생에 비유해서 '가장 느린 메트로놈이 최후에 멈출 듯 멈출 듯 할 때 숨이 넘어가기 직전 인생의 마지막이 떠오른다'라고 하는데, 어떤 의미와 어떤 관점으로 이 작품을 감상할지 여부는 철저하게 청자들의 몫이다.

3.2.4. 레퀴엠

리게티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대학 입학도 거절당하고 강제로 전쟁에 동원됐으며, 동생과 부친을 수용소에서 잃은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2차대전 직후부터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악몽같은 삶을 돌이켜보고 전쟁의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진혼음악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구상은 이런저런 이유로 번번이 구상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196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라디오 방송국이 리게티에게 성악곡 작품을 위촉하면서 드디어 이 구상이 빛을 보게 된다. 2년간의 노력 끝에 1965에 발표된 이 작품은 절찬을 받았으며 후술되는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과 유명한 저작권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작품의 성악 파트는 연주하기가 괴랄하기로 악명이 높다. 이 레퀴엠에도 당시 리게티가 추구하고 있던 톤 클러스터/마이크로 폴리포니의 수법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런 탓에 합창 파트는 성부가 합쳐졌다 갈라지는 양상이 반복되며 최대 20성부가 요구된다.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 두 독창 파트는 음역이 자주 도약하는데다가 부드럽다가 갑자기 격렬해지는 등 분위기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이를 무리없이 처리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연주자들 입장에서는 그나마 연주시간이 30분을 넘기지 않는 것이 정말 고마울 정도.

관현악은 전통적인 2관 구성에 타악기와 하프시코드가 추가되어 있는 편성으로, 독자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고 주로 성악 파트의 복잡한 흐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레퀴엠은 카톨릭의 진혼 미사곡의 양식을 따르고는 있지만 상투스(Sanctus), 베네딕투스(Benedictus), 아뉴스 데이(Agnus Dei) 등은 모두 빼버리고 인트로이투스(Introitus, 입당송), 키리에(Kyrie), 세퀜티아(Sequentia, 부속곡)만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세퀜티아의 라크리모사(Lacrimosa, 성모의 눈물)에서 끝난다. 또한 세퀜티아에서도 디에스 이라에(Dies Irae, 진노의 날)는 De Die Judicii(심판의 날)로 제목을 고쳤으며 이 진노의 날 전례문의 마지막 6행은 따로 떼어서 라크리모사에 붙였다.

3.2.5. 오페라 르 그랑 마카브르(대종말)

프랑스의 극작가인 미셀 드 겔더로드(Michel de Ghelderode)가 쓴 대종말의 발라드(La Balade du Grand Macabre)를 바탕으로 한 2막 4장의 작품으로 1978년에 스톡홀름에서 초연된 리게티의 유일한 오페라이다. 이 작품은 리게티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는 작품이며, 생소한 현대 오페라임에도 불구하고 초연 이후 현재까지 30회 이상 공연이 될 정도로 대중적인 인지도도 높다. 이 르 그랑 마카브르에서는 선율과 리듬 등 그간 무시되었던 전통적인 음악요소가 다시 드러나고 있으며 모호하긴 하지만 조성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아방가르드 성향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용은 전형적인 20세기 초중반에 유행했던 부조리극의 양상을 띠고 있다. 오페라의 배경은 브로이겔란트(Breughelland)라는 가상의 나라이며 세계의 대종말(grand macabre)을 상징하는 네크로차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18] 네크로차르는 브로이겔란트를 파멸시키려고 하지만 뚱보 피에트(Piet the Pot)에게 질펀하게 술대접을 받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결국 네크로차르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여러 번 공연됐지만 리게티 생전에는 작곡자를 제대로 만족시킨 공연이 없었다고 전해진다.그런데 사후에는 애초에 만족시키는게 불가능하다 이 작품은 1997년 잘츠부르크 공연을 앞두고 1996년에 대폭 개작되었는데, 리게티는 1986년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모티브로 삼아 종말에 대한 메시지가 좀더 강한, 묵시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연출자인 피터 셀러스(Peter Sellars)는 작곡자의 이런 의도를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네크로차르가 실패하고 세상이 종말에서 벗어나는데 더 주안점을 두었고, 잘츠부르크 공연을 지켜본 리게티는 자신의 의도가 반영되지 않은데 대해 굉장히 화를 냈다고 전해진다. 앞으로 다시는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정도. 다행히 이후에도 딱히 공연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한편 1992년에는 이 작품의 소프라노 아리아 중 3개를 'Mysteries of the Macabre' 라는 제목의 콘서트용 아리아로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무대에 똑바로 서서 부르는 일반적인 콘서트 아리아가 아니라 퍼포먼스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수는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상당한 연기력도 갖추어야 한다. 아래 동영상에서 가수는 훌륭한 퍼포먼스로 큰 박수를 받고 있는데, 만약 가수의 동작이 어설프면 개그로 전락해 버린다.
Mysteries of the Macabre

3.2.6. 피아노 연습곡집

이 3권의 피아노 연습곡은 리게티 음악의 종착역을 보여주는 작품집으로 이제까지 그가 공부하고 접하고 연구했던 모든 음악사조들이 집합해 있다. 그는 14세기 아르스노바의 다성양식에서 시작하여 재즈, 로큰롤등의 현대 대중음악, 아프리카와 카리브 해의 민속음악,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선배 바르톡의 음악 등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음악의 음악요소를 이 작품에 활용하였다. 이 중에서도 리게티는 특히 미국의 음악사조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재즈나 록음악 등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대중음악 외에도 미국 출신의 중요한 두 명의 음악가 찰스 아이브스(Charles Edward Ives)와 콘론 낸캐로우(Conlon Nancarrow)에 매료되었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꽃을 피운 미니멀리즘(minimalism)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찰스 아이브스의 독자적인 무조음악[19]과 콘론 낸케로우의 폴리리듬을 구현하기 위한 자동피아노 양식[20][21] 등에 큰 인상을 받았으며 이들의 영향은 이 연습곡집을 포함, 피아노 협주곡(1988), 바이올린 협주곡(1993) 등에서 제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 연습곡집은 리스트쇼팽의 연습곡과는 다른 의미로 상당히 연주하기 어려운데, 각 작품에 내재된 양식적 요소나 기법을 등한시 하고 손가락 연습에만 치중할 경우 굉장히 무미건조한 연주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이 연습곡집의 '연습'의 의미는 손가락 훈련 이외에도 곡에 내재된 음악성을 표현하는 연습도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한편으로 연습곡 3집의 경우 6년간의 작곡 기간에 비해 완성된 곡이 4곡밖에 되지 않으며, 이 연습곡에 포함시키려고 했던 곡들에 대한 스케치가 일부 남아 있기 때문에 미완성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22]
리게티의 연습곡 전곡(Fredrik Ullén)

4. 대중매체와 리게티

리게티 하면 바로 떠오르는 영화감독이 바로 스탠리 큐브릭이다. 큐브릭은 1966년에 발표된 자신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리게티의 네 작품, 즉 아트모스페르, 룩스 애테르나, 레퀴엠, 아벤츄어(Atmosphères, Lux Aeterna, Requiem, Aventures)를 사용하였는데 문제는 이 작품들을 작곡자의 허락없이 무단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리게티는 저작권 관련해서 큐브릭에게 소송을 걸었는데, 6년이나 끌고 간 이 소송은 결국 당사자간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결론적으로 리게티는 사실상 저작권료를 받지 않고 자신의 작품의 인용을 허락하게 되었다.[25]

이후에도 큐브릭은 자신의 영화에 리게티의 음악을 종종 사용하였는데[26] 예를 들면 샤이닝에는 론타노(Lontano), 유작인 아이즈 와이드 셧에는 무지카 리체르카타의 2번곡이 사용되었다.

큐브릭 외에도 다른 영화음악이나 드라마에 그의 음악이 많이 인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마이클 만의 범죄영화 히트(Heat, 1995, 첼로 협주곡 1악장), 마틴 스콜세지셔터 아일랜드(Shutter Island, 2010, 론타노), 가레스 에드워드의 고질라(Godzilla, 2014, 레퀴엠)이 있다.



[1] 헝가리 출신이기 때문에 이름보다 성을 먼저 적는다. 다만 같은 나라 출신인 프란츠 리스트벨라 바르톡의 경우는 주로 외국에서 활동하거나 생애 후반기를 미국에서 보냈던 탓인지 관례적으로 유럽식으로 이름을 표기하는 경향이 있다. 리게티도 주로 외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름을 먼저 적는 경우가 꽤 많다.[2] 1996년 부터 1999년까지 발매되었는데, 실제로 전곡을 녹음하지는 못하고 8집에서 중단되었으며, 이 때 녹음되지 않은 곡들 상당수가 2001년 텔덱(Teldec)에서 5장으로 발매되었다.[3] 현재는 타나브니(Tarnaveni)로 개명되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루마니아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헝가리계 유태인이었으며 헝가리어부터 배웠다. 이런 이유로 리게티는 헝가리 출신 작곡가로 분류된다. 하지만 정작 리게티는 스스로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유럽의 지성과 문화에 속한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4] 2차대전 종전 당시 그의 부친과 동생은 죽고 모친만 살아남았다.[5] 이 레퀴엠은 1963년에 다시 작곡을 시작하여 1965년에 완성한다.[6] 현재도 격년제로 개최되고 있다.[7] 1950년대에 시작된 두 사람간의 갈등은 19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봉합되었다. 이후 리게티는 그의 피아노 연습곡집 1권의 1~3곡 등을 불레즈에게 헌정했고 불레즈는 1992년 리게티의 다수의 협주곡을 DG에서 녹음하여 발매하기도 했다.[8] 한국말로 번역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굳이 번역하면 '분위기', '느낌' 정도가 될 것이다.[9] 1970년대 이전에 현악 4중주 2번(1968) 등에서도 이미 이러한 경향은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참고로, 복고성향이라고 표현했지만 듣기 쉬울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자.[10] 리게티는 죽기 몇년 전부터 휠체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족들은 그의 사망 원인을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11] 망명 이후 리게티가 발표한 최초의 아방가르드 성향의 작품이다. 그는 쾰른에서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을 만나면서 전자음악을 접하게 되었는데, 슈토크하우젠의 영향으로 그가 쓴 전자음악은 세작품이며 공식 발표된 것은 여기 소개된 두 작품이다. Artikulation을 끝으로 그는 기본적으로 전자음악의 경향에서는 벗어났으며, 다만 이후의 몇몇 작품에서 전자음악의 음향효과를 시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전자음악은 리게티가 잠시 관심을 가졌던 음악사조로 봐야 할 것이다.[12] 4대의 호른과 챔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다.[13] 흐린 색은 중후반까지 쓰이지 않다가 강조되는 음이거나 메인으로 쓰이지 않는 음, 밑줄은 빈도와 관계없이 곡의 중심이 되는 음이다.[14] 중심음이 C♯에서 G로 전이 된다.[15] 공연에서 손으로 돌리거나 페달을 밟아서 연주하는 일종의 휴대용 오르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16] 이 작품 덕분에 그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교수직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스웨덴에서 레퀴엠 등의 중요한 작품을 여럿 남긴다.[17] 이런 표현 방식을 리게티 스스로는 마이크로 폴리포니(mircropolyphony, 미세다성양식)이라고 불렀다.[18] 브로이겔란트라는 이름은 르네상스 시기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풍자화가였던 페터 브뤼겔(Pieter Brueghel)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19] 아이브스의 무조경향은 쇤베르크의 무조경향과는 전혀 다르다. 아이브스는 유럽음악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조음악 분야를 개척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20] 폴리리듬은 성부간 다른 박자로 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느낌이 오겠지만 이런 폴리리듬 음악을 피아노로 제대로 연주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낸캐로우는 자동피아노로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법을 고안한 것이다.[21] 폴리리듬은 원래 사하라 이남, 남부 아프리카 토인들의 음악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이들이 딱히 리듬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있어서 폴리리듬을 구현한 것은 아니고, 단지 각 악기를 담당한 연주자들이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에 구애받지고 않고 각자 박자를 자유롭게 구현했던 것 뿐인데 이것이 의외로 상당한 음악적 효과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폴리리듬의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들은 타악기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선율보다는 리듬이 음악의 주요한 역할을 했는데, 서로 상충되는 리듬은 전쟁이나 갈등, 정신적 고통을 의미하고 서로 싱크로가 잘 되는 리듬은 평화나 안정을 의미하였다.[22] 3집의 작곡은 1995년 경에 시작되어 2001년에 4번째 곡을 완성하였다(물론 이 시기에 이 연습곡만 작곡한 것은 아니다). 리게티는 나이가 들면서 건강문제로 계속 고생을 했으며 2000년 이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제대로 작곡을 하지 못했다.[23] 10도짜리 3화음을 짚어야 되기 때문에 손가락이 작으면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24] 빠르기 기호가 아예 presto impossibile, 즉 무지막지하게 빠르게 연주하라고 되어 있다.[25] 이 영화는 리게티건 이외에도 영화음악 관련해서 문제가 상당히 많았는데,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26] 물론 이 때는 작곡자의 허락을 받고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