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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2 17:36:47

황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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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404년 태종의 왕자들을 죽이고 상왕 정종을 섬기려 한 혐의로 제명
3 1409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후에 신원
4 1416년 불충, 불경죄로 인한 제명
5 1411년 이숭인, 이종학을 죽임 혐의로 인한 제명
6 1426년 노비 불법 모집 혐의로 인한 제명, 1456년 세조 때 복권
7 1415년 민무회, 민무휼의 옥으로 인한 제명, 1422년 세종 때 복권
8 1409년 친척의 아들을 정종의 아들로 속인 혐의로 인한 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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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黃居正

생몰년도 미상, 창원 황씨

고려조선의 관원, 조선의 개국공신 겸 좌명공신. 궁중 음악가 황효성의 아버지.

2. 생애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자 판군기삼사에 임명됐다. 사대부 출신으로서 정도전의 당여로 분류되는 사람이긴 하나 공신 반열에 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동년 어느 날 조선 태조가 연 첫 과거시험에 유자들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도전은 새 왕조에 비협조적인 사대부들에게 본때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얼마 전 양위 과정에서 이색의 제자들인 이숭인, 우홍수 등 8명을 귀양보내면서 곤장만은 집행을 미루고 있었는데, 정도전은 황거정을 시켜 형을 집행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전라도로 간 황거정은 우홍수, 이숭인, 김진양, 우홍명을 곤장으로 때려죽여 명을 받들었다. 곧 정도전의 배려로 황거정도 개국공신에 올라 의원군에 봉해졌다.

1396년에 숙주의 수령으로 나갔고, 1398년 정도전과 당여들이 척살될 때 그만은 무사했으며, 1401년에는 개성유수를 지내다가 제2차 왕자의 난 때 공으로 3등 좌명공신에 봉해졌다. 1403년에는 참지의정부사를 지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참지승추부사에 임명됐다.

1408년에 천추절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참지의정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409년에 하륜, 성석린과 함께 이지성을 탄핵했고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10년에는 신경제조, 좌군도총제에 임명되고 1411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이 부의를 보내는 등 공신 대우를 제대로 했다. 그러나 역시 같은 해 사헌부에서 정도전이나 남은이 고려 유신들을 가혹하게 처리한 것에 대한 비판이 일었고, 조선 개국을 거부한 죄인들이긴 했으나 황거정이 사대부들에 대해 가혹 행위를 했다고 탄핵을 받았다.

폐서인이 되었으며, 자식들은 금고형에 처해지고 공신 지위를 박탈당하고 가산 역시 적몰됐다. 이후로 행방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1416년 자식들의 금고형이 풀렸으며, 1423년 사면돼 자손들의 과거 취재가 허용됐다. 덕분에 그의 아들인 황효성이 궁중 음악원인 장악원에 등용돼 어모장군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 대에는 명인들을 모아놓고 왕 앞에서 지휘를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