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8:02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해당 인물의 이름을 딴 제1차 세계 대전의 군함에 대한 내용은 샤른호르스트급 장갑순양함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제2차 세계 대전의 군함에 대한 내용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해당 인물의 이름을 딴 훈장에 대한 내용은 샤른호르스트 훈장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생애3. 함명 "샤른호르스트"

1. 개요

게르하르트 요한 다비트 폰 샤른호르스트(Gerhard Johann David von Scharnhorst)

파일:attachment/GerhardVScharnhorst.jpg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의 군 제도를 개혁한 군사전략가.

이름은 샤른호르스트라고도 하고 샤른호스트라고도 하는데 바이에른 지방 발음으로는 샤른호르스트가 맞고 좀 더 일반적인 독일어로는 샤른호스트가 맞다. 원래 독일어 발음에서 모음 뒤에 오는 r은 모음을 좀 더 길게 발음해 준다. 한국어에서는 독일어의 r을 '르'로 음역하는 경향이 있어 샤른호르스트라는 표기도 유명하다.

2. 생애

1755년 11월 12일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프로이센군 하사관으로 복무한 부친[1]의 영향으로 군대에 투신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1777년 하노버 선제후국의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독일 내 군소국가들과의 전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2] 1801년에 프로이센에서 대령 직위와 귀족 대우를 제안하면서 스카우트하여 그때부터 프로이센군에서 복무하게 된다. 1806년 나폴레옹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풀려나 1807년에 참모총장이되었는데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육군개혁안을 제출하면서 만약 이 개혁안을 받아들인다면 참모총장의 직위와 귀족 신분을 부여할 것을 요구하였고 둘 다 받아들여졌다.[3]

근대적인 참모본부 제도를 세계 최초로 창시하고 일반 시민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여하고 국민군대의 창설에 힘쓴 인물로서 사실상 근대적인 징병제의 시초를 닦은 사람 중 한 명이며 후일 대(大) 몰트케에 의해 발전된 임무형 전술의 시초를 닦은 사람이다. 전격전이 소설이 된 현재 시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국방군 전술전략철학인 기동전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이래저래 전쟁사에 빠질 수 없는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앙투안 앙리 조미니와 함께 포스트 나폴레옹 세대의 전략전술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한 인물이다.《전쟁론》을 집필한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에게는 사관학교 시절 스승이었고 이후 참모본부 창설을 비롯한 주요 군 개혁 정책에서도 클라우제비츠를 등용했다. 당연히《전쟁론》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실무상으로도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1813년 5월 2일 그로스고르셴 전투에서 왼쪽 무릎에 총상을 입었는데, 부상 자체는 당장 죽을 수준은 아니었으나 험한 야전에서 적절한 치료조치를 받지 못해 약 50일 후인 6월 28일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3. 함명 "샤른호르스트"

제1차 세계 대전독일 제국은 그의 이름을 따서 샤른호르스트급 장갑순양함을 건조하였으며[4] 포클랜드 해전에서 격침되었다. 이후 나치 독일의 해군 증강 계획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기 샤른호르스트 장갑순양함의 함명을 계승하여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이 건조되었다.[5]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노스케이프 해전에서 제1번함 샤른호르스트가 침몰되었고 같은 해 바렌츠해 해전의 패배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대형함 폐기 명령을 내려 당시 손상을 입었던 제2번함 그나이제나우가 폐기 처분되었다.

[1] 위키백과에는 부농이며 하사관 출신 아버지로 서술되어 있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전쟁사학과 마틴 판 크레펠트의 저서《전쟁 본능》에 따르면 아버지가 프로이센군 하사관 출신으로 확실한데 동독 시절 동독군의 빈약한 역사와 전통성을 만들기 위해 영웅 만들기로 빈농 혹은 프롤레타리아 출신으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대장장이 출신으로 여러 곳에 서술되어 있는 건 이 영향인 듯하다.[2] 이 시기 유럽의 장교들은 타국 군대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경우가 좀 다르지만 그의 제자였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러시아 제국에서 복무한 일이 있다.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 다양한 국적을 가진 귀족 장교들이 러시아군 진영에서 회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3] 이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당시 참모 회의에서 본인의 목소리가 철저히 씹히고 해당 전투는 결국 프로이센의 대참패로 끝났던 뼈아픈 경험 때문으로 추정된다.[4] 총 2척으로, 제1번함은 '샤른호르스트'이고, 제2번함은 '그나이제나우'다.[5] 이쪽도 똑같이 전함이 총 2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함들의 이름도 모두 똑같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89
, 1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89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