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5:10:37

조르주 당통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1e43, #002654 20%, #002654 80%, #001e43);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국민공회 의장 (1792~1795)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필리프 륄 제롬 페티옹 드 빌뇌브 장프랑수아 들라크루아 엘리 가데 마리장 에로 드 세셸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앙리 그레구아르 베르트랑 바레르 자크 드페르몽 장바티스트 트레야르 피에르 빅튀르니앵 베르니오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장폴 라보 생테티엔 장자크 브레아르 에드몽루이알렉시 뒤부아크랑세 아르망 장소네 장앙투안 드브리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장프랑수아 델마스 마르크다비드 라주르스 장바티스트 부아예퐁프레드 막시맹 이스나르 프랑수아르네 말라르메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장마리 콜로데르부아 자크알렉시 튀리오 앙드레 장봉 생탕드레 조르주 당통 마리장 에로 드 세셸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자크니콜라 비요바렌 피에르조제프 캉봉 루이조제프 샤를리에 무아즈 벨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
피에르앙투안 랄루아 샤를질베르 롬 장앙리 불랑 조르주 쿠통 자크루이 다비드
제36대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마르크기욤알렉시 바디에 조제프니콜라 바르보 뒤 바랑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필리프 륄 장랑베르 탈리앵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제45대
장바티스트앙드레 아마르 로베르 랭데 라자르 카르노 클로드앙투안 프리외뒤베르누아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제46대 제47대 제48대 제49대 제50대
엘리 라코스트 장앙투안 루이 장마리 콜로데르부아 필리프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앙투안 메를랭 드 티옹빌
제51대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앙드레앙투안 베르나르 앙드레 뒤몽 장자크레지스 드 캉바세레스 피에르루이 프리외 루이 르장드르
제56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장바티스트 클로젤 장프랑수아 뢰벨 피에르루이 벤타볼 에티엔프랑수아 르투르뇌르 스타니슬라스 조제프 프랑수아 그자비에 로베르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제65대
폴 바라스 프랑수아루이 부르동 앙투안 클레르 티보도 장 펠레 프랑수아앙투안 부아시 당글라
제66대 제67대 제68대 제69대 제70대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테오도르 베르니에 장바티스트 샤를 마티외 장드니 랑쥐이네 장바티스트 루베 드 쿠브레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74대 제75대
루이귀스타브 둘세 드 퐁테쿨랑 루이마리 드 라 레벨리에르레포 피에르 도누 마리조제프 셰니에 테오필 베를리에
제76대 제77대
피에르 샤를 루이 보댕 장조제프빅토르 제니시외
||<-3><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002654> 총재정부 의장 (1795~1799) ||
초대 제2대 제3대
장프랑수아 뢰벨 루이마리 드 라 레벨리에르레포 폴 바라스
제4대 제5대 제6대
필리프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장프랑수아 뢰벨 폴 바라스
제7대 제8대 제9대
필리프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루이제롬 고이에
통령 (1799~1804)
제1통령 제2통령 제3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자크레지스 드 캉바세레스 샤를프랑수아 르브룅
프랑크 · 서프랑크 · 왕국
제1공화국 · 제국 · 7월 왕정 · 제2·3·4·5공화국
}}}}}}}}} ||
<colbgcolor=#002654><colcolor=#fff>
프랑스 제24대 국민공회 의장
조르주 자크 당통
Georges Jacques Danton
파일:조르주_당통.jpg
출생 1759년 10월 26일
프랑스 왕국 아르키쉬르오브
사망 1794년 4월 5일 (향년 34세)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혁명 광장
재임기간 제24대 국민공회 의장
1793년 7월 25일 ~ 1793년 8월 8일
서명
파일:조르주 당통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2654><colcolor=#fff> 부모 父: 자크 당통
母: 마리 카뮈
배우자 앙투아네트 가브리엘 당통 (사망)
루이즈 세바스티엥 당통
자녀 3명
학력 트루아 신학교 (졸업)
종교 가톨릭
최종 당적

}}}}}}}}}
1. 개요2. 생애
2.1. 공포정치2.2. 충돌과 패배
2.2.1. 로베스피에르와의 충돌2.2.2. 재판2.2.3. 처형
2.3. 유언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3.1. 영화3.2. 희곡3.3. 게임

[clearfix]

1. 개요

빵 다음으로 교육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프랑스의 제24대 국민공회 의장.

2. 생애

법률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었으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공감하고 정치가로 활동했다.

군중들을 선동바스티유 감옥습격하도록 만든 것도 그이고, 파리로 진격해오던 혁명의 적들과 싸우도록 국민의회와 국민들을 고무시켰다.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하나에도 용기, 둘에도 용기.
당시 자코뱅파 거두치고 대중 선동의 달인이 아니었던 사람 찾는 게 힘들겠지만 대불동맹에 맞서 루이 16세의 목을 치면서 한 말 또한 프랑스인들을 열광시킨 명언이었다.
유럽의 군주들이 감히 우리에게 맞서겠단 말인가? 그들의 발 언저리에 군주의 모가지를 대신 던져주마!

2.1. 공포정치

우리가 울리는 경보는 비상 신호가 아니라 프랑스의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이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 그래야만 프랑스의 안전이 보장된다.
공포정치의 극단적인 옹호자로 1792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의 연설은 유명하다.

끝이 없는 유혈사태의 근원이기도 하다. 자코뱅당에 가입해서 혁명재판소를 설치 후, 왕당파들을 엄청나게 처형시켰다.

2.2. 충돌과 패배

2.2.1. 로베스피에르와의 충돌

하지만, 당통은 여성편력도 심했고 온갖 미식과 향락을 즐기는 낭비벽도 있었다. 반면에 로베스피에르는 부정부패를 싫어하고 도덕을 권장하는 것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마시는 차에조차 설탕을 넣지 않을 정도로 금욕적인 인물이었기에 당연히 그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당통의 도덕성은 당통파 의원들조차 변명해줄 수 없을 정도였다.

반면에 당통은 로베스피에르가 현실은 제쳐두고 지나치게 사상적으로만 과몰입하는 것을 비난하며 "그놈은 달걀 하나도 제대로 삶을 줄 모르는 놈이다." 라며 비꼬았다.

하지만 그간 혁명파들이 저지르는 살인과 패악질에 상당 부분 죄책감을 느꼈고 질려 있었으며, 어떤 의미에선 스스로 속죄한다는 마인드로 자포자기한 측면이 강했다.
나는 인간 자체가 지겹다. 이젠 인간 냄새마저도 신물이 난다.
실은 망명도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지만, 망명을 권유하는 지인에 대한 답변이 걸작이다.
사람이 조국을 구두바닥에 붙이고 다닐 수 있겠는가?

2.2.2. 재판

차후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와 의견이 충돌하면서, 혁명내부의 좌,우파에 대한 탄압 중에 반역 및 뇌물수수 혐의로 재판을 받고 단두대 형을 받았다. 이때 재판이 열렸을 때 한 말 또한 명언이었다.
혁명 재판소를 만든것을 후회한다
죄목은 외국인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반혁명 레지스탕스 세력을 도운 죄였다. 열성적인 혁명론자였던 만큼 반역자는 아니었고 로베스피에르에게 맞서 반대세력을 조직하여 내란을 모의한 것도 날조로 보이나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만큼은 지지자들도 도저히 실드를 쳐줄 수 없을 만큼 심각했기에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2.3. 처형

로베스피에르, 다음은 당신의 차례요.
처형장으로 향하던 도중 로베스피에르의 집 앞을 지나가면서 실제로 한 말이다. 애초에 본인이 로베스피에르와 손잡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고, 뒤이어 지롱드당 중진들을 처형하고, 마지막에는 동지인 에베르까지 노선이 다르다고 하여 처형했으며 이제는 본인도 노선이 다르다고 단두대로 끌려가게 됐으니 공포정치의 끝에 또 다른 반대파에 의해 로베스피에르도 단두대로 가리라는 건 누구나 예상가능했고, 실제로 3개월 뒤 그렇게 됐다.

2.3. 유언

내 머리를 나중에 민중에게 잘 보여 주시오.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단두대에서 죽을 때 그의 나이는 34살이었다. 그는 실제로 놀랄 만큼의 대두였기 때문에, 이 유언은 나름의 농담으로 볼 수 있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3.1. 영화

3.2. 희곡

3.3.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