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24 09:05:51

마티외 드 푸아카스텔봉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color: #002395"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푸아 왕조
베르나르 로제 로제 1세 피에르 베르나르 로제 2세
푸아 왕조
로제 3세 로제 베르나르 1세 레몽 로제 로제 베르나르 2세
푸아 왕조 푸아베아른 왕조
로제 4세 로제 베르나르 3세 가스통 1세 가스통 2세
푸아베아른 왕조
가스통 3세 마티외 이자벨
그레일리 왕조 푸아그레일리 왕조
아르샹보 장 1세
푸아그레일리 왕조 알브레 왕조
가스통 4세 프랑수아 카트린 앙리 1세
알브레 가문
장 2세
알브레 왕조 부르봉 왕조
앙리 2세
부르봉 왕조
앙투안 }}}}}}}}}}}}
성명 마티외 드 푸아카스텔봉
Mathieu de Foix-Castellbon
생몰년도 1363년 ~ 1398년 8월
출생지 아라곤 왕국 카탈루냐 카스텔봉 자작령
사망지 프랑스 왕국 푸아 백국
아버지 로저베르나르 2세 드 푸아카스텔봉
어머니 제로드 드 나벨
형제자매 이자벨, 로저베르나르
배우자 아라곤의 후아나
직위 카스텔봉 자작, 세르다뉴 자작, 몬카다와 카스텔비 드 로사세스 남작, 푸아 백작, 베아른 자작, 안도라 공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푸아카스텔봉 가문의 일원. 아버지로부터 카스텔봉 자작령을 물려받았고, 1391년 가스통 3세 페부스가 사망한 후 유산을 물려받은 뒤 아라곤 왕국의 국왕이 되려 했으나 실패했다.

2. 생애

카탈루냐 지방의 카스텔봉과 세르다뉴 자작 로저베르나르 2세 드 푸아카스텔봉과 네이블 및 술트 남작 가르시아 아르노 4세의 딸인 제로드 드 나벨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로저베르나르 2세는 1362년 12월 장 1세 다르마냐크가스통 3세 페부스가 베아른 자작령의 소유권을 놓고 맞붙었을 때 가스통 3세를 지원해 전쟁이 가스통 3세의 승리로 끝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373년 잉글랜드 편에 들었다가 앙주 공작 루이 1세에 의해 마우젠, 캡번 등지를 몰수당했고, 해당 영지는 아르마냐크 가문에 넘겨졌다.

형 로저베르나르가 유년기에 사망했기에, 그는 1381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1384년에는 어머니의 소유물을 물려받았다. 1380년, 푸아 백작이자 베아른 자작인 가스통 3세 페부스의 유일한 적출자인 가스통이 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다가 실패한 뒤 감옥에 갇혔다가 피살되었다. 이제 가스통 3세에게 재산을 물려줄 후계자가 없자, 그는 자신이 가장 가까운 친척임을 근거로 가스통 3세의 부유한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로 하고, 아라곤 국왕 추안 1세와 동맹을 맺고 추안 1세의 딸 후아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가스통 3세는 마티외에게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1390년 1월 5일 툴루즈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접견한 뒤 자신이 가진 소유물을 왕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1391년 8월 1일, 가스통 3세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샤를 6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위원들을 파견해 가스통 3세의 영지를 회수하도록 했지만, 마티외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가서 푸아 백작과 베아른 자작령에 군대를 배치하고 위원들의 접근을 막았다. 샤를 6세는 이런 일로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삼촌인 베리 공작 장의 조언에 따라 마티외의 상속을 승인했다. 이는 1391년 12월 20일 조약에 의해 확인되었다.

1396년, 마티외의 장인인 추안 1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마티외의 아내인 후아나는 추안 1세의 장녀였기에, 마티외는 그녀를 대신해 아라곤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아라곤 코르테스는 추안 1세의 동생인 시칠리아 국왕 마르틴 1세를 아라곤 국왕으로 추대했다. 마티외는 마르틴 1세가 시칠리아 왕국의 봉기를 진압하느라 바쁜 걸 이용해 베리 공작의 지원을 받으며 아라곤 왕국으로 쳐들어갔지만 아라곤 귀족들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마르틴 1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라곤 왕국 내 그의 영지인 몬카다, 카스텔비 드 로사세스, 카스텔봉을 몰수했다. 이 중 카스텔봉은 그가 사망한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임자에게 반환되었다.

1398년 8워, 마티외가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아라곤 국왕 추안 1세의 딸인 아내 후아나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기에, 여동생인 이자벨이 유산을 상속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