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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colcolor=#fff> 서울특별시 초대 참의원 고희동 高羲東 | |
출생 | 1886년[1] 4월 14일[2] |
한성부 남부 훈도방 정승계 수표교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 |
사망 | 1965년 10월 22일 (향년 79세)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고희동 자택 | |
호 | 춘곡 (春谷) |
본관 | 제주 고씨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동양화가이자 서양화가, 정치인. 본관은 제주(濟州)[3], 호는 춘곡(春谷). 국민의당 이상돈 국회의원의 외조부이며, 둘째 큰아버지가 정미칠적 및 경술국적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고영희이다.#2. 생애
1886년 3월 11일 한성부 남부 훈도방 정승계 수표교동(現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4]에서 아버지 고영철(高永喆, 1853 ~ ?)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5] 아버지 고영철은 1876년(고종 13) 식년 역과에 1등 2위로 입격한 역관 출신의 관료로, 삼화 감리(三和監理) 겸(兼) 삼화부윤(三和府尹) 겸 삼화항 재판소 판사(三和港裁判所判事), 중추원 의관(議官) 등을 역임했고 평소 개화파 인사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이러한 성향은 고희동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6살 되던 1891년 8월부터 집 근처에 살던 경기도 연천현 출신의 양반 원영의(元泳儀)[6]의 문하에서 한문을 공부했고, 1894년 아버지가 봉화현감에 임명되자 같이 가서 경상도 봉화현(現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4년간 거주했다. 이어 아버지가 1898년 3월 28일 중추원 3등 의관 및 고원군수에 임명된 뒤에도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 고원군에 1년간 거주하다가 1899년 한성부 본가로 돌아왔다.
1899년 9월 1일 관립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공부했고, 1903년 우등 졸업했다. 1904년 11월 11일 광학국 주사(礦學局主事), 1905년 2월 20일 궁내부 외사과 주사(外事課主事)에 각각 임명되어 프랑스어 통역관 및 프랑스어 문서 번역 등을 담당했고, 1905년 6월 13일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소인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을 보수하는 데 참여한 공로로 6품으로 승급되었다.
한편,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해 당시 어진 화사(畵師)로 근무하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에게서 미술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동양화로서 미술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되었다.
1907년 8월 2일에는 상호도감(上號都監)에서 서기랑(書記郞)을 맡아 그 공로로 망아지 한 필을 하사받았고, 이어 10월 26일 궁내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1908년 2월 2일에는 장례원 예식관(掌禮院禮式官)에 임명되었고, 1910년 7월 15일 경술국치 직전에 정3품으로 승급되었다.
191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일본에 최초로 서양식 미술이론을 도입한 구로다 세이키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915년 3월 29일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 귀국 후 분가하면서 1918년 경기도 경성부 원서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6번지에 자신의 집을 직접 설계해 지었는데, 이 가옥은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이 집에 살면서 중앙고등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중동고등보통학교 등지에서 미술교사를 지냈다. 이때 학생들에게 유화를 가르치면서도 자신은 서양화 뿐만 아니라 동양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가르친 제자로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상, 화가 도상봉(都相鳳), 간송(澗松) 전형필이 있었다. 특히 간송 전형필을 위창(葦滄) 오세창에게 소개하면서 간송이 문화재 수집의 길에 접어드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당시 작품들은 안타깝게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또한, 1918년 일본인 서양화가로 조직된 조선미술가협회에 대항해서 조선인 화가들의 모임인 서화협회를 결성했고, 스승 안중식을 회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서화부문 총무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19년 안중식이 3.1 운동으로 인해 소위 내란 혐의로 옥고를 치른 뒤 급속히 쇠약해져 결국 그해 10월 26일 작고하면서 곧 회장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후 1921년부터 1936년까지 '협전'을, 그리고 서화협회 소속 회원들의 전시 서화협회전을 15회 개최하면서 미술운동을 전개하는 데 힘썼다. 이 사이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을 때부터 창간 멤버로 재직하면서 1923년 12월 사직할 때까지 신문지 디자인에 참여했는데, 특히 창간호 1면 도안을 디자인할 때 고구려 강서대묘(江西大墓) 벽화에 나타난 이미지들을 참고한 후 이를 도안에 반영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추경산수(秋景山水), 1931년 |
그러던 중 1927년, 서화협회전에 한국화를 내면서 한국화로 회귀했다. 이 당시에는 동양화 기법들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화의 색채감과 명암법을 받아들여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그 당시 민족 정기의 상징으로 각광받던 금강산에 대한 그림을 비롯한 여러 풍경화들을 그렸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1939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서화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는 어디에도 그림을 출품하지 않았다.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조선미술건설본부(朝鮮美術建設本部) 중앙위원장으로 추대받아 취임했지만 첫 회의에 불참했고, 그해 11월 20일 정치적 색채를 완전히 초월하여 중립과 순수예술 파지의 태도로써 나아가자는 강령 아래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해산을 선포하고 조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결성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를 조직하여 4년간 회장으로 있었고, 이즈음 정계에도 입문해 미군정청의 자문기구였던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의 서무국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8년 한국민주당 상임위원에 선임되었고, 1949년 2월에는 문교부 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이후에도 속칭 국전의 심사위원을 계속해서 맡았다. 그리고 국전 제1회에서 제7회까지 계속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 당시 가톨릭 성화를 주로 그린 화가이자 장면 총리의 동생이기도 한 장발(張勃)과 함께 김일성의 납북 리스트에 오르게 되어 납치 위기를 맞는다. 그는 막내딸의 집으로 몸을 옮겼다가 조선인민군에 납치당할 뻔했고, 승려로 변장하여 서울 근교의 절로 가까스로 피신했다. 그러나 고희동의 둘째 손자가 조선인민군에 연행되어 목숨을 잃는 일도 일어났다. 그러던 중 9.28 서울 수복을 맞았고, 곧 문화인총연합회 회장으로서 문화인 부역자 심사의 주체가 되었다. 이들은 임의로 정한 원칙에 따라 A, B, C로 부역자를 나누었는데, 이때 서화협회를 함께 만든 김진우(金振宇)가 부역자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국방부 종군화가단 창설을 주도하였다. 1.4 후퇴 당시 경상남도 부산시 영주동(現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으로 옮겨가 피난 생활을 했다.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1953년에 대한미술협회 회장, 1954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이 개원되자 종신회원에 선출됨과 동시에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여 고문이 되었다. 1956년 제2회 예술원상(미술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발하여 국가보안법 개악반대투쟁위원회 발기인,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에서 사퇴했다. 그리고 1961년 1월부터 1962년 7월까지 MBC 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1965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다가 10월 22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현재 고희동이 원서동에서 살았던 옛 자택은 종로구청이 인수하여 종로구립 고희동 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1] 1967년 간행된 대한민국인물연감(제2편)에는 188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음력 3월 11일.[3] #[4] 춘곡 고희동 : 격변기 근대 화단 한 미술가의 초상(조은정 저)에서는 한성부 중부 장통방 비파동계 비파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을 출생지로 서술했고, 1976년 10월 15일 중앙일보 기사에서는 현재 고희동 가옥이 있는 종로구 원서동 16번지를 출생지로 서술하면서도 자라던 집이 비파동 준천사(濬川司) 바로 옆에 있었다고 언급했다.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도 1907년 당시의 주소지가 한성부 중서 장통방 광주경주인계 비파동 제59통 제4호로 기재되어 있어 일단 유년기를 보낸 곳이 이곳은 맞는 듯하다. 준천사 터는 현재 전태일기념관이 있는 종로구 관수동 152-1번지 부근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5] 아버지 고영철의 정실 부인은 한양 유씨(漢陽 劉氏)로, 사역원(司譯院) 참봉을 지낸 유병륜(劉秉倫)의 딸이다.고영철 역과방목[6] 1909년 9월 박은식·장지연·조완구(趙琬九)·이범규(李範圭)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교육부장에 선임되어 유교개혁운동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