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임나 즉 가야가 백제군사령부였다는 학설.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한국 학계의 여러 가지 해석 가운데 하나로, 천관우에 의해 제시된 설이다.가야사 전공자들 중에서는 "일제 식민사학과 동일한 시각과 논리"로 만든 역사왜곡으로 평가하지만, [1] 단순히 역사왜곡들과는 결을 달리하며, 식민사학과 동일한 시각과 논리라는 주장은 다소 지나친 비방이다. 임나 즉 가야가 백제군사령부라는 '결론' 자체는 틀렸을망정 그 결론을 내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가볍게 보고 간과할 것이 아니며,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위대한 실패’라고도 부를 수 있을 만큼 한국 사학계에 꽤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배경과 전개
백제 군사령부설은 식민 사학 극복을 목적으로 한 활동과정에서 전개되었다. 시작은 임나일본부설을 대체한 천관우의 ‘백제군사령부설’이다.천관우는 『일본서기』의 비판적 활용을 통하여 가야사의 복원을 시도하였는데, 『일본서기』의 가야 관련 기사에 대해 일본은 8세기에 소중화주의적 의도에서 일본 천황이 주변국(특히 한반도 삼국)에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었다는 왜곡된 관점을 전제로 세워 두고 편찬하였으므로 백제가 주체였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이 주체였던 것처럼 기술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2] 신공기(神功紀)의 가라 7국 평정의 주체를 왜가 아니라 백제라 주장하며, 임나일본부라 기술된 것의 실체는 임나백제부 같은 것으로 백제군사령부라 주장한다.
천관우의 「복원가야사」는 백제의 가야 지배사에 대한 학설이었고, 김현구도 백제가 임나에 직할령을 두고 통치하였지만 그곳에 일부 왜계(倭系) 백제 관료와 야마토 정권(大和政權)의 용병(傭兵)을 배치시켰다고 주장하며 천관우의 학설을 이어받아 백제가 가야를 지배하였다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분국설(分國論)’은 한반도 내의 가야사를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3]
3. 오류
4세기대에 백제가 가야지역에 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지배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백제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6세기대로 볼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가야지역에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문화는 찾을 수가 없다.[4] 어떠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고 정황적 근거도 없다.사실 고고학적인 것까지 갈 것도 없이 천관우의 주장대로 임나일본부가 백제의 임나 주둔 군사령부라고 한다면 임나일본부 주요 인사들이 왜인이라는 점이나, 그 인사권을 왜가 쥐고 있었다는 점, 명색이 백제 군사령부라면서 임나와 짜고 끝끝내 본국 백제의 말을 듣지 않고 버티는 현상[5]이 설명이 안 된다는 지적이 따른다.
4. 평가
식민사학극복이 가야사의 발전과정을 왜곡시켰다. 즉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려던 노력이 일제 식민사학과 동일한 시각과 논리로 접근하여 가야사를 왜곡하였던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을 대체한 천관우의 ‘백제군사령부설’이 그것이다. 『일본서기』의 비판적 활용을 통하여 가야사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일본서기』의 가야 관련기사에 대해 8세기 일본의 소중화주의적 편찬 때문에 백제가 주체였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이 주체였던 것처럼 기술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神功紀의 가라7국 평정의 주체를 왜가 아니라 백제였으며, 그 결과 성립하였다는 임나일본부는 임나백제부같은 것으로 백제군사령부라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末松保和의 『任那興亡史』가 가야의 흥망을 논한다면서 일본의 가야지배사로 일관한 것처럼, 천관우의 「복원가야사」는 백제의 가야지배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김현구도 백제가 임나에 직할령을 두고 통치하였지만 그곳에 일부 倭系百濟官僚와 大和政權의 傭兵을 배치시켰다고 하여 천관우의 학설을 이어받아 백제의 가야지배를 인정하고 있다. 김석형의 ‘分國論’은 한반도 내의 가야사를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4세기대에 백제가 가야지역에 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지배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현재까지 찾을 수가 없다. 백제가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6세기대로 볼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가야지역에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문화는 찾을 수가 없다. 임나일본부를 극복하는 과정이 오히려 가야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왜곡하였던 것이다.
남재우, 2011 「식민사관에 의한 가야사연구와 그 극복」 『한국고대사연구 61』, 한국고대사학회, p.186.
가야사 전공자 남재우는 일제 식민사학과 동일한 시각과 논리로 접근한 가야사 왜곡으로 평가하고 있다.4세기대에 백제가 가야지역에 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지배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현재까지 찾을 수가 없다. 백제가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6세기대로 볼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가야지역에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문화는 찾을 수가 없다. 임나일본부를 극복하는 과정이 오히려 가야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왜곡하였던 것이다.
남재우, 2011 「식민사관에 의한 가야사연구와 그 극복」 『한국고대사연구 61』, 한국고대사학회, p.186.
5. 그러나
다만 오해하면 안 될 것이 가야 백제군사령부설이라는 최종 결론이 문제가 있었다고 해서 천관우가 가야 백제군사령부설을 내놓는 과정에서 제시하고 고안했던 사료 접근 방법이나 관점, 그리고 거기에서 도출한 논리들까지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역사왜곡으로 부정해 버릴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천관우가 임나일본부를 가야 주둔 백제군사령부라는 잘못된 결론을 냈고 이에 대해 남재우 등 가야사 전공자들의 역사왜곡이라는 비판과 반박이 나오기는 했지만, 천관우가 그러한 '잘못된 결론'을 내는 과정에서 찾아내고 제시했던 사료 해석 방법론, 즉 "일본서기의 기록 가운데 한국사 관련 기사는 그 주요 사건들이 모두 천황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왜곡되었고[6]천황의 명령에 따라 행한 무엇무엇'이라고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관련 사료의 문장을 왜곡시켜 가필했다는 이야기다.] 사건의 주어를 왜에서 백제로 바꿔서 해석해야 당대의 현실과 아귀가 맞을 것"이라는 천관우의 지적은 천관우의 일본서기에 대한 접근 방법은 한국 사학계에서 일본서기의 왜곡된 관점을 걷어내고 일본서기를 한국 고대사 복원을 위한 1차 사료로 비판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한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지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7] 한마디로 위대한 실패.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한 업적인데, 천관우 이전 과거 일제 시대 일본서기의 기록을 주요 근거로 삼아 제시되던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남선경영론(임나일본부설) 같은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를 청산하고 극복하는 것이 급선 과제였던 한국 고대사학계에서는 일본서기가 아무리 왜곡이 심하고 과장이 많은 역사책이라고는 해도 일단 삼국이 멸망한 시점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8] 편찬되었고, 그것도 한국에서는 진작에 소멸되어 버린 백제삼서 같은 백제의 역사책을 원사료로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사 연구에 있어 일본서기를 마냥 내버릴 수도 없는, 그런 굉장히 찜찜한 분위기였다. 때문에 사학계에서 일본서기는 복어에 비유되곤 했다.[9] 맛은 좋지만 잘못 요리하면 죽을 수도 있는 복어.
소위 '황국사관'의 본산으로 왜곡과 곡필이 지독하게 심하게 되어 있어 정상적인 사료로 써먹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아예 배제해 버리자니 사료로써 삼국사기보다 훨씬 앞서 그것도 삼국 시대로부터 멀지 않은 시점에서 편찬되어 삼국사기에도 없는 한국 고대사의 여러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는[10] 강점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굉장히 미묘한 위치에 있는 이 일본서기라는 사료에 담긴 '왜에 의한 임나 경영'이라는 주장을 비판적으로 대하면서 '왜에 의한 임나 경영'이라는 황국사관의 관점을 벗어나 보다 객관적인 사료로써 일본서기를 활용할 수 있게 되는 전기가 천관우가 '주어 교체설'이라는 관점을 제시하면서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일본서기'라는 복어를 독을 제거하고 먹을 수 있게 '주어 교체설'이라는 이름의 재료 손질법을 천관우가 한국 사학계에 제시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작 그 손질법으로 나온 요리는 복어 본연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현재까지도 가야 백제군사령부설을 비난하는 이들 중에서, 심지어 본 항목에 제시된 남재우조차도 천관우의 임나 백제군사령부라는 '결론'을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할 망정 일본서기 기록의 주어를 왜가 아니라 백제로 바꾸어 해석하여야 한다는 사료 해석의 방법론과 '관점'(주어 교체설)에 대한 반박은 끝내 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한국 고대사 전공자들[11]은 천관우가 제시한 관점들을 사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호평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해 학설을 발표하고 있다.
또한 문헌 사료의 종합만으로 가야의 전기 중심을 김해로 보고 후기 중심을 고령으로 구분하여 본 것도 의외로 천관우가 제시한 중요한 업적의 하나이기도 하다.
[1] 남재우, 2011 「식민사 관에 의한 가야사연구와 그 극복」 『한국고대사연구 61』, 한국고대사학회, p.186.[2] 이것도 천관우 본인의 100% 독자적인 발명품은 아니고 이병도가 이미 이러이러한 것 아닐까 라고 살짝 시사했던 것을 천관우가 하나의 이론으로 수립시킨 것이다. 가야 백제군사령부설은 현재는 부정되고 있지만, 천관우가 이 설을 내놓으면서 제시했던 이 아이디어(백제가 주체였던 역사적 사실을 왜가 주체인 것처럼 왜곡시켜 서술해 놓았다는 지적)는 식민사학이 제공한 한국 고대사에 대한 관점의 틀을 깰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가야 백제군사령부설이 부정된 뒤에도 한국의 주류 사학계 학자들이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3] 남재우, 2011 「식민사관에 의한 가야사연구와 그 극복」 『한국고대사연구 61』, 한국고대사학회, p.186.[4] 남재우, 2011 「식민사관에 의한 가야사연구와 그 극복」 『한국고대사연구 61』, 한국고대사학회, p.186.[5] 일본서기에는 성명왕이 이른바 '임나 재건'을 긴메이 천황의 명령에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천황의 명령으로 임나 재건을 추진하고 있다'고 나오는 성명왕의 계획에 임나일본부 관계자인 가와치노 아타이나 아현이나사, 좌로마도 등은 그걸 돕는 대신 성명왕이 임나 재건 관련 회의를 해야 하니까 임나 관계자들에게 사비성으로 오라고 해도 그들을 가지 못하게 막고 하급 관리만 보내거나 신라와 내통하거나 아예 고구려와 내통해 고구려에서 백제를 좀 공격해 달라고 청원하는(!) 등(사비회의 참조) 사사건건 깽판을 놓으려 드는가 하면, 이 꼴을 본 성명왕이 왜의 사신에게 "나 저 새끼들하고 같이 일 못하겠으니까 천황한테 말해서 저놈들 좀 본국으로 소환하라고 해라"라고 하는, 그리고 긴메이 천황은 끝내 그들을 소환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해괴한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6] 쉽게 말해서 '백제가 주도한 무엇무엇'이라는 문장을 '백제가[7] 이재석 등 <고대 한일관계와 일본서기>[8]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된 것이 668년, 고구려 유민들의 국가인 보덕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것이 684년인데, 이 보덕국이 멸망하기 4년 전에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편찬이 시작됐다. 일본서기가 완성(720년)되기 22년 전에 698년에 한반도 북쪽에서 발해가 세워졌고, 고제덕이 최초로 사신으로 일본에 온 것은 일본서기가 완성되고 8년 뒤의 일이다.[9] 이영식, "《일본서기》 활용의 성과와 문제점" 에서. 《한국고대사연구의 새 동향》(한국고대사학회편, 서경문화사, 2007)[10] 고구려 안원왕 말기 벌어졌던 고구려 조정의 내전 사실을 소개한 것은 일본서기가 유일한데, 이것도 일본서기가 원사료로 활용했던 백제본기를 베이스로 한다.[11] 대표적으로 노중국이나 이도학, 김현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