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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7 04:53:01

안봉생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안봉생
安鳳生[1]生이라고 오기한 자료가 종종 보인다.]
파일:안봉생.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산남(山南)
본관 순흥 안씨[2]
출생 1908년 11월 22일
황해도 해주군 금산면 냉정리
(현 황해남도 해주시 작천리)
사망 1980년 1월 28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주공아파트 자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52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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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안춘생이 그의 첫째 남동생이며, 안중근 의사105인 사건에 연루된 독립유공자 안명근, 또 다른 독립유공자 안경근 등은 모두 그의 5촌 당숙부이다.

2. 생애

안봉생은 1908년 11월 22일 황해도 해주군 금산면 냉정리(현 황해남도 해주시 작천리)에서 아버지 안장근(安莊根, 1886 ~ 1956. 5. 20)과 어머니 청송 심씨(? ~ 1929. 3. 20)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5촌 당숙인 안중근 의사에 영향을 받아 남동생 안춘생을 비롯한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7년 8월 10일 부모님을 따라 중화민국 길림성 의란도(依蘭道) 목릉현(穆棱縣)[3]으로 망명하였다.

1927년 9월 길림성 주하현(珠河縣) 제4구(第四區) 오길밀진(烏吉密鎭)[4]에서 김좌진의 위촉을 받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혁명 청년을 규합, 안내했고, 혁명 민중 재조직을 위해 노력했다. 1931년부터 1932년 사이에 동광학교(東光學校)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 조직에 적극 노력했다. 그러다가 1933년 1월 일본영사관원이 체포하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재빨리 몸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동생 안춘생과 함께 5촌 당숙 안경근이 있는 난징으로 찾아갔고, 그곳에서 안경근, 안정근, 안공근 등의 지시에 따라 중앙군관학교 구내에서 30여 명의 한인 학생들과 함께 합숙했으며, 이들을 지도하는 조완구, 차이석, 엄항섭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며 보좌 임무를 수행했다.

1935년 김구와 안정근, 안공근의 특명을 받고 만주에서 반만항일전선에 참가해 활동하다가 정준수(鄭駿秀)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요시찰 인물로 낙인 찍혀 일제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어렵게 지내던 중 1945년 8월 12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으나[5], 8.15 광복으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1980년 1월 28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주공아파트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안봉생에게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고,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10월 8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했다.

[1] [2] 참판공파-서령공파 31세 생(生) 항렬.[3]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무링시(穆棱市).[4]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상즈시(尙志市) 우지미향(烏吉密鄕).[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