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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7:46:30

안정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명문가
안중근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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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ddd> 성명 서훈 내역 비고
안봉생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안태진의 차남
안장근의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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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근의 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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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안태훈의 장남
안정근 건국훈장 독립장 (1987) 안태훈의 차남
안원생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안정근의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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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애국장 (1990)
김구의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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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공근 건국훈장 독립장 (1995) 안태훈의 3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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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안미생의 남편
김인의 부친
※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는 안태옥, 안태진, 안태현, 안태훈, 안태건, 안태민, 안태순 등 7남 및 4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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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안정근1.jpg
1914년, 러시아 장교로 발탁된 뒤 찍은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안청(安淸)·안정근(安正根)
청계(靑溪)[1]
본관 순흥 안씨[2]
출생 1885년 1월 17일[3]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
(현 황해남도 신천군 석교리)
사망 1949년 3월 17일 (향년 64세)
중화민국 상하이
가족 배우자 이정서
아들 안원생, 안진생[4]
딸 안혜생, 안미생, 안옥생, 안은생
사위 김인[5]
종교 가톨릭 (세례명 : 시릴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987)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2.3.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행적2.4. 전간기의 행적2.5. 말년의 행적
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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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884년 11월 15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현 황해남도 신천군 석교리)에서 안태훈(安泰勳)과 조씨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안정근은 14살 때 동생 안공근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부친이 세운 신천군의 청계동 성당을 다녔고, 천주교 서적과 프랑스 신부를 접하면서 서양의 문물과 언어와 사상을 체험했다. 그는 청계동에서 천주교도로 지내는 동시에 한학을 수련하고 농사감독을 맡았다.

흥사단 입회 이력서에는 안정근이 1892년부터 1900년까지 한문사숙에서 수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안정근은 1910년 여순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형 안중근은 3~4년간, 자신은 7~8년간 한문을 배웠다고 밝혔다. 이는 안정근이 8~9세 때부터 10대 중반까지 청계동 서당에서 한학을 수련했음을 암시한다. 김구백범일지에 따르면, 안태훈은 안정근, 안공근에게 글 공부하라는 훈계를 자주 내렸다고 한다. 또한 안중근은 사격술이 제일이었고 언제나 사냥을 다니고 있었고, 동생 안정근은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글 잘 읽는 도련님"이었다고 한다.

안정근은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자기 집안 소유 농토에 대한 농사간부를 맡았고, 진남포 이주 직전인 1905년부터 1906년까지 무역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장사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1906년 봄 일족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을 떠나 황해도의 개항장인 진남포로 이주했다. 그가 진남포로 이주한 것은 동생들에게 신식교육을 시키고 자신은 상업에 종사하려는 안중근의 뜻에 따른 것이다.

안정근은 진남포에서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계통의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영어를 가르쳤다. 안중근은 교장을 맡았고, 그는 교사를 맡았다. 얼마 후, 그는 신천의 만석꾼인 왕재덕(王在德)의 고명딸 이정서와 결혼했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해 양정의숙(養正義塾)에 입학했다. 서울에 연고가 없던 안정근은 서부 봉상사 남문동에서 하숙생활을 하며 양정의숙에서 법률학에 전념했다.

2.2.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26일, 친형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이때 안정근은 26세로 양정의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경시청 비밀보고문서 1909년 10월 31일자 기록에 따르면, 안정근은 성격이 온순하고 후덕하며, 매사에 신용이 있었고 천주교 신자로 일요일마다 프랑스 교회당에 다니고, 동급생 윤교신(尹敎信)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형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뒤 여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양정의숙을 자퇴하고 동생 안공근과 함께 친형의 옥바라지에 온갖 힘을 쏟았다.

그 후 사형 집행 하루 전인 1910년 3월 25일, 안중근은 두 동생 안정근, 안공근과 마지막으로 면회했다. 안중근은 이 자리에서 자신이 죽은 뒤 처리해야 할 일들을 당부했다. 우선 하얼빈에 가서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소재한 이치권의 집에 맡겨둔 의복과 거사 전에 잘랐던 손가락(단지)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안정근은 형의 시신을 여순 형무소 인근 언덕에 매장하고 귀국했다.

그는 맏형을 대신하여 가장 역할을 떠맡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더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1910년 봄에 어머니 조마리아와 누이동생, 그리고 안중근의 유족과 자신의 가족, 동생 안공근의 가족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망명했다. 그는 처음에는 북만주로 갔다가 얼마 후 연해주의 니콜리스크로 이주했다. 그리고 1911년 단지 동맹원 백규삼에게서 잘린 손가락과 함께 혈서를 적은 태극기를 넘겨받았다. 그가 새로 거주한 니콜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방 50리 지점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인심이 좋아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월경한 조선인들이 대거 운집해 살고 있었다.

안정근은 안중근의 친동생으로 명망이 높았고 인품이 후덕했기에 그의 숙소는 항상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 되었다. 부인 이정서는 집안의 재정이 궁핍해지면 국경을 넘어 친정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다. 안정근의 장모 왕재덕은 학교를 짓고 운영자금을 대는 교육지도자로 활동하면서도 사위를 위해 경제적 지원을 헌신적으로 해줬다. 안정근은 그 덕분에 망명지에서 조선인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장남 안분도가 독살당하는 등, 그와 가족에 대한 위협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2.3.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행적

1914년 러시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 중에서는 러시아 군대에 입대하여 참전함으로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실전경험을 풍부히 쌓아 후일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이려는 이들이 늘었다. 안정근 역시 일제의 마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위생장교로 임용되어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한편 그는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연해주에서 경제적 기반을 갖지 못해 가난에 허덕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직접 벼농사 사업을 시도했다. 벼농사는 성공적이었고, 그곳에 이주한 한인 뿐 아니라 러시아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은 연해주에서 벼농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안정근의 공적을 여러 차례 조명하기도 했다. 한편, 안정근은 1914년 6월부터 <권업신문>에 게재된 계봉우의 <만고의사 안중근전>의 관련 자료들을 제공해 민족의 자긍심과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개최된 ‘조선정치망명자협의회’에 이동휘, 양기탁, 유동열, 이동녕, 김립, 박애 등과 함께 참석했고, 입헌 군주제적 입장에서 러시아 원동인민위원회로부터 후원만 얻자는 이동녕의 주장을 지지했다.

1918년 11월, 안정근은 중국 동삼성 길림에서 무오독립선언서에 발표될 때 대표 39명 중 한 사람으로서 서명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상하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으로부터 김구와 함께 이사에 피임되었다. 그는 자신이 신한청년당 이사에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자식들과 조카들의 교육을 위할 겸 상하이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2.4. 전간기의 행적

1919년 늦가을 상하이에 이주한 그는 1919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법무총장 신규식, 재무총장 이시영의 취임식에 귀빈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1919년 11월 20일,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추천되었으며, 동시에 대한적십자회 부회장을 제안받았다. 그는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중 대한적십자회를 택했다. 당시 대한적십자회 회장인 이희경(李喜儆)은 업무차 미국에 장기체류하고 있어서, 부회장으로 취임한 안정근이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로서 적십자회를 이끌어 나갔다. 안정근은 매우 적극적으로 적십자회를 이끌어 취임 당시 999명이었던 회원을 6개월 후에는 2,128명으로 확장 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 11월, 안정근은 임정의 지시에 따라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원으로 발탁되어 신천군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을 조사해 임정에 보고했다. 그러던 1920년 3월 26일, 만주에 설립된 무장독립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임정에게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과 자신들간의 갈등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군정서와 국민회에 무관한 사람으로서, 신망이 있고 군사상 지식이 있으며 명석한 두뇌와 공정성을 지닌 인물이 중재를 해주길 바랬다. 이에 임정은 안정근과 군무위원 왕삼덕(王三德)을 “파견위원”으로 엄선했다.

안정근과 왕삼덕은 1920년 5월 17일 북간도에 파견되어 각 단체들의 본거지를 일일이 방문하면서 효과적인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임시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각 단체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합조건을 고집해 통합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노고로 의민단(義民團)과 의군단(義軍團)이 통합되었다. 대한국민회와 북로군정서는 완전통합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격의 없는 토의를 통하여 상호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도모하기로 합의했으며, 서간도 방면에서 군사 활동을 하고 있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도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하는데 합의했다.

이후 독립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자, 안정근과 왕삼덕은 이를 호기로 여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실제보다 과장된 전과를 보고했고, 임시정부는 이를 독립신문 호외를 통해 공식 발표했다. 안정근과 왕삼덕은 통합운동의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대한국민회, 의민단, 의군회, 신민회, 한민회가 통합하여 대한국민회의 사령관 홍범도의 지휘 아래 연합부대를 결성하고 북로군정서의 김좌진과 협조하게 했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서도 독립군이 전력을 보존한 채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자, 안정근은 동료 왕삼덕을 상하이로 보내 실제보다 과장된 전과를 임정에 전하게 했다. 임정은 이 보고서를 인쇄하여 각 방면에 배포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세력의 사기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한편 안정근은 부상병을 위한 구제사업에 앞장섰고, 교민들을 상대로 구호 사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안정근이 언제 상하이로 복귀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1921년 11월 21일 공석 중인 대한적십자회 회장을 대신하여 총회 개회를 선포한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상하이에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한적십자회의 향후 업무방침을 논하는 자리에서 북간도 교민과 부상병들의 참담한 정황을 설명하고 이들을 구호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적절한 장소를 택하여 병원을 설립해야 하며, 아군 주둔지에 구호원을 파송할 것을 제안하여 성사시켰다.

또한 대한적십자총회는 그동안의 업무공백을 보완하기 위하여 임원 보궐선거를 실시했다. 이희경 회장의 후임으로 안창호가 선출되었고, 결원 상태의 감사와 임원을 대신할 이들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안창호가 회장 직을 극구 사양하자, 안정근이 또다시 회장 직을 대행하게 되었다. 1922년 정월, 안정근은 <독립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시를 투고했다.
祝新年
大地에 新年이 來하고
萬里에 春風 吹하도다
三年陰雲에 呻吟하는 半島萬象
四年東風에 活躍하니 全球和氣로다

한편, 안정근은 1920년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입단했다. 그는 1922년 2월 4일 흥사단 강당에서 <최근 본국의 참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또한 그는 중국인 정원(鄭沅)이 출간한 <안중근전> 부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게재했다.
나의 형님인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 임종할 때 나에게 최후의 몇 마디를 유언하였다. 하나는 조국동포들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동포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조국을 위해 나라의 원수를 죽였으니 오늘 이 한 몸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다만 나라의 회복을 보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유감스러울 뿐이다. 다행으로 동포형제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조국회복에 협력한다는 소식이 천국에 도달되면 나의 하늘에 있는 영혼과 땅에 파묻힌 유골도 당연히 즐겁게 춤출 것이다. 나는 두 나라 관계와 동양대세를 위해 이등을 죽이고 이 몸도 죽게 되니 중화민국은 나의 이 진심을 응당 이해하고 두 나라의 운명관계를 깊이 생각하며 우리 한국 2천만인과 중국 4억만인을 도탄에서 구해내야 한다. 내가 오늘 말하는 것은 한국독립이 회복되기 전에는 중화민국도 필연코 편안한 날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10년 후인 나는 우리 한국독립운동을 이어 받게 되었다. 중국에 대하여 감상의 표출을 금할 수 없어 정성스러운 이 진심을 그대로 알리는 바이다.

중국의 지식인들도 일제를 섬멸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고, 1921년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중국인 정치가들이 연합하여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했다. 중한호조사는 중국인과 한국인의 친선을 도모했고 한국 청년의 중국 유학과 구미 유학을 위한 여권 주선 등을 수행했다. 안정근은 1923년 9월 1일 제3회 총회에서 여운형, 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의 한국측 이사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22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신한청년당 수뇌부들이 공산주의자로 변모하면서 당 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그는 김구, 김인전 등과 함께 탈당했다. 1923년 10월 24일, 안정근은 상해교민단 제4회 의원 선거에서 본 구역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안정근은 1925년경 건강에 이상이 생기자 신병 치료를 목적으로 자신의 가족만 데리고 산동반도 동쪽 끝의 항구도시인 웨이하이로 이주했다. 안정근은 이 곳에서 어선 건조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어선을 건조하여 교민들에게 공급함으로써 교민들의 생계를 보장하고 기회가 되면 어선을 공작용 선박으로 개조하여 본국에 상륙하기 위한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이 사업은 1937년까지 진행되었지만 중일전쟁 발발 후 일제가 중국 대륙을 유린하기 시작하자 사업을 중단하고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피신했다.

2.5. 말년의 행적

안정근은 홍콩에서도 공작선 건조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못하면 자식들이라도 선박 전문가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차남 안진생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한국 최초의 조선공학박사가 되었다. 그러나 안정근은 1939년부터 뇌병으로 고통을 받아 중국 각지를 돌며 은거 생활을 했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1945년 3월 16일 한국구제총회 회장에 선임되어 각종 구제, 자선 보건 사업을 주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마가 심각해 업무를 맡지 못하고 이름만 걸어뒀을 뿐이었다.

8.15 광복 후에도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상하이에서 요양 생활을 하다 1949년 3월 17일에 병사했다. 그는 생전에 안중근의 단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한국의 정세가 안정되면 안중근의 유해를 국내로 송환해 고향에 묻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를 실현시키지 못한 채 사망했고, 안중근의 묘소, 단지는 행적이 묘연해졌으며, 그 역시 묻힌 장소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더불어 동생인 안공근 마저도 상하이에서 실종되는 바람에 안중근 삼형제는 끝내 죽어서도 고국 땅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안정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대중매체에서



[1] 청계(淸溪)의 오기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형 안중근의 초호가 청계(淸溪)인데 안중근, 안정근의 본가가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淸溪洞)에 있었다.[2] 참판공파-서령공파 30세손 ○근(○根) 항렬.(족보)[3] 음력 1884년 12월 2일.[4] 초대 주 미얀마 대사 역임[5] 김구의 장남. 안미생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