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안항식(安恒植) |
본관 | 순흥 안씨 |
생몰 | 1860년 10월 15일 ~ 1922년 5월 20일 |
출생지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기덕리 |
사망지 | 충청남도 청양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안항식은 1860년 10월 15일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기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안향의 22대손으로, 1906년 4월 민종식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킬 때 참모사(參謀士)로 참전하여 홍주성 공략에 기여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도로 함락되고 83명의 동료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서울의 일본군 사령부에서 심문을 받고 7월에 유죄 선고를 받은 뒤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대마도로 유배된 이들은 이칙(李侙), 유준근, 신현두(申鉉斗), 이상구(李相龜), 신보균, 최상집, 문석환 등 9명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들을 '9의사(九義士)'라 칭했다.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안항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한 가락 뱃노래에
해문(海門)에 당도하니 대마도라
만여 가의 마을이 있네
온 산의 솔과 대는
누구 위해 푸르렀나
우리도 저와같이
절의를 지켜보세.
해문(海門)에 당도하니 대마도라
만여 가의 마을이 있네
온 산의 솔과 대는
누구 위해 푸르렀나
우리도 저와같이
절의를 지켜보세.
이후 최익현, 임병찬이 잇달아 대마도로 유배된 뒤, 그는 최익현 등과 함께 교류하며 시를 짓고 아침, 저녁으로 조국을 향한 망배(望拜)를 행했다. 그러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4년만에 유배형이 해제되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고 1922년 5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안항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