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공사겸(孔士謙) |
이명 | 공재규(孔在奎) |
본관 | 곡부 공씨 |
생몰 | 1848년 8월 23일 ~ 1919년 3월 23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 |
사망지 | 경상남도 합천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공사겸은 1848년 8월 23일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삼가 장날을 이용해 정연표(鄭演彪) 등과 함께 4백여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 행사로 일단 해산하고 3월 23일 상백현에서 다시 거사하기로 했다. 이윽고 3월 23일, 그는 정원규(鄭元圭)·진택현(陳宅賢)·오영근·정치규(鄭致圭) 등과 함께 4천여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상백면사무소 일대를 행진하고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이후 군중은 10여 리 떨어진 삼가장터로 행진했으며, 도중에 일제의 연락망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주 2개를 쓰러뜨렸다. 이날 삼가 장터에는 가회, 삼가, 상백면으로부터 군중이 모여들어 그 수가 1만 3천 명에 달했다.오후 3시경, 정금당 앞에서 김전의(金典醫), 정방철(鄭邦哲)·김달희(金達熙)·임종봉(林鍾鳳) 등이 등단하여 조국독립의 필연성과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는 강연회가 열렸다. 그러나 마지막 연사인 임종봉이 등단하여 연설을 할 무렵, 강연장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 헌병이 임종봉에게 총격을 가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그들에게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경찰주재소로 도망하였다. 오후 5시 30분경, 시위군중은 몽둥이와 낫을 들고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이때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공사겸은 현장에서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공사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