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문용기(文鏞璂/文容基) |
호(號) | 관재(寬齋) |
본관 | 남평 문씨(南平文氏) |
출생 | 1878년 5월 19일 |
전라북도 익산 | |
사망 | 1919년 4월 4일 |
묘소 | 대전현충원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이리군 만세운동[1]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문용기(文鏞祺)는 전라북도 익산 출신으로 한학을 수학했으며 서당 훈장으로 재직하던 중 군산의 영명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목포의 영명학교(왓킨스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공부함에 이어 함경도 갑산에서 미국인의 통역사로 근무하였다.3. 주요 활동
1919년의 3 · 1 운동 후에 박도현, 장경춘 및 기독교계통의 인사들과 비밀리에 만남을 가진 문용기는 4월 4일의 이리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거사의 당일, 이리 장터에 집합한 3백여 명의 군중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행진을 진행했다. 시위 군중의 규모가 점점 커져 나가자 출동한 일본 헌병대는 소방대원과 농장원들을 동원해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했으나, 문용기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태극기를 손에 들고 군중들의 선두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연설하였다.
그러자 칼을 휘두른 일본 헌병은 그의 오른팔을 절단하여 태극기를 땅에 떨어트렸다. 그에도 굴하지 않았던 문용기는 왼손에 태극기를 든 채 만세를 외치며 전진했는데, 잇따라 왼팔마저 베어 나갔다. 두 팔을 잃었음에도 전진을 멈추지 않았던 그를 추격한 일본 헌병은 문용기를 무기로 난자하며 무차별 폭력을 자행했다. 끝없이 독립 만세를 외치던 순간에 숨을 거둔 그는 4월 5일 이후 군내의 각 지역에서 이루어진 횃불 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하였다.
문용기의 공훈을 기리는 의미에서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익산 4·4만세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