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양계갑(梁癸甲) |
본관 | 남원 양씨 |
이명 | 양윤승(梁允昇), 양흥렬(梁興烈) |
생몰 | 1891년 ~ ? |
출생지 | 함경도 길주목 웅평사 용천동[1] (현 함경북도 길주군 쌍룡리)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양계갑은 1891년생이며 함경북도 길주군 웅평면 용천리(현 길주군 쌍룡리)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망명했고, 1924년 음력 2월 27일부터 대한통의부 재무부장 홍림의 도장이 찍힌 영수증을 가지고 김재헌·박창섭(朴昌燮)[2]·최홍윤(崔弘潤)·김홍기(金弘基)·한창걸·김희철(金希哲) 등과 함께 음력 5월 29일까지 22회 이상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주로 연길현 용지향·동성용·국자가·대허문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적게는 1엔에서 많게는 70엔에 이르는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군자금을 모집할 때 대한통의부 총무부 최치원(崔致元), 감리부(監理部) 이태성(李太星), 군무부 홍범도(洪凡道) 등의 명의로 된 선고서(宣告書)를 배포했다.그러나 1942년 6월 5일 간도총영사관 경찰서가 급파한 9명의 순사들에게 모집원 7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1925년 2월 4일 청진지방법원에서 강도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양계갑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