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871년 2월 7일 |
프랑스 제3공화국 뫼르트에모젤 주 포룩스 | |
사망 | 1960년 5월 23일 (향년 89세) |
프랑스 파리 | |
국적 | 프랑스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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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한국의 외국인 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루이 마랭은 1871년 2월 7일 프랑스 뫼르트에모젤 주 포룩스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프랑스에 잔류한 로렌 지역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직후 사망했다. 그는 낭시 근방의 말랑주(Malgrange) 대학에 재학했고, 이후 낭시 법학 대학에서 공부한 뒤 파리로 이주했다.그는 책을 읽길 좋아했으며, 여행에 대한 애착도 가지고 있었다. 1891년에 독일을 여행했고, 이듬해에 루마니아와 세르비아를 여행했으며, 1892년에 알제리를 방문했다. 1893년엔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가 설립한 에스노그라피 협회에 가입했고, 1900년 상임위원이 되었으며, 1920년엔 협회장에 취임했다.
1899년, 마랭은 그리스, 폴란드,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아르메니아, 투르키스탄, 중앙아시아, 중국 서부를 여행했다. 그리고 1901년에 시베리아, 만주, 중국 북부, 그리고 한국을 여행했다. 그는 조르주 뒤크로와 함께 쓴 여행기에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국은 극동의 프랑스이며, 한국민은 순수하고 친절하다.
마랭은 귀국 후에도 대한제국 관련 학술 논문을 7편이나 발표했다. 그가 이토록 한국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알자스, 로렌 지역 대다수가 독일에 넘어간 것과 한국이 열강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에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마랭은 1903년 공화당을 창립했고, 평생 이 당에 종사하면서 1905년 낭시 제1구역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 구역에서 재선되었다. 그는 의회에서 매우 활동적이었으며, 많은 법안이나 결의안을 발의했다. 또한 뫼르트에모젤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우파에 속했고, 보수주의 정당인 Fédération républicaine 소속이였다.[1]
마랭은 1909년 '폴란드 친우회'를 결성해 폴란드의 독립을 요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쳤으며, 일본과 독일의 침략,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는 의회 보고서를 11차례 작성했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의회에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인권운동가 펠리시앙 샬레를 한국에 파견했다. 샬레는 2달 동안 경성 등지에서 시위를 목격한 뒤 프랑스에 돌아와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일본 군경은 해를 끼치지 않는 군중을 향해 마구 총질을 하고 수많은 평화적인 한국인들을 죽였다. (중략) 일본의 친구였던 내가 이제부터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하고자 한다."
이후 마랭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파리를 방문한 김규식과 대면한 뒤 1919년 8월 6일에 김규식이 이끄는 한국통신국이 마련한 연회에 참석했다. 그는 1921년 6월 23일 파리에서 한국친우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그는 창립총회 연설에서 4천년 역사와 문화를 가진 국가를 일본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강제로 합병하여 지금도 한국인들이 항거하고 있다면서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한국인들에게 효율적인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프랑스 대중에 대한 적극적인 선전 활동을 시행하여 많은 가입자를 확보해야 한다."
김규식 일행은 비록 파리강화회의 참석은 거부당했지만 마랭의 도움 덕분에 제2인터내셔널 제네바 회의에서 한국 독립안을 승인받았고, 영국에서도 한국친우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 또한 교황 베네딕토 15세로부터 "한국 천주교의 자녀들이 받는 핍박을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밀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한국친우회 부회장 쥐스펭 고다 상원의원의 손자 프랑수아 발랑주의 증언에 따르면, 사무국장 클로드 페레르가 일제의 첩자 노릇을 해 친우회가 서명운동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방해하는 바람에 프랑스의 한국친우회는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의정 활동을 수행하며 여러 내각에도 참여해 보건, 체육, 국무부 장관을 역임하던 마랭은 프랑스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뒤 필리프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투표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이후 그는 정계를 떠나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한 부류인 프랑스 국내군(Forces françaises de l'intérieur) 대장을 맡아 나치 독일에 저항했다. 그러다가 게슈타포가 체포 영장을 발부하자 런던으로 피신했고, 1944년에서 1945년까지 임시 협의회 의원을 지냈다.
1945년 프랑스로 귀환한 마랭은 그해 7월 필리프 페탱의 재판에 참여했고, 8월부터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1951년 6월 17일 총선에서 패배한 그는 1952년에 뫼르트에모젤 총회장 직임에서 사임했고, 이후로는 학계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정치학과 에스노그라피에 관한 저서들을 집필했다. 그러던 1960년 5월 23일 파리에서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루이 마랭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