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안이현(安履賢) |
이명 | 이만원(李萬源), 이수길(李守吉), 이문일(李文一), 김기현(金基鉉) |
생몰 | 1891년 ~ ? |
출생지 |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리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안이현은 1891년생이며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리 출신이다. 그는 1919년 4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광부로 일하던 중 대동단(大同團) 단원 홍성일(洪聖一)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했다. 이후 1920년 1월 상순 상하이를 거쳐 간도로 건너갔고 그해 3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해 서무부장 홍정도(洪正道) 휘하에 배속되어 서무부 서기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10월 서부지방총회장 한대진으로부터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파견되었다. 이후 19221년 4월까지 함경남북도 일대를 순회하며 무산의 김약연(金若淵)[1], 명천의 김계태(金桂太)·김한송(金漢松), 길주의 문희종(文鍾熙), 성진의 이효근(李孝根)·양진홍(梁珍鴻)·이화선(李化善)·이왕담(李王錟), 함흥의 이배식(李培式) 등을 동지로 규합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여 약 1,000여 원을 모집했다.그러나 1921년 4월 21일 함흥 읍내에서 삼성병원 이배식을 위장 방문했다가 매복한 함흥경찰서 경찰에게 발각되어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1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강도,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8월 3일 복심법원에서 공소 취하로 형이 확정되어 함흥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7년 5월 5일에 출옥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안이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