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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0 20:42:36

장경춘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장창식(張昌植), 장원식(張元植)
본관 미상(未詳)
출생 1880년 10월 8일
충청북도 음성
사망 1923년 5월 9일
묘소 대전현충원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생애와 주요 활동

충청북도 음성(陰城) 출신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인 장경춘(張景春/장창식張昌植/장원식張元植)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제천(堤川)의 의병장 정운경(鄭雲慶)의 의진에 가담하여 박달재 전투와 단양전투에 동참했다.

그 후 1907년 9월에는 괴산군(槐山郡) 죽산면(竹山面)의 백암(白岩) 시장에서 의병장 강한조(姜漢祚)와 만나 의병부대의 십장(什長)으로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이천(利川), 진천(鎭川), 음성(陰城)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이행하던 중 이교철(李敎喆)의 의병부대와 투숙하던 민가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힌 장경춘은 몇 달 뒤인 1907년 12월에 경기재판소에서 종신 유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의 1월, 재판 관청인 평리원(平理院)에서 15년의 유형으로 감형된 그는 서도(西島)에 유배되었다. 장경춘은 대략 2년 8개월간 지속되었던 유배생활의 끝에 1910년 해금되었으며 그 이후 만주(滿洲)의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해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휘하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장경춘에게는 1986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1:독립유공자 전자사료관
참고2: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3:시사안성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