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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4년 |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지명동# | |
사망 | 1921년 (17세) |
서대문형무소 | |
본관 | 광천 동씨# |
가족 | 아버지 동민수, 어머니 언니 동○○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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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4년경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지명동에서 농민 동민수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후, 3월 14일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박승룡, 김성련, 허영준, 김하용 등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다음날인 3월 15일 화대장터에서 5천여 명의 군중을 모아 만세를 부르며 하가면사무소로 향했다. 그들은 하가면장 동필한(董弼漢)[1] 을 끌어내어 "너도 조선 사람이니 우리의 대열에 참가하여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그러나 동필한이 "나는 조선총독이 임명한 면장이니 총독의 지시가 없이는 만세를 부를 수 없다."고 하자, 군중들은 격분해 면장에게 침을 뱉고 이리저리 쳤다.이때 김성련이 면장을 죽이려 하자, 좌수(座首) 현기율(玄機律)이 가로막았고, 동필한은 헌병분견소로 피신했다. 이에 시위대가 분견소로 몰려가자, 기마 헌병대의 발포로 5명이 죽고 11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시위 과정에서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가 병을 무릅쓰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아버지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풍신은 의복을 소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푼 뒤 현장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다가 결연히 일어나 눈물을 닦고 목이 찢어들 듯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 앞으로 나아갔다. 헌병들은 그녀가 소복을 입고 아버지의 피로 온 몸이 젖고 머리를 풀어 헤친 걸 보고 "미친 소녀"라고 여기고 발포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본 군중은 감동하여 시위 대열을 정돈했다. 이때 면장이 일병을 불러들었다는 소문이 돌자, 군중은 격분하여 다시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고 면장의 집과 회계원 집을 불태웠다.
그 후 동풍신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의기를 꺾지 않았다. 그녀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뒤 일제 간수들의 회유를 수차례 받았지만 모두 뿌리쳤다. 이에 순사들은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화대동의 화류계 출신 모 여인을 같은 감방에 놓고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풍신아. 너의 어머니는 네가 잡혀간 뒤에 혼자서 외롭게 지내면서 밤낮으로 애태우다가 너무 상심한 끝에 실신하여 너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을 떠났단다.
그 말을 들은 동풍신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의식을 회복한 뒤 식음을 전폐하다가 1921년 경에 옥중에서 사망했다. 향년 17세.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동풍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유관순과 더불어 감옥에서 요절한 여성 독립운동가이지만 이쪽은 어찌된 일인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1]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성구동 광천 동씨 집성촌 출신. 아래와 같이 구한말부터 지역 유지로 군림하였다. 구한말이던 1907년 10월 23일 함경남도 관찰도주사(觀察道主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1910년 11월 5일 조선총독부 도서기를 그만두었고 1911년 7월 12일부터 1912년까지 경성군 서기로 근무했고, 1915년 9월 9일에 화태금융조합(花台金融組合)을 설립하여 대표로 취임, 1933년 4월 당시에도 대표로 있었다.# 1918년 8월 28일 함경농공은행 주주로서 조선식산은행 창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전후부터 명천군 하가면장을 지낸 사실이 확인된다.조선총독부 직원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