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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00:48:56

남석순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남용준(南容俊)[1]
이명 남용린(南容麟)·남용인(南容仁)
자 / 호 시걸(時傑) / 서산(西山)
본관 영양 남씨[2]
출생 1911년 1월 9일
강원도 울진군 상군면 정림리
(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3]
사망 1943년 12월 9일[4]
경상북도 대구부 삼립정 대구형무소
(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2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74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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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남왈성은 그의 사촌 형이다.[5]

2. 생애

남석순은 1911년 1월 9일 강원도 울진군 상군면 정림리(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에서 아버지 남백년(南百䄵)과 어머니 남평 문씨 문재락(文載洛)의 딸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6]#

그는 1932년 1월 윤두현(尹斗鉉), 진기열(陳基烈), 이우정(李愚貞), 남왈성, 전영경, 주진황(朱鎭晃), 최학소(崔學韶), 황택용(黃澤龍), 최재소(崔在韶), 전홍석(田洪碩), 주맹석(朱孟錫), 주유만, 남준영(南峻永) 등과 함께 조선독립공작당(朝鮮獨立工作黨)을 조직했다. 그러나 1934년 2월 조직이 일본 경찰에게 탄로나는 바람에 함흥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으며, 그때 왼팔에 상처를 입고 불구가 되었다.

1940년 4월, 남석순은 임시헌, 전남출(田男出)의 권유를 받아들여 창유계(暢幽稧)에 가입했다. 창유계는 계형태를 가장하여 소규모 조직으로 운영되면서 한국의 독립을 꾀한 비밀결사로, 결성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가지면서 조직의 강화와 선전활동의 확대에 주력했다. 그러나 1943년 3월 경찰에 의해 발각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고, 남석순은 또다시 체포되어 예심을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1943년 12월 9일에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남석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9월 7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1] 남씨대동보 2권 대광공후 송정공파(영양 본관) 498쪽에는 남석순이 초명으로 기재되어 있고, 족보에는 남용준으로 등재되어 있다.[2] 송정공파(松亭公派)-울진 정림(井林) 문중 16대손 용(容) 항렬. 영양 남씨 24세.[3]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남복이·남원수·남왈성·남왈기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음력 11월 12일.[5] 남석순의 아버지 남백년(南百䄵)은 남왈성의 아버지 남만년(南萬䄵)의 친동생인데, 남만년이 11촌뻘되는 족숙 남국영(南國永)에게 입양되면서 족보상으로 남석순과 남왈성은 14촌 지간으로 멀어지게 되었다.[6] 조부는 남효영(南孝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