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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5:09:05

천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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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천소악 (千小岳)
파일:천소악.jpg
출생 1912년 4월 12일
경상남도 부림동(현 : 창원시 마산합포구)
사망 1960년 9월 21일 (향년 49세)
부모 천종록(부), 김복득(모)
형제 1남 1녀- 천필우(남동생)
배우자 김영식
자녀 4남3녀
(장녀 김혜경, 차녀 김혜숙, 장남 김한석, 삼녀 김혜정,차남 김이곤, 삼남 김상곤, 사남 김하곤)
경력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지 편집위원
종교 불교
상훈 2019년 대통령 표창 추서[1]
1. 개요2. 독립운동(학생운동)3. 생애4. 여담5. 관련기사 및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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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소악(千小岳, 1912년 4월12일~1960년 9월2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다. 본관은 영양이다. 이명은 천임득(千任得)이고, 경상남도 마산출생이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숙명여고보) 4학년 때 학생운동을 하였다.

2. 독립운동(학생운동)

1926년 4월1일 :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숙명여고보) 입학

1930년 1월15일 : 숙명여고보 4학년 당시, 1930년 1월 15일, 서울시내 20여개의 연합학교 학생운동으로 종로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했으나, 일본경찰에게 계획이 들통이 나면서 연합학교 학생 가두시위는 진행되지 못했다.
1930년 1월16일 : 숙명여고보는 자체적으로 천소악, 한소애가 주동이 되어 교내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1월 16일 오전 조회시간에 400여명의 전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며 교문 밖으로 진출을 시도하다 일본경찰의 저지를 받았다. 그러나, 끝까지 만세운동을 외치며 일제에 저항하던 천소악은 몰래 교문 밖으로 나와 다른 학교와 연락을 취하다 혼자 늦게 학교로 돌아오다가 일본경찰에 눈에 띄었다. 결국 일본경찰에 체포돼 경성 서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어 구류 20일의 처분을 받았고, 학교는 천소악을 무기정학시켰다.

1930년 2월 5일 : 천소악이 석방되자, 학교는 무기정학을 해제하였다.
1930년 3월 25일: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제 21회 졸업

3. 생애

천소악(千小岳)은 1912년 4월 12일 경상남도 마산시 부림동에서 1남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천종록은 함경도, 서울, 인천, 경상도 등을 오가며 무역업을 크게 하면서 꽤 부유하게 살았다. 전국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여자라도 배워야 한다”는 시대에 앞선 선견지명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맏딸인 천소악은 마산 성호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 숙명여자고등 보통학교로 유학을 오면서 우리나라 최고 학부의 교육을 받았다.

키도 크고 활달한 천소악은 학창시절 농구 등 체육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학교생활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숙명여고보 교지 편집부에서 학교 교지를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일제 강점기 시대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29년 11월 3일(천소악은 숙명여고보 4학년 재학 중), 광주에서 일본 남학생이 조선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자 조선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과의 충돌로 이어져 광주학생항일운동(광주학생만세운동)이 촉발되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서울에서도 숙명, 진명, 배화, 이화, 휘문, 보성, 중앙, 중동학교 등 서울시내 20여개 학교들도 일제히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 1930년 1월 15일, 서울 시내 20여개 연합학교 학생들은 종로 거리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는데, 중동학교가 도착하지 않았고, 일본 경찰에게 이미 가두시위 계획 정보가 넘어가 서울 시내는 엄중한 보안 태세로 긴장되었다. 그러나 연합학교 가두시위는 진행하지 못했으나, 각 학교 학생들은 저마다 각 학교에서 만세 운동을 하며 항쟁하였는데 이날 15일 밤까지 일본 경찰에 검거된 학생들만 해도 400여명이 넘었다.
(동아일보 1930년 1월 17일자 석간 2면) 기사

다음날인 1930년 1월 16일에도 서울 시내 학교마다 일본경찰의 경계는 물 샐틈없이 엄중하였는데 15일 만세운동에 동참하지 않은 학교들도 일제히 교문 밖으로 몰려나와 만세운동을 지속하였다. 협성실업학교, 경성여상고, 경성보육학교, 태화여학교, 진명, 숙명여고 등의 학생들은 각 학교 교문 밖으로 진출하다 일본경찰이 진압하자 일부는 유리창을 깨고 나가고 일부는 후문으로 나가는 등 거리에서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가행렬을 하였다. 시내 곳곳에서 학생들의 만세시위 운동으로 일본경찰의 경계는 최고조에 달했고 수백명 넘는 학생들이 취조와 수색으로 검거되었다.

한편, 1930년 1월 16일, 종로 수송동(현: 종로 조계사 옆)에 위치한 숙명여고보 400여명의 학생들도 동요돼 교문 밖으로 만세를 외치며 진출하려 했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저지를 당했다. 할수없이 교내에서만 울부짖으며 만세운동을 했으므로 숙명여고보 학생들은 거의 일본경찰에 검거되지 않았다. 그러나, 끝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며 항쟁을 하던 천소악은 몰래 교문 밖으로 빠져나가 다른 학교와 연락을 취하고 늦게 학교에 돌아오다 그만 일본경찰에 눈에 띄고 말았다. 결국 일본경찰에 체포돼 경성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되면서 구류 20일의 처분을 받았고 학교는 천소악을 무기정학 시켰다. 1930년 2월 5일 천소악이 석방되자, 학교는 무기정학을 해제하였고 3월 25일 천소악은 숙명여고보를 졸업하였다.

천소악은 졸업후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와 살면서 5년 후 24살 때인 1935년 6월 21일, 마산 유지의 아들로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김영식과 결혼을 했다. 마산 창동에서 4남3녀의 7남매의 자녀를 낳고 유복하게 잘 살던 중,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 안타깝게도 남편 김영식이 실종돼 불행히도 생사를 알수 없었다. 천소악은 남편 김영식이 운영하던 정미소와 스텐레스 공장, 단추 공장을 맡아 운영하면서 7남매의 자식들을 모두 대학 공부까지 뒷바라지 하였다.

그러나, 천소악은 1960년 9월 21일 마산 창동 17번지 자택에서 위암으로 4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선산에 모셨던 천소악의 묘소는 1978년 5월 4일, 현재 경남 창원공원묘원 C-71호 묘소로 이장해 행방불명된 남편 김영식의 초혼묘와 함께 합장하여 안장돼 있다.
천소악은 살아 생전에, 학창 시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자식들에게조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함구해서 자식들은 전혀 모르고 살았다. 2019년 3월 국가보훈부에서 연락이 와 그때서야 비로소 자식들은 어머니 천소악의 항일 학생 운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1945년 8월 이후, 대한민국은 광복이 되었지만 그 당시 친일파로 들끓었고 신탁통치로 미군정이 섭정하면서 혼란스러운 시기에 6.25 한국전쟁까지 겪는 격랑의 시대를 살았던 천소악은 자신의 떳떳한 독립운동에 대해 평생 가슴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이 참으로 원통하고 안타깝다.

2019년 3월 1일 천소악은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파일:천소악(독립운동가).png
독립운동가 천소악(우)과 배우자 김영식(좌)
이에 앞서 2014년 11월, 천소악의 장남 김한석은 천소악의 숙명여고보 시절 찍은 입학식, 운동회, 금강산 수학여행, 각종 학교 행사 사진들을 비롯한 교지와 책자 등 총 18점을 정리하여 숙명여고 사료관에 기증하였다. 마침 김한석의 외손녀가 당시 숙명여고 재학중이라 온 가족이 다 같이 교장실에서 사진도 찍고 사료관 방문도 하였다.

4. 여담

천소악의 아버지 천종록은 경상도, 서울, 인천, 함경도 등을 다니면서 무역업을 크게 하였는데 후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정어리 공장을 운영하였다. 당시 정어리 공장에서 큰 수익을 벌어들이면서 일부는 만주 광복군에게 독립 자금을 대 주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5. 관련기사 및 자료


* 위 내용은 천소악의 유가족과의 인터뷰를 거쳐 2024년 제2차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역사답사팀의 '독립운동가 위키 정보 수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독립유공자 서훈은 독립운동가의 옥고 기간과 공적 기간을 기준으로 하는 정량적 평가와 업적의 내용 및 기여도 등 정성적 평가를 바탕으로 분류하며, 대통령 표창은 10개월 미만 옥고인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