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신정숙(1972)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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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함께 찍은 사진. | |
본명 | 신봉빈(申鳳彬) |
출생 | 1910년 5월 12일 |
평안북도 의주군 | |
사망 | 1997년 7월 8일 (향년 87세) |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서로 95 대전을지대학교병원 | |
거주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西大門區) 갈현동366-16[1]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29 경교장 [2] 대전광역시 동구 용전동 용전아파트 A동 103호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 652[3] |
가족 | 첫째 배우자 장현근 아들 장영원[4] 둘째 배우자 김문호 아들 김건웅[5] |
서훈 | 건국포장 수훈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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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한국광복군 1호 여성 대원이다.신정숙 공적정보
2. 생애
1910년 5월 12일 평안북도 의주(義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신봉빈(申鳳彬)이다. 신정숙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지어줬다고 전해진다. 평북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신조준(申肇峻)[6]의 딸로, 19세 때 충청북도 음성(陰城)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현근(張鉉瑾)[7]과 결혼하였다.3.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남편 장현근 지사가 애국청년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 1932년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중국 훙커우 공원 의거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고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동지인 김덕근(金德根)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로 이송되자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한편 춘원 이광수(李光秀)[8]의 비밀연락문을 냉면 그릇에 숨겨 안창호에게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1년 장현근 지사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자 중국 만주로 떠났다.산둥성 중국군 유격대에 포로가 되었다 중국 광시성(廣西省) 꾸이린(桂林)에 있는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대(婦女服務隊)[9]에서 1년 반의 특무 교육을 받았다.
중국군의 포로 생활할때 포로수용소의 80%는 일본인이었고 나머지는 조선인이었는데 포로수용소에서 체육활동이나 배급이나 지급하는데 일본인의 지시를 받게 되어있었다고 한다. 신정숙 지사는 일본어를 알기 때문에 일본어로 항거를 하면서 중국군 장교에 눈이 띄어 백범 김구에 보고되었다고 한다. 아들 김건웅씨 증언 [10]
4. 한국광복군 제 1호 여성대원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 되자 1941년 한국광복군 제 2지대로 배속되었고 이후 징모 제 3분처 위원 겸 회계조장으로 파견되어 연락망을 구축한 징모와 선전 공작, 지하 첩보활동을 수행하였다.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위원 환송기념식(1941년 3월 1일)
충칭시 허핑루(和平路) 우시예샹(吳師爺巷) 1 호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는 이날 오전 제23주 3·1절 기념식의 뒤를 이어, 오후에 김구(金九) 주석, 이청천(李靑天) 광복군 총사령관을 위시한 정부·군·정당 관계 요인들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임시정부 비서 실장 차이석(車利錫)의 사회로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의 성립 전례식(典禮式)이 있었는바, 이 날 임명장을 받고 임지를 향하여 떠나게 된 제3 징모분처의 임원 명단은 아래와 같다.[11]
주임 위원 겸 선전 조장 김문호(金文鎬)
위원 겸 정보 조장 이지일(李志一)[12]
위원 겸 훈련 조장 한도명(韓道明)[13]
위원 겸 회계 조장 신정숙(申貞淑)
위원 강치명(姜治明)]
1941년 4월 29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로부터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사령부에서 유격작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하였으며, 한국독립당 제 8구당 집행위원을 맡으며 정보 수집, 대적 방송공작, 선전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1941년 11월 중경에서 열렸던 임시정부 34차 의회에서 당시 주석이었던 김구와 조소앙(趙素昻)으로부터 공로 표창을 받았고, 중국 장제스(藏介石) 총통(總統)으로부터 “한 명의 한국 여자가 중국 장병 1천명보다 강하다”라는 찬사를 듣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 공작인원 명단(1943년 7월)
직책 | 성명 | 연령 | 적관 | 출신 | 비고 |
대장 | 김문호 | 29 | 황해 해주 | 해주보통학교, 해주중학교, 와세다 대학 법학과 졸업 | |
대원 | 김운경 | 27 | 경성 | 경성 매동공립보통학교 | 제 3전구 포로/ 광복군 편제에 제외 보안처에서 관리 |
대원 | 왕영일 | 32 | 함남 원산 | 일본 다이인 고급중학 졸업 | 제 3전구 포로 |
대원 | 마춘림 | 31 | 황해 해주 | 해주중학 졸업 | 제 3전구 포로 |
대원 | 신봉빈 | 31 | 전북 | 전주고등과 | 여성, 신정숙으로 김문호의 내연녀 |
대원 | 이지일 | 28 | 평북 | 신견중학 교사 | 가명 전선학[14] |
대원 | 김형석 | 25 | 전북 | 농림학교 졸업, 측량기사 | 이소민 부대 편입 |
대원 | 이명식 | 24 | 황해 해주 | 고등학교, 장사 | 이소민 부대 편입 |
대원 | 한진원 | 24 | 경기 | 경기 숭실중학 졸업, 교사 | 제 3전구 포로, 현재 항저우에 있음 |
대원 | 유명경 | 26 | 강원 | 강원농업학교 졸업, 농림기사 | 펑텐 거주 |
대원 | 유상운 | 27 | 황해 해주 | 옥산여고 졸업, 교사 | 여성, 상하이 거주 |
대원 | 이기심 | 27 | 경기 | 인천중학 졸업, 기사 | 제 3전구 포로, 항저우 거주 |
대원 | 진몽각 | 35 | 평북 | 신의주 중학 졸업, 제지회사 사원 | 상하이 거주 |
대원 | 증 명 | 24 | 경기 | 경기고등직업학교 졸업 | 난징 거주 |
대원 | 조동걸 | 28 | 함북 | 청진고등중학 졸업. 교원 | 상하이 거주 |
대원 | 최일영 | 29 | 경기 | 경성 숭실중학 졸업, 운전수 | 상하이 거주 |
대원 | 김운정 | 33 | 전남 | 하포중학교 졸업, 장사 | 난징 거주 |
대원 | 사중득 | 24 | 전남 | 부산중학 | 여성 이소민 부대 편입 |
대원 | 유증영 | 26 | 중국 산시성 | 간이사범학교 졸업 | 여성, 중국인, 이소민 부대 편입 |
대원 | 정봉수 | 제 3전구 포로, 횡령 도망하여 붙잡혀 처벌됨. | |||
대원 | 김 의 | 제 3전구 포로, 정봉수와 도망 |
1942년 10월 중국 난핑(南平) 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로 편성되어 광복군 징모 제3분처 주임을 역임하였던 김문호(金文鎬)를 대장으로 하고 대원 이지일(李志一), 안악신(安岳信) 20여 명과 함께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일본군 후방 교란작전 및 정보 수집, 비밀 연락 임무를 수행하였다.
김문호(金文鎬)와 신정숙 사이에 태어난 아들 김건웅씨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과 교전 중에 피신한 곳이 강가의 배였는데, 일본군들이 몰려오니까 김문호에게 던져주면서 "자식은 아버지가 키워야 한다."하며 기관총을 들고 일본군 포위망 활로를 열었다고 한다. 경기도 강화 출신 광복군 신의철 증언[15]
5. 광복 이후
광복 후 1946년 3월에 부산항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녀의 아들 장영원 씨가[16] 어머니가 계신다는 여관에 찾아와 방문을 두드렸다. 장영원의 회고에 따르면, 모친이 "누구세요?"라고 물었을 때 이미 그때부터 어머니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리고 "저 영원이에요"라고 말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둘이서 부둥켜 안고 그동안 얼마나 서러웠는지 2시간여 동안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고 한다.#이후 서울 경교장에서 아들과 함께 머물던 그녀는 김구가 서거한 후 생계를 꾸리기 힘겨워 궁핍한 생활을 했다.
6. 한국전쟁
1950년 6월 29일 오후 8시 경 대한민국 육군 헌병총사령부에서 근무하는김문호와 함께 김석원예비역 장군과 이일범, 김룡과 함께 오산방어전을 구상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부산까지 피난 갔다고 한다.[17]대전광역시 동구 홍도동에서 고려산업사(高麗産業社)이라는 간장 및 된장 공장과 양계업을 운영하면서 군납하는 공장을 운영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부모를 잃은 아이들 20여 명을 조력하거나 고학생들의 학비를 부담하는 등 육영 및 교육, 장학 사업에 힘을 보탰다.
7. 기타
1963년 독립유공자 연금제도가 생겼을 때, 그녀는 연금 수령을 거부했다. 당시 독립유공자 선정을 국사편찬위원회의 특별심사위에서 했는데, 독립운동과 무관한 자들을 유공자로 둔갑시키는 그들의 역사왜곡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진정서를 제출한 덕분에 1977년이 되어서야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1997년 7월 8일 대전에서 노환으로 별세했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52에 안장되었다.
2014년 8월 국립대전현충원 "이달의 현충인물"로 소개되었다.
8. 참고문헌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222면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625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235·23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10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9·318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74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7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11·234·439·441·615면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
광복절 특집 광복군 군번 1호 신정숙, 추억의 영상, KBS 2008.6.6 방송
[1]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일대인데 과거 자료라 어디인지 정확하지가 않다. 광복 이후 마포와 영등포까지만 시가지가 형성되었던 서울에선 상당히 멀고 외진 곳이다.[2] 그녀의 아들과 함께 경교장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3] 배우자 장현근 합장묘[4]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한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1994년 미주에서 광복회를 조직.[5] 독립운동한 남편이 2명있고 성이 다른 아들이 두 명이 있다. 김문호의 아들인 김건웅씨로 대전에 거주[6] 공훈록에는 등록되어있지 않다.[7] 장현근의 공적정보[8]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독립운동가 사이를 저울질 하면서 결국 부일역적이 되어버렸다.[9] 김원봉의 둘째 아내 박차정 지사가 부녀복무대 단장이다.[10] 이때 김구는 창사에서 이운환의 총격을 받고 상아의원에서 회복 중이었다.[11] 김구(金九) 저 ≪백범일지(白凡逸志)≫ 기적(寄跡) 장강(長江) 만리풍(萬里風) 조, 김문호(金文鎬) 제공인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 분처 자료 참조[12] 본명은 이규학[13] 본명은 김응삼[14] 본명은 김응삼, 일명 한도명으로 알려져있는 평북 선천 출신 인물로 1942년 6월에 절감회전(浙贛會戰) 난계역에서 총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이규학(이지일)이 동료의 별명을 문서에 적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15] 1944년말에서 1945년 초반으로 추정된다.[16] 신정숙은 남편을 찾아 만주와 중국 등지를 떠돌았을 때 아들을 조선에 남겨뒀다.[17]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 p.333